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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엄 Sep 05. 2023

나는 종교에 의지했었다.

기도는 좋다.

나는 천주교 신자다. 태어나서 유아세례를 받았고 성당에 다녔. 매주 주일을 지키지는 못했지만 엄마와 고모들 손을 잡고 다녔던 기억이 있다. 아마도 할머니의 깊은 신앙심 때문에 우리 집의 문화가 되었던 것 같다.


할머니는 홀로 아버지와 고모들을 키우시며 힘들었을 고단함을 종교에 의지하셨던 것 같다. 신부님의 말씀과 성당의 교리를 굳게 믿으셨고 매일 저녁 묵주기도를 잊지 않으셨다. 최강 짠순이 기질의 할머니는 성당의 교무금만큼은 꼭 내셨고 성당 관련된 일이라면 열심히셨다.

그런 할머니의 모습은 나에게도 있다.     


고등학교 때 알 수 없는 마음의 힘듬으로 어찌할 바를 모를 때 밤이건 새벽이건 공소를 갔다. 공소는 본당보다 작은 곳으로 주임신부님이 상주하지 않고 순회하는 작은 마을의 성당이다.


어느 날 밤이었다. 너무 심심하고 마음이 무너질 것 같은 느낌 때문에 공소에 가서 기도를 하게 됐다.

할머니집과 공소의 거리는 300미터 정도 되었을까? 어두운 길이 무서웠지만 마음이 더 힘들었기에 용기를 냈다. 그렇게 두 손을 모아 공소 안의 까 십자가를 향해 기도했다.


‘너무 힘든데. 저 어떻게 힘든지도 모르겠어요. 그냥 힘들어요. 도와주세요.’     


눈을 감고 기도하는데 어떤 기운이 느껴졌다. 큰 손바닥 위로 내가 들어 올려지면서 나를 두 손으로 감싸주는 느낌이었다. 어두운 공소 안에 혼자 기도하면서 느껴지는 그 오묘한 느낌을 잊을 수 없다. 마치 누군가가 나를 위로해 주는 느낌이었다.  

내가 간절했기 때문이었을까? 기도하면서 느꼈던 그 느낌은 따뜻했다.


그 뒤로도 나는 힘들 때마다 기도했다. 그 느낌을 다시 경험하고 싶어서 집에서도 기도했고 새벽의 성당에 가서도 기도했다.

내가 살아오면서 그런 느낌은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기도한다고 느낄 수 있는 경험은 아니겠지만 누군가가 나를 지켜준다는 확신은 있었다. 그때의 그 느낌으로 나는 ‘하느님’을 의지했고 힘들 때마다 성당을 가거나 기도를 했다.     


종교생활을 꾸준히 했었더라면 좋았겠지만 여러 가지 상황으로 그러질 못했다. 마산에서 대학을 다녔을 때도 양덕성당에 가끔 다니긴 했지만 매주 주일은 지키지 못했다. 아쉬운 부분이다. 꾸준한 종교생활로 좋은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었을 텐데 겉으로만 돌았다.     


결혼생활 중에도 아이들을 재우고는 새벽에 성당에 가곤 했다. 혼자 기도만 하고 나오는 상황이었지만 성당이 편했다.      


내게 번아웃이 왔을 때도 제일 먼저 성당을 찾았고 아이들과 성당을 다니기 위해 수녀님을 찾게 되었다. 성당문을 연 순간 운 좋게도 수녀님을 뵙게 되었고


“아이들을 주일학교에 보내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큰아이가 초등학교 6학년이고 작은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입니다.”


“지금 유아세례교육 중인데 중간에 따라오실 수 있으시겠어요?”


수녀님은 나의 간절한 눈빛을 보시고는 교육 중간에 우리를 받아주셨다.

그런데 아이들의 반항이 만만찮았다. 나는 간절하지만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갑자기 성당에서 교육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원하지도 않는 교리교육을 엄마 때문에 해야 하는 과제로 생각해서 억울해했고 싫어했다.


3~4일을 지켜보신 수녀님께서 아이들과 저를 부르셨다.


자매님! 안 되겠어요. 아이들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 때 다시 오시는 게 좋겠습니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희망이 생겼는데 안 된다고 하시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나 이거 아니면 안 되는데...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하지?' 


아이들 앞에서 울었던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눈물이 나는 것을 멈추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갑작스러운 눈물에 나도 당황했지만 다음을 생각해야 했다.   


‘하~ 어떡하지? 애들 앞에서 울다니... 안 되겠다. 이왕 이리된 거 더 울고 나중에 얘기해야지’      


속으로 난 애들과의 협상을 생각했다.

놀라운 판단력이었다.

내 눈물에 수녀님은 나를 안쓰럽게 생각하셨고 몇 가지 조건을 요구하셨다.

다시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린 뒤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마트로 갔다.


내 마음도 추스르고 우리의 기분도 바꾸기 위해서였다.     

