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일기를 쓰고 나니 신기하다. 마음이 편해졌다.
받아들여지고 이해된다. 이젠 괜찮다.
7년 전에 치유의 기도를 알게 되었다. 마음의 평화를 위해 일기를 쓰고부터는 처음에 느꼈던 서러움들은 옅어지고 이성적인 내가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그리고 몇 가지 기억 속에 보였던 나의 공통점을 알게 되었다. 늘 혼자 고민하며 해결하려는 모습으로 힘들어했다는 점이다. 말로 표현하는 법이 서투르니 짜증만 늘었던 나를 안쓰럽지만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치유의 기도를 통해 알게 된 나의 힘들었던 감정은 서러움이었다. 그렇게 혼자 고민하며 씩씩한 척했던 내가 불쌍해 보였다. 그래서인지 처음 느꼈던 서러움을 마음속에 담아두었다. 그리고 서러움을 곁에 두면서 나를 불쌍하게 만들었다. 그냥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부정성은 효과를 발휘했고 내가 처절할수록 그 힘은 세졌다. 무엇이든 나를 안쓰럽게 보기 시작했으니 나는 감정의 균형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힘들어하다 평화로운 일상을 접하면서 나는 서럽지 않게 되어 괜찮은 줄 알았다. 그런데 마음속에 새겨진 부정성은 세력을 확장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엄마의 전화로 마음속에 새겨진 부정성이 다시 힘을 내기 시작한 것을 느꼈다. 힘들게 하려고 극단적인 말을 쏟아내는 나를 보고서야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나를 혼내고 다그치면서 다시 정의하기 시작했다.
죽겠다는 말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말이며 이런 말을 하는 나를 가만둘 수 없었다.
"나는 정말 잘 살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하니 내 안의 너도 앞으로는 다른 말을 써야 한다."
며 나를 다그치며 채찍질했다.
그렇게 이성적인 나는 내가 새겨놓은 서러움이라는 부정성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혼자 고민하며 고군분투하며 살았던 건 사실이지만 그런 부정적 감정을 선택한 것은 나 자신이었다. 더 현명한 방법들을 선택하며 살걸이라는 후회는 뒤로하고 이제야 알아챈 사실들에 편안함을 느낀다.
그리고 알아낸 부정성을 인정하고 잘게 부수어 흘려보냈다. 나의 괴로움의 실체가 그것이었으니 나는 수술하듯 잘라버려야 했다. 하지만 언제든 그런 상황은 올 수 있기에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지금 내가 무엇을 선택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모님의 편에서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부모님과 소통을 잘하며 지낸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를 착하고 바르게 키워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신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감사하다.
나는 할머니가 홀로 되시고 그 곁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일도 버리고 할머니 옆에서 지내시던 아버지의 삶을 알고 있다. 자신이 좋아하고 바라던 직업을 버리고 할머니 옆에서 지내며 평생 맞지 않는 일들을 하며 살아가셨던 지난날의 시간들을 말이다.
아버지는 내가 공무원이 되기를 바라셨지만 나는 맞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아버지가 되고 싶었던 직업을 자신의 자식들이 가지기를. 자신이 성취하지 못했던 후회와 미련이 남아서 자식들을 통해 대리만족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제와 돌아보니 잠깐이나마 대리만족하게 해 드린 법무사사무실에 다녔던 1년이 내가 했던 유일한 효도가 아니었나 싶다.
태어나보니 장남이었고 여동생 3명에 홀로 계시는 어머니의 존재로 짊어진 책임감은 힘겨웠을 것이다. 누구 하나 알아주는 이 없는 분위기 속에 홀로 고군분투하셨을 모습이 그려지며 마음이 아파진다. 던져 버릴 수도 없는 그 무게는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이며 자신의 본모습을 보지 못하게 했다.
나는 예전부터 책임감에 힘든 내색 않고 씩씩하게 살아가야 하는 아버지에게 마음이 쓰였었다. 남자로 태어났기에 함부로 울면 안 되고 집안의 궂은일들을 묵묵히 해 나가며 살아가야 하는 책임감 자체가 버거워 보였다.
힘들다고 말하면 약해보이기 때문에 못하고, 울면 지질해 보인다고 하기에 마음의 버거움을 짜증으로만 풀어나갔던 외로움들이 안쓰러웠다.
그런데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나도 모르게 배웠나 보다. 난 여자아이인데 아버지의 힘겨움을 느낀 순간 남자처럼 도와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해서 화가 났다. 이렇게 약해빠지고 능력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이 힘들었다. 하지만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었고 할 필요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우리 엄마는 어땠을까? 딸만 있는 집에서 막내로 태어난 엄마는 천생 여자다. 무뚝뚝하고 보수적인 우리 아버지 곁에서 모든 것을 맞추고 희생하며 사셨다. 또 완고하고 대쪽 같은 시어머니의 존재는 그야말로 벽이다. 내가 우리 할머니한테 뭐라고 하면 "성질 더러운 손녀가 한 소리 하네."라고 받아들이시지만 우리 엄마가 한 소리 했다가는 타박 맞는다. 그래서 내가 할머니에게 큰소리친 적도 많았다. 중간에서 보기에 엄마가 불쌍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 할머니는 어땠을까? 할머니는 할머니의 아버지에게 일 안 한다고 맞고 자랐다고 하셨다. 아버지가 회초리를 들고 쫓아오시면 무서워서 방에 가지도 못하고 소우리에서 밤을 지낸 적도 많다고 하셨다.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저런 부모님의 상황들이 이제야 그려지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렇다고 내가 받았던 상처가 없어지는 건 아니지만 부모님이 이해가 되면서 미안한 감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부모님이 표현하는 언어를 이해했고 나 또한 그런 부모님의 언어를 닮았기 때문에 우리는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힘들었던 건 사실이었지만 별거 아니었구나.'
지금 유지되고 있는 거리는 서로를 위해 더 지켜져야 할 것이다. 만나고 교류한다고 치유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서로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힘들어질 수 있는 사람들임을 알아야 한다. 서로에게 좋은 말을 건네지 못하는 상태가 아쉽지만 그렇게 살지 않았기에 적당한 거리가 나은 것이다. 현재의 나는 아직도 폭탄이니까.
만져도 아프지 않고 말해도 눈물이 나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많이 편해졌다는 것이다. 치유의 기도는 7년이 되어서야 마무리할 수 있었다. 물론 완벽한 것은 아닐 테지만 이 정도면 괜찮다. 이제는 감정이라는 것도 흘려보낼 줄 알며 이성적인 나와도 만날 수 있음에 감사하다.
이번달에는 아들의 힘을 빌려 부모님께 과일을 보내드렸다. 아직도 친정에 가지 않고 있지만 그냥 이대로 지내며 서로 기분 좋게 살아가고 싶다. 그다음은 지금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