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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엄 Aug 22. 2023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 나부터 이해해야 했다.

과거의 기억은 나를 알게 했다.

결혼생활 중 힘들다는 생각이 들면 서점으로 달려갔다. 마음에 위로를 주는 책을 찾기 위해서였다.

서점에 가면 그 당시 내 마음에 꽂히는 제목의 책을 선택했다. 힘들 때 누군가와 소통하며 마음을 나누는 법을 모르던 그때 나의 선택이었다.


 아이가 어릴 때는 몸이 힘들기 때문에 책보다는 TV를 보게 된다. 당시 내가 제일 좋아하는 프로는 오프라 윈프리쇼였다.  오전에 TV를 틀면 나오는 방송이었는데 마음에 관련된 주제나 긍정적인 마인드의 중요성에 대해 많이 알려준 프로였던 것 같다. 20년 전의 내용이라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방송에서 배웠던 것은 힘들어도 긍정적인 생각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인생의 시련 속에서도 긍정을 찾도록 노력하고 인내해야 한다는 자기 계발형 방송이었다. 책을 읽어야 한다는 중요성에 대해서도 많이 느꼈던 것 같다. 좋은 책을 소개해주는 방송의 효과로 힘들 때 책을 선택했던 건 좋은 습관이 되었다.

  

경제적으로도 알뜰한 살림을 살아야 했고 가계부도 썼지만 쓴다고 나아지는 건 없었던 것 같다. 그저 들어오고 나가는 숫자들을 눈으로 볼뿐. 어느 순간 가계부가 부질없다 느껴져 온갖 감정들을 적다 보니 일기장이 됐다.


이혼하면서 20권 가까이 쓴 일기장들을 버렸는데 그 일기의 주된 내용은

'지금은 힘들지만 나중에는 잘될 것이다'라는 긍정의 메시지였다.

늘 같은 패턴의 글이었기에 미련 없이 일기장을 버릴 수 있었다. 이런 긍정의 글도 오프라 윈프리쇼의 영향력이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 생각해 보면 글에 관심은 있었지만 배움으로 연결하지 못했던 것 같다. 항상 끄적였지만 배울 대상인지도 몰랐으며 익힐 생각도 못했다. 초등학교 때 제출한 시로 상도 받았고, 고등학교땐 감나무에 대해 쓴 시로 선생님께 칭찬받았었는데 말이다. 문과로 진로를 잡고 공부해야 했었는데 그때의 나는 나를 너무도 몰랐다.


언젠가 아들이 음악공부를 하는데 작곡은 하겠는데 작사가 어렵다 하는 거다.


“뭐? 작사가 어렵다고? 엄마는 작곡은 어려운데 작사는 할만해 “라고 했다.


 그렇게 예전부터 작사를 하고 싶었었는데 이제는 작사를 하면 내 아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니 하게 된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해야 하는 것의 절박함은 사람을 움직이게 한다.


가사를 쓰겠다는 노력으로 책도 읽고 생각나는 감성을 끄집어내어 글을 적다 보면 하나의 시가 완성돼 있다. 물론 가사집을 만들어 놓는다고 해서 그대로 음악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안다. 음이 나오고 음의 느낌이나 분위기에 따라 가사를 다듬어야 하는 것이기에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글에 큰 의미를 두고 있지는 않다. 지금은 그저 글을 모은다는 느낌이다.


좋은 땔감은 불을 지피고 유지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 좋은 글감으로 쓰이기 위해 나를 단련시키는 중이다.


나는 고등학교 때 할머니댁에서 지내며 부모님과 떨어져 학교생활을 했다. 중학교 3학년 진로를 결정할 땐 일반고등학교 대신 부모님과 멀리 떨어진 상업고등학교를 선택했다.


  ‘내가 왜 이러고 있나’

라고 느낄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당시 중학교에서 나 혼자 상업고등학교를 지원했다. 친한 친구들도 많았으며 담임선생님도 다시 생각해 보라고 하셨는데도 말이다. 성인이 된 지금도 나는 저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다. 아마도 부모님과 생활하는 게 너무 갑갑했고 자유롭지 못하다 느껴 다른 학교로 도망쳤던 것 같다. 무식하게 참았으며 제대로 소통할 줄 모르는 고집 센 아이였다.


인생의 진로가 결정될 중요한 시기에 마음의 방황은 내 길을 찾지 못하게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문과생이었고 공부를 해서 더 많은 것들을 경험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내 길을 잃어버렸던 첫 순간이었다.


할머니집에서 학교를 다니다 보니 어릴 적 동네친구였던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다행히 첫 등교부터 외롭지 않게 학교생활을 할 수 있었는데 신기한 순간이었다. 혼자일 거라 생각하고 왔는데 친구들이 2명씩이나 그것도 내 짝이 같은 동네 친구라니. 인복은 있었나 보다. 하늘에서 나를 불쌍히 여겨 친구들을 만들어 주셨나 보다고 생각했다.      