독하고 강한 엄마의 모습으로만 보았던 아이들은 내 눈물에 많이 놀란 눈치였다.

그런 아이들을 데리고 힘없이 마트를 갔다.

기분전환과 함께 아이들과 장을 본 후 차 안에서 큰아이가 말했다.


“엄마! 아까 왜 울었어요?”

“엉?”     


나는 아이들과 협상을 하기 위해 집으로 바로 가지 않고 카페로 갔다. 그곳에서 맛있는 코코아와 케이크를 먹으면서 말했다.


“교리교육을 잘 마치고 세례를 받으면 너희가 원하는 것을 사 주겠다.”


“정말로요?” 


아이들은 너무 좋아했다. 마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눈빛으로.

큰아이는 핸드폰을 작은 아이는 자전거를 요구했다. 종이에 각자 원하는 것을 적고 사인을 했다. 협상은 잘 끝난 것이다. 서로 만족하고 나는 아이들에게 부탁했다.


“성당 교육은 중요한 거란다. 교육받는 중에 절대 불평불만은 안돼! 여긴 언제든 그만둘 수 있는 학원이 아니야. 신부님과 수녀님 말씀 잘 듣고 기분 좋게 세례 받자.”     


그렇게 아이들은 세례를 받았고 나와 성당을 다녔다. 아이들과 성당을 가는 동안 너무 좋았다. 좋은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었고 아이들이 있어서 외롭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번아웃을 극복했던 것 같다.      


지금 아이들은 성당에 가지 않는다. 나 때문에 간 거였다고 말했지만 주일을 지키긴 쉽지 않았을 거다.

주일학교를 다니며 그곳에서 아이들과 한 경험들은 없어지지 않는다. 내가 의지하는 곳에 아이들과 함께 다니며 기도할 수 있어서 든든했다. 아이들이 주일학교를 다니는 동안 자모회 총무와 회장으로 2년간 봉사활동도 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우리를 받아 준 감사함의 표현이었고 아이들이 성당에 적응을 잘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성당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동안 많은 경험들을 했다. 월례회도 준비하고 회의도 참석해 가며 사람들과의 소통도 많이 했던 것 같다. 내가 해보지 않았던 일을 통해 내게 부족했던 점을 알아갔던 시간들이었다.       


예전의 아버지가 생각난다. 아버지는 그 당시 공소에 계셨던 은사님을 목적지까지 모셔다 드렸다. 그때 난 차에 타고 있어서 두 분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 은사님에게 하셨던 말씀이 생각난다.


“요즘 너무 힘들어요.”     


나는 놀랐다. 우리 아버지가 속마음을 털어놓는다는 사실에 말이다.

강한 면만을 보고 자란 나에게 아버지 힘들다는 말은 놀라움이었다.     

어릴 땐 남자든 여자든 누구나 힘들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냥 견디며 사는 것이고 다른 활동들을 통해 잊어버리려는 노력을 한다는 것을 말이다. 특히 남자는 눈물을 보이면 안 돼!라는 시대적 흐름상 아버지의 힘들다는 말씀은 나름의 충격이었다.  
 

그때의 기억으로 나는 수녀님에게 나의 속 깊은 이야기를 하는 것에 어려움이 없었다.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못해도 수녀님에게는 털어놓을 수 있었다.

그렇게 털어놓음으로써 나를 돌아보게 되었고 수녀님을 통해 나를 알아갔다.


이런 도움들이 그냥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믿음이란 것은 참 중요한 것 같다.

내가 성당을 통해 믿음을 배웠고 삶의 방향들을 다시 잡을 수 있었다.


‘나를 지켜주는 수호천사는 분명히 있다.’


믿음은 삶에 든든함이 된다.

종교는 내게 지혜와 용기와 힘을 주었다.      

일을 하면서 매주 주일을 지키는 것은 대단한 정성이다. 지금은 가지 않고 있지만 힘들어도 기를 쓰고 성당을 갔던 예전에 내가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그리고 생각한다.

'나 진짜 많이 좋아졌구나' 


나는 성당에 가야만 마음이 편안했었다. 기도를 하고 와야만 나아지는 줄 알았다.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법을 알고 있어서일까? 지금 나는 냉담자가 되었다.     


다시 성당을 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혼자는 가고 싶지 않다. 물론 기도는 혼자서도 계속할 것이다. 내가 성당에 다니면서 제일 잘했다고 생각한 게 기도하는 법을 배운 것이다. 자연 속 어디를 가더라도 열손가락만 있으면 기도가 된다. 밤에 하던 낮에 하던 하느님이 생각난다면 언제 어디서라도 할 수 있다.   


그렇게 난 보이지 않는 하느님에게 의지하며 살아왔다. 앞으로도 나의 하느님은 늘 계실 것이고 그분께 나의 힘든 것을 마음속으로 털어놓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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