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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유 May 24. 2023

I'm a foreigner!

필리핀 세달살이 4

2023년 5월 19일


푸르디 푸른 하늘빛이 순식간에 그 쨍함을 잃더니 투두둑 빗방울이 떨어진다. 고슬고슬한 흙 위를, 생기잃은 풀잎 위를 투두둑투두둑. 그 소리가 참 시원하다. 이곳이 언제 쨍했냐는 듯이 기분 좋은 바람이 귓가를 스친다. 분명 우리만 시원한 것은 아닐 터이다. 가끔은 호흡이 곤란할 정도의 매연을 뿜어내는 오토바이의 행렬 속에서도 꿋꿋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꽃들과 끝없이 뻗어가는 커다란 나무들도, 축 늘어진 꼬리로 파리를 쫓아내던 코끼리 같은 소들도 덩달아 숨구멍을 넓힐 것이다. 만사 귀찮아 보이던 길거리를 방황하는 개들도, 닭들도 이렇게 매번 새로운 목숨을 부여받으며 매일매일 새롭게 살아가는 건 아닐까.

쿨해진 날씨와 마음을 더 오래 간직하고 싶어 지아, 서윤, 은빈이와 마트를 가기로 했다.  채비를 하는데 채 5분도 걸리지 않았는데... 문을 나서기도 전에 이미 쨍한 날씨가 돌아와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느리고 여유로운 곳에서 저 구름만, 저 소낙비만 이렇게 재빠를 수가 있을까? 좀체 잡히지 않는 눈앞의 작은 물고기 떼 마냥 마음만 안타까울 뿐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저 또다시 우리 귓가로 시원한 바람이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 밖에.

이왕 나선 걸음, 포기할 수 없지. 도로까지 걸어가 트라이시클(페디캡이라고도 한다)을 타야 한다. 현지인들처럼 그저 빈 차를 세우고 정해진 금액을 내며 맘 편히 이용하고 싶지만, 그들은 용케도 외국인임을 알아보고 태우기 전 가격을 협상한다. 드라이버에 따라서 가격이 두 배 이상 차이가 나기도 하기에 그냥 호락호락하게 협상할 수는 없다.

이번에는 운이 좋다. 협상은커녕 처음 제시한 가격으로 덥석 타라는 인상 좋은 할아버지 덕분에 기분 좋게 출발했다. 털털거리는 바이크로 커다란 트럭 옆을, 쌩쌩 달리는 젊은이들 옆을 유유자적하게 운전하신다. 여전히 미소를 띤 채. 그런데 나는 점점 좌불안석이다. 이렇게 마음씨 좋은 분께 왜 다른 험악한 사람들에게 보다 더 적은 돈을 드려야 하는가. 결국 50페소를 더 얹어드렸다. 선한 분들이 이곳에서 조금 더 오랫동안 선한 마음으로 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겨우 50페소를 드리면서 할아버지보다 내가 더 큰 위로를 받았음이 분명하다.


이곳에 온 지 한 달이 지나니 한국에서 가져온 생필품들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한다. 샴푸, 린스, 세제 등 필요한 것들도 사고, 현금도 인출해야 하고 또 시원한 음료도 한 잔 마시고 싶다.

그런데 난관이 참 많다.

상품값을 지불하려고 카드를 내미니 갑자기 여권 사본이 아닌 실제 여권을 가져오란다. 이미 4~5번째 방문하는 마트인데 이제야 뜬금없이 말이다. 잠시 실랑이를 하다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한국 ID 카드밖에 없다며 나름 불손하게 주민등록증을 내밀었더니 그제야 OK다. 영어 하나 섞이지 않은 한글 ID카드가 필리핀에서 제대로 먹힌 것이다.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3개의 현금 인출기 중 두 개가 고장이 나서 남은 하나에 대기인원이 대여섯 명이다. 쨍한 햇볕 아래서 말이다.

음료를 주문했더니 기계가 고장 났다며 주문서를 손으로 일일이 적어 옆집 가게까지 친절하게 데리고 가 결제를 한다. 시간이 많이 걸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카페에 앉아 우아하게 마시고 가고 싶었지만, 가당치 않은 꿈이었나 보다. 급하게 take out 해서 마트를 나왔다. 시간은 지체되었지만 해야 할 것, 하고 싶은 건 다한 셈이다. 혼자 조급해 해봤자, 짜증 봤자 아무 소용없다. 나만 더 더워질 뿐이다.


그리고 또다시 협상의 시간, 왼쪽 코너에 두어 대의 트라이시클이 보여 재빨리 뛰어갔다.

“Bongao in Valencia”

“Ah, Kalikasan, 안녕하세요”

“Yes, Yes, Kalikasan”

뜨거운 대지에 소낙비가 내리듯 지친 마음이 갑자기 고개를 쳐들어 한껏 밝아진다. 알은체하는 ‘안녕하세요’ 한국말 한마디가 시원한 바람처럼 우리 귓가를 맴돌았다.

어느 나라에서든 외국인은 아무래도 티가 나니

어수룩한 언어로 협상을 해야 하는 난관도 지만, 또 많은 소소한 호의를 받기도 한다. 시원한 커피 한잔을 손에 들고 춤추듯 덜컹거리며 달리는 이 길, 후덥지근한 바람이 내 머리칼을 마구마구 휘저어댄다. 빨간 스포츠카에서 하얀 머플러를 휘날리는 그녀가 된 것만 같다.

우리는 돌아오는 내내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너저분한 공터, 아무렇지도 않게 굴러다니는 비닐 봉지들, 길가에 넘쳐나는 검은 하수돗물까지 그저 자연스럽기만 하다. 아니 아름답기만하다.

쓰레기 하나, 물 한 방울 없는 도심의 까만 그 길, 그곳의 저것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어느 곳이 더 자연스러운가, 더 아름다운가.

이곳에서의 내 마음을 오늘 날씨처럼 도대체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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