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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유 Oct 09. 2022

마흔에 내가 한 일

마흔, 딱 마흔에 대안학교에 입문했다.

서른이 넘어 결혼을 하고 첫 아이부터 노산이었던 내게 제2의 인생 출발치고는 그리 늦은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첫째 아이를 낳으면서부터 시골에서의 삶을 꿈꾸며, 그 어느 깊고 그윽한 곳에서 아이들과 함께 하는 삶이 나의 목표가 되었다. 첫 아이가 돌이 되자마자 대안학교 교사 양성 프로그램에 발을 들였다. 역시 내가 꿈꾸던 곳이 어딘가에 이미 펼쳐져 있었고, 나만 열심히 수련하면 그곳에 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왕복 5~6 시간이 걸리는 곳을 주말마다 다니며 온 식구들을 시험에 들게 했다. 하지만 이 꿈은 ‘나의 꿈’이 아니라 ‘우리의 꿈’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며 점점 더 빠져 들어갔다.

그러나 역시 인생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예상치도 못하게 둘째를 가지게 되었고 나의 꿈은 자꾸 뒤로 밀렸다. 뒤로 밀리는 건 그래도 괜찮았다. 이렇게 점점 멀어지다 영원히 사라져 버리면 어떡하나 하는 막연한 두려움은 너무도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런 마음은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남편도 기약 없는 우리의 현실에 점점 기운을 잃어갔고 급기야 우리의 다툼도 잦아졌다. 이 좋은 세상에 왜 거꾸로 가는 짓이냐며 온 마음으로 우리의 꿈을 걱정하신 부모님만이 한 시름 놓으신 듯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그래 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운명일지도 몰라. 얼른 다음 이사 갈 아파트를 알아봐야겠어. 큰아이가 초등학생이 되기 전에 적당히 학군 좋은 곳에 자리 잡아야겠지?

괜히 답도 없는 생각 말고 육아에만 전념하려 애썼다. 그렇게 둘째가 돌이 되자... 또 스멀스멀 나의 마음 깊숙이 숨겨 두었던 욕구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두 살 터울의 두 아이를 돌아가며 기저귀 갈고, 밥 먹이고, 목욕시키고, 책 읽어주고, 재우는... 이 세상에 태어나 내가 한 일 중 가장 자랑스럽고 뿌듯한 일이었고, 다시 하라고 해도 절대 할 수 없을 것 같은 위대한 일임은 분명하지만, 나는 어느 순간 또 다른 꿈을 어설프게 꾸고 있었다.

 결국 이제는 두 아이를 데리고 5~6시간이 걸리는 그곳을 다시 찾았다. 그곳은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또 반년을 열심히 다녔다. 육아에 소질이 꽤 있어 보이는 남편과 양가 부모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셨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덕분에 나는 육아에서 잠시 해방돼 밤하늘의 별을 보며 술 한 잔에 시를 읊어보는 호사를 누리기도 하고, 500년 된 은행나무 아래서 공주를 불러보는 왕자가 되어보기도 하며, 나의 아련한 과거와 불확실성 투성이의 현재 그리고 짙은 안개가 천천히 걷힐 듯 말 듯, 무언가 보일 듯 말 듯한 나의 미래가 뒤죽박죽 섞여가며 오롯이 나 자신을 만날 수 있었다. 나는 참 복이 많다.

그리고 남은 반년은 실제 교육현장 인턴체험이다. 보통 인턴 학교에서 임용이 될 확률이 높으니 가능하면 진짜 내가 살고 싶은 곳 그리고 임용이 될 가능성이 큰 곳을 선택해야 한다. 대학 수능 이후 내 인생에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았던 절체절명의 순간이 다시 온 것이다. 고민이 점점 깊어갔다. 

첫 번째 문제는 수월했다. 내가, 우리 가족이 살고 싶은 곳은 명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번째 문제는... 아무리 내가 고민해도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이다. 이제 막 대안학교에 문을 두드리는 내가 10년 이상을 그곳에 뿌리내리고 있는 그들의 마음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라고 결론을 내리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첫 번째 문제만 고민하기로 했고 그다음은 신의 뜻에 맡기기로!

우리는 산청을 선택했다. 친정과 시댁의 딱 중간이라는 운명적인 지리가 한 몫하기도 했지만, 깊은 지리산 자락에 파고들면 왠지 아늑할 것 같기도 했다. 사실 두 명이나 산청에 인턴 지원을 해서 임용의 가능성은 훅 떨어졌다고 주위에서 호들갑을 떨었지만 그래도 내 마음은 바뀌지 않았다. 굳이 바꾸지 말자고 다짐을 했었던 건 아니었다. 그냥 왠지 이곳이어야 할 것 같았기에 정작 나는 아무런 걱정도 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겨우 4개월 인턴 생활을 위해 2살, 4살 아기를 품에 안고, 2년 전세를 얻어 나의 모든 짐을 옮겨왔다. 남편만 빼고 말이다. 나에게 가장 귀한 사람이지만, 그렇게 빨리 직장을 정리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돈을 벌어야 하는 현실이기도 했다.

그 이후는 일사천리였다. 아무것도, 아무도 나를 막을 수 없었다. 

아이들 생각은 안 하느냐, 다른 사람들 사는 게 보이지 않느냐... 이삿짐을 정리해 주시는 아주머니까지 ‘새댁, 얼른 정리하고 다시 돌아와’라는 말씀을 남기고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듯 몇 번을 뒤를 돌아보며 높은 차에 올라타셨다.

하지만 나로서는, 포기할 것을 미련 없이 포기했더니 갈 길은 너무나 선명했다. 돌아볼 것도, 다시 생각해 볼 것도 없었다. 꼭 임용이 되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었다. 안되면 그건 그때 가서 고민하면 된다. 사실 거기까지는 고민도 하지 않은 것 같다. 

그저 나는 아주 간절했고, 왠지 그 간절함은 결국 통할 것 같았으니까.

그래, 맞다. 

나는 4개월의 인턴 기간이 끝나고 바로 그 학교에 임용이 되었다. 그리고 남편도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산청으로 들어왔고 우리 네 가족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 

내 나이 마흔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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