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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유 Jun 14. 2023

내 인생의 소나기

필리핀 세달살이 6

2023.06.07.     

오늘의 모닝콜은 수탉 몇 마리의 우렁찬 속삭임이었다. 어제는 가르릉거리는 고양이 소리가, 그제는 개짖는 소리가, 구슬픈 소 울음소리가 모닝콜이 되어주었다. 사실 처음 며칠은 어느 광활한 들판의 한가운데 누워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새벽잠을 설쳤지만 이제는 푸르른 들판의 포근함을 느끼며 일어난다. 이제는 다 아니까 말이다. 집집마다 적지않은 닭들, 개 두어마리, 고양이 서너마리 그리고 소 몇 마리쯤은 다 키우고 있다는 것을. 게다가 손바닥만한 도마뱀 또꼬까지 마치 자신이 뻐꾸기라도되는 듯이 아름다운 목소리로 울어댄다.


간단히 채비를 하고 또 아이들과의 일상을 시작한다. 오늘 오전 수업은 Philippine culture시간이라 아이들은 약간 들뜬 얼굴이다. 곧 다가올 farewell party를 준비하며 필리핀 전통 dance를 배운다고하니 충분히 들뜰법도 하다. 왈츠풍의 경쾌한 음악이 들리고 두 개의 긴 대나무 양쪽 끝을 잡은 두 아이가 박자를 맞춰 대나무를 움직이면 그 대나무 사이를 두 명의 아이가 또 박자를 맞춰 발을 움직이며 뛰어다닌다. 그 뛰어다님이 춤이 되어 대나무를 잡은 아이도, 뛰는 아이도, 바라보는 아이도 흥이 나 절로 어깨가  들썩인다. 교무실에 던 나에게까지 아이들의 흥겨움이 전해 그 순간을 놓치고싶지않은 마음에 쪼리의 끈이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고 달려가 카메라를 들이 밀었다.

그리고 단 몇 초만에 나의 어깨도 들썩이고 있었다.     

우기로 들어서며 햇살이 더이상 그리 뜨겁지는 않다. 신나게 춤을 춘 후, 네로리향이 가득한 정원을 바라보는데 예전의 그 쨍한 햇살이 오랜만에 찾아왔다. 옛친구를 만난 듯 설레어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뭔가가 번쩍한다. 뭐였지? 정전이 되려나... 생각할 새도 없이 우르릉우르릉쾅쾅 쏴-쏴-.

오랜만에 찾아온 옛친구는 수시로 찾아오는 소나기를 만나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시원하다.

예고없이, 어떤 기척도 없이 바로 억수같이 쏟아져내리는 소낙비. 더위와 함께 맘속 깊은곳에 머물러 있었던 작은 응어리들까지 모조리 씻어가 버리는 듯 하다. 아마도, 햇살이 사라지고 구름 빛깔이 점점 짙어지면서 ‘나 곧 갈테니 준비하세요’라는 신호를 주며 온 친절한 비였다면, 또 배려심 많은 우리는 덩달아 구름과 비와 바람에 보조를 맞추었을테니 내 맘속 깊이 자리잡은 묵은 까지 벗겨낼 수는 없었으리라. 지금까지처럼, 버리지못하는 그것들을 고이 감싸 둘 시간이 있으니까.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가 그래서 설레는 것이 아닐까? 갑작스런 비에 온 몸이 흠뻑 젖고, 덩어리진 마음이 물에 살살 녹아내리니 금새 둘이 하나가 되었다. 비가 그렇게 갑자기 내리지 않았다면 서로를 알아가는데 얼마나 더 긴 시간이 필요했을까?

갑자기 쏟아지는 그 무엇은 자신의 또다른 속내를 조금은 쉽게 드러나게 한다.    


문을 열고 나와 비와 마주 앉았다.

이국적인 야자수나무와 커다란 나무에 어울리지않는 작고 화려한 꽃들, 바나나 나뭇잎으로 만든 지붕, 그 사이 사이의 여백을 능숙한 놀림으로 시원하게 메우고 있는 소나기. 그것은 또한 천둥번개의 BGM을 달고 나의 마음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혹시 나에게도 그 어떤 설렘이 올까?   


서프라이즈? 이벤트? 그런건 별로야. 그저 강물처럼 변함없는 유유함이 좋아.

나에겐 ‘예측가능성’이 중요해. 내일 내가 무엇을 해야할지는 내가 정하고싶어.

그래, 난 그런 사람이야.

라는 식의 자기 정의를 내리곤했다.

이만큼 살았으니 그만큼 나 자신을 아는 것은 당연하다고 목소리를 높이기까지 했다.

그런데 아니었을까?

이렇게 갑작스러운 소나기로 스무살의 설렘이 다시 찾아오는건...    


어쩌면 이곳 필리핀에서의 3개월이 내 인생의 소나기일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또다른 나 자신과의 만남.

늘 함께했던 사랑하는 사람과의 긴 이별이 느끼게 해 주는  또 다른 차원의 사랑.


그래, 이 소나기,

피하지 말아야겠다. 우산을 쓰지도 말아야겠다.

그냥 흠뻑 맞아야겠다!


하지만 이런 갑작스러운 고백도 잠시다.

길어야 삼사십분.

다시 찾은 일상은 금세 바짝 말라버린 야잣잎 사이를 파고드는 바람의 사각거림이 채운다.


이 또한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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