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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적막함

외로움을 가끔은 응시 할 필요가 있다

by abecekonyv
젊은 형제 수도사에게

이제 기도하게, 내가 일러 주는 대로,
나 역시 뒤숭숭한 마을 뒤로하고 돌아와
모두 자신에게 맞게 품위를 지키고 있는
성자들에게 어울리도록
어느 교회의 황금 감청 유리에 아름다움을
그린 적이 있네, 아름다움은 칼을 들었네.

나를 따라 이렇게 기도하게;
너 나의 깊은 감각이여,
내가 너를 실망시지 않음을 믿어라,
내 핏속에는 수많은 소음이 들끓지만,
나 자신 그리움으로 가득함을 안다.

위대한 엄숙함이 나에게 몰려운다.
그 그늘 속에의 삶은 서늘할 수밖에.
난생처음으로 나 너와 단둘이 있다,
너, 나의 감정이여.
너는 소녀처럼 수줍음을 타는구나.

라이너 마리아 릴케 <기도 시집> 수도사 생활의 서 中 김재혁 역(譯)

단순한 생각으로 이야기 하자면, 릴케의 시는 가끔 왜이리 긴걸까? 마치 누구에게 쌓인 감정이 폭발하여 고백하듯이 그의 시구는 터져나온다.


우리는 모두가 꺼져가는 밤의 한가운데 적막을 견디기 힘들어한다. 당신의 삶이 현재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을지라도 밤의 적막함은 당신을 쉬게함과 동시에 외롭게하기 때문이다. 릴케의 시는 이 외로움을 견디기 위함이 아닐지 생각해본다. 행동으로서 우리는 신을 마주한다는 그의 시 경구 중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는 무엇을 함으로서 허무의 고통을 망각한다. 다만 우리가 필연적으로 마주쳐야하는 밤이라는 것을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알코올 사용 장애를 겪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보면 밤의 혼술을 즐긴다고 나온다. 이것에서 유추 할 수 있듯이 우리는 피로에 쩔지만 생각만은 부유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생각이라는걸 잠재우기 위해 알코올로 대체할 뿐이지 우리의 지독한 허무는 갑자기 물씬 찾아오는 법이다.


가끔 밤거리를 거닐다보면, 심지어는 거의 모두가 자는 시각인 새벽 3시 정도에 나가다보면, 대부분의 창문은 불빛이 없지만 켜져있는 곳도 존재한다. 그 사람들은 밤의 적막을 무엇으로 달래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사람의 허무를 견디고 있는 중인 것은 분명하다.


이 지독한 공허는 쾌락을 불러들인다. 방종함의 어머니이자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려놓는 어둠이다. 적막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 우리는 쾌락을 찾는다. 그 허탈함을 무마시키는 완충의 벽을 쌓길 원한다. 몸 구석구석에서 피어오르는 욕구의 원천을 몸소 느껴본다.


과거 시대의 공허는 얼마나 거대했을지 가늠 할 수 없다. 그러나 여전히 공허는 우리 곁에 존재하여 달라붙어있다. 우리는 밤을 떼어 낼 수 없다. 아침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한다면 밤은 모든 것을 어둠으로 지워버린다. 쾌락은 어둠과 같다. 우리가 죽을 때 우리는 쾌락을 느낀다. 아무것도 겪지 않아도 됨은 실로 엄청난 쾌락일 것이다. 적어도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가정 하에 말이다.


글쓰기는 행동으로서 허무를 지워준다. 우리는 허무를 견디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함을 느낀다. 그것을 바라볼 수도 있지만, 깊게 바라보면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가끔은 깊게보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생각을 백지에 수 놓을때 쾌락의 욕구를 잊고 잠시 몰입한다. 이것은 신에 대한 생각이다.


낮의 환희를 보상하라고 닥달하는 채무자의 심성으로 밤은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것을 빚진다면 후에는 어마무시한 이자가 붙는다. 알코올로, 다른 쾌락으로 시간을 빚진다면 우리는 채무 부담을 더욱 가중하는것이다.


예술의 영감이라는건 이런 허무를 응시함과 닮아있다. 적어도 허무는 모든것을 생성해낸다. 허무를 본다는건 죽음을 응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죽음을 바라볼수록 예술은 풍부해진다. 삶만을 바라본다면 예술은 줄어든다. 앞으로 해야할일이 보이기 때문이다. 쓸모없는것은 죽음이겠지. 우리가 가장 피하고 싶은 것이 모든것을 가져다 준다.


의식이 있다면 시간은 느리게 간다. 의식은 모든 것을 최대한 붙잡으려 하기 때문이다. 한가지 안심할 수 있는 것은, 밤은 의식하기 힘들기 때문에 빠르게 간다. 새벽의 6시간을 보내기와 낮의 6시간을 보내기는 대게 다르다고 느낄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의식과 행동이 맞물리는 낮 시간이 비대해져 있기 때문이다.


몸이 편해지니 쾌락이 몰려온다. 다만 쾌락을 응시하고 반응하지 않는 것이 미덕일지도 모른다. 가끔은 그것을 마주 볼 필요가 있다. 그 외로움의 공포가 당신을 압도할지라도 그것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져다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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