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말일지라도 그건 과거의 내가 아닐지니
노승이 삼십 년 전 참선하기 전에는
산을 보면 산이었고 물을 보면 물이었다.
그 뒤 훌륭한 선지식을 만나게 되어
선정에 들어가 보니 산을 보아도 산이 아니었고
물을 보아도 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진실로 깨달음을 얻고 나니
예전과 다름없이 산을 보면 단지 산이고
물을 보면 단지 물이다.
속전등록(續傳燈錄) 제22권, 청원 유신(靑原 惟信)선사 게송
지금부터 쓰게 될 이 글은 훌륭한 선(禪)지식에 반하는 것일 거다. 지극히 세속적이지만 그 어려움을 토로하는 글이다.
인간의 감정과 깨달음에는 고비라는게 있는 것 같다. 어떤 경험과 생각에 의해 내가 통째로 바뀌던, 지극히 국소적인 부분만 바뀌던 간에 변화를 느끼게 되는 고비가 있다. 이 고비를 지나게 되면 나는 진실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어떤 인간이 자신의 타고나지 못한 부분에 열등감을 느꼈다고 하자. 이 인간은 불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자신의 내면의 관념에 쌓여있다. 이 사람의 열등감은 알게 모르게 타인에게 말과 행동으로 은유적으로, 가끔은 직접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자주 그와 관련된 말을 한다던지, 그와 비슷한 주제로 겉돌던지 말이다. 이 인간은 변화에 갈망을 느낀다. 더 이상 이렇게 살면 안되겠다고 느낀다. 이제 점차 이 인간은 자신과 마주보며 혼돈으로 빠져들기 시작한다.
이 사람은 자신의 열등감의 원인을 하나 하나 따져 보며 살아간다. 이 시기에 겪는 혼돈은 자신의 말의 불일치, 행동의 불일치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타인으로 하여금 알쏭달쏭하게 하고, 스스로도 자신의 정체성이 온전치 못한 걸 뼈저리게 느끼기 시작한다.
그 열등감에 의해 감정이 올라왔다가, 때론 잘 다스렸다가 하다보면 어떤 새로운 국면에 다다르게 된다. 그게 깨달음이든, 어떤 형식적인 타협이든 간에 그 사람은 다시 뭔가를 되찾는다. 비교적 자신의 위치가 흔들렸던 과거 보다는 괜찮은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다만 이 인간은 스스로 반추해 본다. 과거 흔들렸던 경험 동안 내가 얻은건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사실 어떤 명제로써 확언하고 싶은 욕구가 들지만, 뚜렷이 명제화 시킬 만한 대상이 없다.
사실 이 사람은 다시 맨 처음으로 회귀했다. 그 열등감의 작용이 아직도 존재하는 듯 하다. 타인에게도 그렇게 보이는 듯 하다. 그 사람은 바뀐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 사람은 명백히 시간적으로 보나 내면의 변화로 보나 다른 인간이 된 것이다. 아, 내면의 변증법이었다. 이 인간의 내면 A는 부정적인 자기 모순을 견디고 A'이 된 것이다! 다만, 적어도 자신은 알지라도 타인들에게는 보여지지 않을 수도 있을것이다.
그는 내면의 변화를 알아차리기만 할 뿐 열등감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거나 성취하지 않았다. 그의 인식의 변화가 그 열등감이라는 개념 체계를 바꿔버린 것이다.
감정 역시 그렇다. 사랑의 감정이 질투나 자기 비하로 나타나지만 점차 성숙해지면서 질투나 자기 비하 역시도 새롭게 재탄생하게 된다. 그 모순을 견디는 힘이 내면의 힘이라고 부르고 싶다.
살다 보면 타인의 말에 대답을 할 때 "이런 말을 하면 이렇게 보이겠지."하는 순간이 있다. 이 순간에 그 말을 내지를지 말지는 자신의 선택이다. 자신이 모순을 견디는 힘이 있다면 어떤 말을 내지르든 상관없다.
타인에게는 나의 내면이 보이기 힘든 법이다. 내가 겪은 깨달음, 감정, 고통은 타인에게 소금 한 줌 만큼도 털어 보여줄 수 없는 것이다. 나의 내면의 화학식이 바뀌어 졌을지라도 나는 타인에게 '타인의 관념으로 뒤덮인' 나일 뿐이다. 그 사람이 지극히 예민하고 감수성 있는 인간이 아니라면.
내면의 운동은 층(sheaf)이 존재한다. 그 층에는 원래의 평면위의 성질과 다른 관계나 연산을 부여한다. 다만 모눈 종이 여러개가 어떤 그림을 그린 A4용지 위에 겹겹이 쌓여있다고 생각해보자. 위에서 종이를 내려다 보면 그 그림은 모눈 종이가 투명하기에 그대로다. 다만, 투명종이의 질감과 다른 특질, 혹은 그 위의 그림 덕에 그 그림이 달라 보일 뿐이다.
마음이 이 종이와 같다면, 우리가 쌓아 나가는 역동적인 운동은 모눈종이에 해당할 것이다. 이것은 있는 듯 하면서도 없다. 즉 추상적인 것이다. 물질적인 비유를 든 것일 뿐이지, 내면의 운동이 실재하겠는가.
사랑을 느낄지라도 연인에게 나의 사랑을 보여 줄 수 없다. 이 벅찬 마음을 무덤까지 끌고가야 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괴로울 것이다.
나의 모든 감각질의 총체는 갇혀있다. 말 그대로 모나드는 창이 없다. 다만 나를 비추는 또다른 인드라 망의 구슬이 존재하고 그 구슬이 모인 총체가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이 가진 자폐성이 세계의 오해이자 학문의 추동일 것이다. 그것은 괴롭지만 유쾌하기도하다. 고통과 쾌락이 분리되지 않듯이, 이 자폐성에도 쾌락과 고통이 상존한다. 나의 세계를 설명하겠다. 그리고 동시에 나의 세계는 실재하지 않고 보여지지 않는다. 이 모순을 견딜 수 있는자가 인생을 살 수 있다. 우리는 다 어느 정도의 이 모순을 감내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지극히 세속적이다. 다만 세속이 있기에 신성한 것도 있는 법이다. 우리는 세속에서 희망을 볼 수 있다. 진창 더럽고 짜증이 날 지라도 우리에게는 항상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다는 막연한 희망과 그것을 이루게 해주는 행동 지침 등이 존재한다.
인간은 모두 바보이자 불성(佛性)을 지닌 현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