그 시절의 경험을 교훈 삼아 나는 아이들과의 소통을 중요시한다. 릴 때부터

 '내 애들은 꼭! 내 손으로 키워 낼 거다.’

를 다짐하며 버스를 타고 다니던 기억이 있다.

따뜻한 정과 무언가의 대한 인정을 그리워했었다.


 부모님들도 반듯한 분들이셨고 먹고살기에 바빴던 시절이었기에 자식들의 모든 것에 지금처럼 애정을 쏟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부모님들을 이해하지만 내 안에 채워지지 않는 애석한 허기짐은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다.


그런 생각의 소유자였기에 애들을 내 등짝에서 키웠으며 엄마가 자식을 보는 게 당연하다 여겼다. 애들도 내 생각을 아는지 다른 사람에게는 손길과 눈길도 허락하지 않는 깐깐한 아이들이었다.


육아로 내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으로는 든든함과 정서적으로는 안정된 상태였다. 나의 보살핌이 필요한 존재가 두 명이나 되었고 나의 울타리가 확실했다. 난 혼자가 아니었다.


큰아들이 공업고등학교에 다니다가 1학년 2학기때 일반고로 전학을 가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자격증시험도 합격하고 실기만 남겨두었으며 코로나로 인해 학교생활을 많이 하지도 않은 시점에서 전학을 가겠다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큰아들과의 대화에서 나는 나의 고등학교 시절이 생각났다.


‘이게 아닌데. 나 뭐 하고 있는 거지?’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옆에서 붙들어 주는 이 없었고, 관심 가져 주는 이 없어 홀로 외로운 다른 길을 갔었다. 나의 길을 가지 못했고 길을 잃었었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살았는아들은 자기의 진로가 아닌 것 같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나는 동의했다. 그리고 공감했다. 존중하고 그런 생각을 나에게 말해 주어 고맙다고 했다.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엄마!'


지난날 나의 모습을 큰 아들을 통해 보게 되었다. 나도 부모님께 내 생각을  말했다면 인생이 달라졌을까를 생각하지지나간 일이었다. 오히려 아들이 말해주었을 때 내게 생각할 여유가 있었음에 감사했다.


그 경험은 지금의 이 시간을 위해 만들어졌다 생각하면 억울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감사한 거였다. 내가 아들과 제대로 소통하게 해 주었으니 말이다.     


할머니집에서 학교생활을 하는 동안 내가 한 일은 산이나 밭에 가서 무언가를 들고 오는 것이었다. 산에 가서 돌아다니거나 고구마를 캐오거나 밭에 가서 감을 따고 앵두를 따와서 먹는 것 말이다. 덕분에 고등학교 때 살이 많이 쪘지만 할머니의 간섭 외엔 자유로웠다.


할머니가 여행을 가셨던 2박 3일 동안의 시간이 생각난다. 혼자 생활하며 강아지 밥을 주고 학교 갔다 와서는 텔레비전도 실컷 봤다. 혼자라 편할 것 같았지만 신경이 많이 쓰였다. 할머니집은 옛날 한옥집이었기에 현관문이 아니라 나무 문에 창호지만  발라놓은 열쇠도 없는 문이었다. 겨울엔 추워서 대청마루에 큰 문을 설치했지만 그때는 문도 없던 때였다. 그런 집에 여자고등학생이 홀로 있다고 생각해 보라. 화장실도 마당 끝 입구에 있어 밤에도 나와야 했으며 열쇠도 없어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집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지만 그 당시 나는 견딜만했다. 마당에 강아지도 있고 곤충이나 식물들도 있으니 괜찮을 거다라는 무식한 생각에 크게 무서워하지 않았지만 그냥 적적했다.


외로움은 내 친구라는 생각을 그때 처음했다.    


그럴수록 먹는 것 말고 책을 더 많이 읽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지금부터 읽으면 되니까 그 또한 괜찮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우리 할머니는 종교생활도 열심히 하셨고 일도 잘하시는 능력 있는 분이셨다. 예전에는 농사밖에 몰라서 농사일에 최고셨지만 현시대에 여성이라면 한 분야의 일인자는 되셨을 분이다. 할머니와 생활하면서 잔소리 같은 간섭에 숨이 막힐 정도로 싫었고, 부모님과 할머니 사이의 감정기류도 느껴져 힘들었다. 온전한 나만의 감정을 토로하지 못하며 지냈던 것 같다. 하지만 같이 있으면 닮는다고 하지 않던가. 할머니는 매일 저녁마다 묵주로 기도하셨고 혼자서 일도 잘하셨다.


