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3년 작은아들. 여태껏 통학버스를 타고 다녔지만 현장체험으로 학교를 가지 않는 날이 많아 12월은 직접 등교를 시켜주게 됐다. 2년 전과 마찬가지로 집에서 20분 일찍 출발해 아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출근을 하는 식이었다.
2년 전 두 아들은 같은 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집에서 학교까지의 거리가 멀어 통학버스를 이용했다. 우연히 통학버스를 놓쳐 버스를 기다리는 큰 아이의 모습을 보게 된 적이 있었다. 생각보다 무거운 기타를 등에 업고 책가방은 앞을 메고 걸어가는 모습에서 아련함이 느껴졌다. 이런 모습을 보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면서 학교 갈 때만이라도 같이 하고 싶어 등교를 시켜주게 됐다. 지금 녀석들을 데려다주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도 있었다.
자동차뒷좌석에 앉은 아들의 든든함이 차 안으로 가득해진공기를 마시며 학교로 데려다주는 길은 행복했었다. 큰아들의 고등학교졸업으로 그 느낌을잊고 있었는데 작은 아들의 등굣길을 시작으로 그 행복을 복기하는 느낌이들었다.
제시간에 나오기 위해 아들을 재촉하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우리는 투닥거렸다. 차를 타고 가면서 통학버스를 향해 달려가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며 아이의 친구를 알게 됐다. 같은 주제로 대화하며 각자 생각을 털어놓을 수 있는 시간이었고노래가사에 맞장구를 치며 구름 모양과 바다의 잔잔한 상태들에 떠들 수 있는 시간이었다. 온갖 차들의 운전방식에 토를 달고 아들과 웃었던 유쾌함이 등굣길을 통해 꺼내지고 있었으니 이 시간이 그리워질 것임을 알았다.
작은 아들을 등교시킨 마지막 날. 개운할 줄만 알았던 그 길이 아련함으로 다가왔다.
졸업식 전날과 졸업식이 있어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닌데괜히 감정에 앞서 서운함이 스쳤다. 같은 길을 다른 목적으로 다녔을 땐 몰랐는데 아들을 데려다줬단 이유로 느낌이 달라지니 등굣길이 그리워질 것 같다.
매일 학교에 갈 것 같고 매일 인사해 줄 것만 같은 날이 줄어든다는 것은 아이들이 컸다는 뜻이다. 핏덩어리였던 녀석들이 내 옆에서 든든함을 책임져 줄 때면 짜릿한 전율에 마음이 벅차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가끔씩 봐야 하는 사이가 되어가니 녀석들의 독립에 마음 정리가 필요한 시기임을 느끼게 된다. 아들을 키우는 엄마라면 혼자서도 씩씩해야 하니까 말이다.
작은 아들마저 두세 달 뒤면 독립이란 생각에 내가 할 수 있는 것들 중 많은 것을 내어주게 된다. 과일을 깎아주고 맛이 있든 없든 정성 들여 음식을 해주며 속으로 엄마 노릇했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그중 학교를 데려다주는 등굣길은 나만의 특별서비스라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들이 나에게 주는선물이란 생각이 든다.
이제 내게 고등학생 아들은 옅어지고 있다. 어쩌면 등굣길은 그리운 단어가 되겠지만 아이들을 데려다주었던 그 길로 고등학생이었던 아들을 기억하며녀석들과의 시간을 추억해 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