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3학년아들이 통학증 미제출로 선도위원회에 올라간다는 소식을 전화로 알려주었을 때 느꼈던 게 있다.
"아직도 나를 무서워하는 건가?"
별 것 아닌 일로 일하는 엄마를 귀찮게 하며 서류까지 적어 내라고 하는 것에 대한 과민반응이었을까? 귀에 들리는 아들의 목소리는 나에 대한 미안함과 학교에 대한 원망이 섞이며 두려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학교보다 엄마에게 듣는 야단이 더 무서운 걸까? 하지만 고등학교 3학년에 나보다 키가 큰 아들이다. 엄마와 편하게 지내며 잘 소통하고 있는 아들에게 내가 느낀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의문이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나는 엄한 엄마였다. 옆에 있어 주며 유쾌하게 생활했지만 잘못한 점이 있으면 눈물 나도록 혼을 내는 편이었다. 그래서일까? 지금까지도 잘못한 일이라 판단되면 나에게 미안해하며 엄마의 반응을 두려워하는 느낌을 받고는 했다. 엄하게 대한 것이라고는 강렬한 눈빛과 차분한 말투로 잘못된 점을 말해주고 그에 대한 반성으로 용돈을 주지 않는 게 전부였는데 말이다. 아이들의 두 눈을 보며 강한 눈빛으로 말을 한 점이 무서웠을까. 큰아들은 괜찮지만 작은 아들에겐 마음이 쓰여 물어봤다.
"아들! 엄마가 아직도 무서워?"
"아뇨. 편한데요."
"학교에서 선도위원회건으로 전화했을 때는 무서워하는 것 같아서 물어보는 거야."
"미안하기도 하고 억울한 상황이니 그럴 수 있겠지만 무섭지 않아요. 오히려 가끔씩 짜증 날 때가 있지요."
"아. 그래?"
머쓱해졌다. 오히려 잔소리를 쏟아내면 짜증이 난다니. 고등학교 3학년 아들다웠다. 그러다 선도위원회로 담임선생님과의 대화를 말해주었다.
"선생님이 엄마도 오실 수 있냐고 물으시던데 엄마 바쁘다고 안된다고 했어요."
"왜? 그런 일이 있으면 출동해야지. 말하지 그랬어?"
"아이. 무슨 좋은 일이라고 그런 일로 학교를 와요. 안 와도 되고 오면 안 돼요."
"너무 지켜주는 거 아니야?"
순간 내 머릿속에 스치는 아들과의 통화가 생각났다. 내가 느낀 아들의 목소리는 두려움이었다. 그런데 아들의 이야기들을 듣고 보니 그건 두려움이 아니라 나를 지키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던 마음에서 나오는 미안함이라 해야 맞을 것 같았다. 학교에 좋지 않은 일로 방문하는 엄마를 미리 차단하며 자신의 선에서 해결하는 모습을 보니 든든했다. 그리고 내가 느꼈던 감정에 의문이 풀리며 감동받았다.
"자식! 많이 컸네. 엄마생각도 해주고."
바르게 키운다고 강하게 훈육했던 예전의 그림들은 바래지고 지금은 아들에게 보호받으며 든든함을 느끼는 엄마가 되었다. 성인이 되고 세상을 살면 부득이한 상황을 맞을 때가 있다. 그때마다 잘잘못을 떠나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아들의 편이 되어 함께 고민해 주는 엄마이고 싶다. 그러기 위한 현명함을 채우기 위해 책도 읽는 것이니 아들의 올바른 편이 되기 위해 더 노력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