저녁마다 묵주로 기도하시는 모습은 지금 내가 아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모습과 닮았고, 농사일이라면 혼자서 여러 명의 일을 해내는 모습에서 지금 내가 일하고 있는 모습과 닮았다. 돌아가시던 날 많이 울었고, 코로나로 병문안도 못 가본 일이 가슴 아프지만  좋은 곳에 계실 할머니가 그려진다.


“일을 두려워하지 마라. 일은 눈으로 하는 게 아니다. 일은 손이 하는 거다” 


그 당시의 할머니가 내게 해 주신 말씀이자 할머니의 일에 대한 철학이 담긴 말씀이다. 한 분야에 열심히 일을 하신 분들은 말에도 힘이 있다. 

분명 배울 게 있었던 시절이었다.     


돌이켜보면 내가 해왔던 것들을 종합해 볼 수 있다. 자연을 좋아했고 농작물들과 친했다.

책을 좋아했지만 다독하지는 못했다. 간간히 읽었을 뿐이고 쓰는 행위를 통해서 내 안의 막힌 감정들을 토해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속마음을 이야기할 사람이 많지 않고 할 것도 없는 시골에서 밤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라디오를 들으며 책과 공책에 얕게 끄적이는 행위뿐이었다.


음악을 들으며 고모들이 쓰다 남은 화장품으로 얼굴에 색칠을 보고 마이크를 잡고 뭔가를 말했던 기억도 난다. 혼자서도 잘 놀았다.


그렇게 제대로 된 사회생활도 많이 못해본 상태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결혼생활을 했던 것 같다.

육아와 결혼생활에 처음부터 고수는 없을 테지만 아이들을 키우면서 나도 같이 성장해 간 것 같다. 아이에게 동아책을 읽어주고 그 당시 아이들이 좋아하던 뽀로로, 파워레인저 매직포스의 만화영화들도 같이 보면서 지냈다.


매직포스는 지구를 지키는 용사가 나오는 일본드라마인데 노래의 가사가 너무 좋았다. 아들을 키우는 엄마답게 지구를 지키는 영화나 꿈과 희망을 주는 영화는 지금도 좋아한다.     


책 읽고, 글 쓰고, 산책하고, 영화 보고 아들의 공연 보러 다니며 이혼 후 나의 삶들을 재정비해 나가고 있다. 이것은 내가 이혼 후에 마음의 안정을 찾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아들의 공연을 보는 것 외에는 이전부터 해왔던 것들이라 익숙했다. 그런데 이것이 이혼 후에 희망적인 삶을 사는 데 도움이 될지는 몰랐다.


아마도 파랑새는 내 주변에 있으며 보석은 내 안에 있다와 같지 않을까? 많은 분들도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갈 것이라 생각한다.


나만의 특별할 방법은 아니지만 이혼 후의 희망적인 삶을 사는 데 큰 도움을 받고 있는 행동들이다. 바다의 해일과 쓰나미를 겪으며 이겨낸 마음의 평화가 느껴진다.


언제든 혼란스러운 상황은 생기겠지만 나만의 방법으로 평화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겪어봤고 이겨내 봤으니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종합해 보면 나는 마음에 양식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내 마음이 부족했기에 세상에서 적응하고 성장하기 힘들었다.

일단 나를 채우고 함께 나아가려고 노력한다.

그 방식이 나의 예전의 삶에서 늘 했던  행동들이라서 놀랍다는 거다.

답은 내 안에 있었는데 성찰이 부족했다.


이혼하고 마음이 힘든 사람이 있다면 더더욱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이혼했다고 남을 원망하지 말고 나를 원망해서는 안 된다. 그건 이미 벌어진 일이고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다.

다시 시작하면 된다. 시작점을 예전의 나의 행동에서 찾아보길 권한다. 내가 했던 일들 중에 나를 기쁘게 했고 설레게 했던 행동들 말이다.


사회적 테두리 안에서, 법을 지켜가며 내가 기쁘게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해보면서 자신을 알아가 보길 바란다. 나를 먼저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어떤 걸 알아야 할지도 모르겠다면 무식하게 책부터 읽고 걷기부터 해보길 권한다. 


나의 2023년도 목표는 일주일에 한 권씩 책을 읽는 것이었다. 8월이 된 지금도 잘 지켜지고 있으며 어느새 습관이 되고 있다.

퇴근 후 식탁에서 읽는 책은 나의 후식인 것이다.


답은 본인 안에서 찾아야 한다.

자기부터 다독여야 한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은 나에 대해 잘 모른다.

나부터 알아주면 본연의 내가 알려줄 것이다.

이게 나라고.

이렇게 해 보자고.

일단 나랑 친해지자.

내가 나를 알아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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