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예비학교
인생이 무료해질 때가 있다. 일상이 단조로워 보이고, 여기서 무얼 더 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가 있다. 뭘 하자니 특별히 그것에 흥미가 없고, 안 하자니 단조로운 일에 내 인생이 잠식당하는 것 아닌가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즉, 인생 노잼 시기가 오는 때가 있다.
인간은 즐거움을 찾기 때문에 항상 지루 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즐거움은 일시적이고 그 지속시간이 극히 짧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인생의 대부분의 날들은 지루하고 단조로운 일들이라는 것이다.
이를 알면서도 떠오르는 '내가 지금 이러고 있어야 하나.' 하는 막연한 생각을 왜 하게 되는 것일까? 아마 인생이 달라졌으면 하는 생각에 드는 것일 것이다. 이것을 욕심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도 있지만, 이를 자세히 한번 들여다보아야 한다.
현대 사회가 쾌락의 과잉이라는 말을 차치하더라도, 어차피 인간의 인생에 극적인 일들은 크게 보면 적다. 내가 말하는 건 인생의 생각과 행동이 뒤바 끼는 엄청난 경험이나 깨달음을 말한다. 이런 경험은 앞으로 일어나게 될 새로운 일들에 대해 설렘을 느끼게 한다.
새로운 게 과연 좋은 걸까?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단조로움 속에도 우리는 새롭게 발견할 것들이 있다. 그리고 그렇지 않더라도 그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속에서도 변하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변하지 않는 삶이라도 그것은 우리 삶이기에 소중한 법이다.
새로운 것들을 아낀다는 측면에서 나는 설명해보고 싶다. 지금의 지루함에 지쳐버려 새로운 것들을 마구잡이로 해버린다면, 초심자의 설렘을 줄이는 일이기도 하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처음의 입문의 설렘과 초심자의 발전의 행복을 즐길 수 있다. 이것은 인생에 큰 활력과 동기부여를 불어넣어 준다. 다만 이것들을 너무 준비 없이 많이 한다면, 분명 인생의 즐거움을 앞당기는 것이다.
내 인생에서 무엇을 언제 진입해야 할지는 나는 때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날이 언제인지는 몰라도, 아주 지극히 운과 타이밍, 나의 흥미와 체력과 건강이 아주 잘 맞아떨어져 그것을 할 수밖에 없는 시기가 있다. 적어도 나의 경험상으로는, 이런 시기가 아니라 억지로 새로운 것을 해보려 해도 오래가지 못했던 것 같다.
너무 운명론적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연애도 자만추는 없는 거라고 말하는 세상에 '내가 직접 찾아나가야지 어떻게 가만히 있는데 무언가가 오느냐'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이 이야기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긴 한다. 그러나 내가 이야기하는 건 적어도 얼마나 지속가능하냐의 측면에서 말하고 싶다. 이런 인위적(?)인 행동이 꽤나 큰 지속을 말할 수 있는 가능성도 도처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야기하는 게 운명과 자유의지의 조화라는 예정조화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인류의 아주 큰 질문으로 쉽사리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적어도 질문에 답을 하려는 것 이전에 둘의 가능성을 모두 고려해 보는 것이 인간의 성실함이 아닐까? 한쪽을 믿을 수 있어도 우리 인생은 양쪽을 다 봐야 하는 경우가 많다.
카라마조프 집안 전체를 가까이서 깊이 있게 살펴 온 젊은 관찰자 라키친 씨가 아까 말한 총기 있는 생각을 상기해 봅시다. '이렇게 고삐 풀린 듯 방종한 천성을 지닌 그들에겐 드높은 고결함의 감각과 마찬가지로 저열한 타락의 감각이 꼭 필요하다.'라는 라키친 씨의 말씀-이것은 참 옳습니다. 정말로 그들에겐 이 부자연스러운 혼합이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필요합니다. 두 개의 심연, 여러분, 두 개의 심연을 한순간에 동시에 관조할 것.- 이것이 없다면 우리는 불행하고 불만족스러우며 우리의 생존 자체가 불완전한 것이 됩니다.
-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3권 이폴리트의 연설 중
내 인생에서 극히 오랫동안 몇 년을 지속가능 했던 일들은 모종의 일들로 끌린 일들이었다. 그것이 내 인생의 진로를 바꾸기도 하고, 내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것은 운명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발견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말하고 싶은 것. 그것은 "기다림"을 말하고 싶다. 지금이 지루한 것은 원래 인생이라는 게 그런 것이고, 내가 지금 적어도 불행한 일들은 겪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과거에 겪었던 불행들을 상기시켜 보자. 차라리 지금이 훨씬 나은 것처럼 바로 느낄 것이다.
쾌락은 없으나 적어도 괴로움은 없는 시기가 역설적으로 이 인생 노잼시기 일수도 있다. 권태에 의해 우울증이나 외로움이 극심해질 때도 있지만, 세간에 떠도는 이야기 중 하나를 생각해 보자. 몸이 편하니 우울증이 오는 거다. 이 말은 우울증 환자들에게 비난처럼 들린다. 다만,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내가 발등에 불이 떨어져 문제들을 해결해 나갈 수밖에 없을 때 적어도 우울하다는 생각보다는 행동을 위주로 했던 것 같다.
정신과 몸에는 조화가 있는 듯하다. 일본의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는 스스로 육체적 콤플렉스로 헬스를 한 이후 에세이를 썼다. 이건 정확한 미시마의 글은 아니어도 내가 회상한 것이다. 육체적 콤플렉스로 헬스에 전념한 지 1년이 다돼 간다. 과거에 겪었던 열등감을 해소하는 게 이렇게 간단하다니 과거가 낭비 같다. 지금은 완전히 해소되었다고 느낀다. 정신과 육체에는 조화가 있다. 등등 마지막에는 젊은이들에게 헬스를 권유하며 젊은 지성인은 정신만이 비대해지지 말도록 육체를 단련하라는 충고를 하며 에세이를 끝낸다.
그러나 자신의 의도 없이 행동만이 비대해진다면 지속 가능 할 수 없지 않나 생각이 든다. 지금 인생이 재미가 없는 것은, 아마 편해진 몸에 의해 생각이 많아진 게 아닐까? 나도 이게 너무 단순한 생각이라고 생각은 든다. 하지만 복잡한 이유를 대고 싶은 치기 어린 마음이 아닐까라고도 생각이 든다. 이유는 간단하지만 항상 마음이 회피하여 복잡한 어떤 이유를 대고 싶은 마음은 항상 생기기 때문이다.
그냥 지금의 일을 하는 것. 결국 행동은 같다. 이걸 위해 얼마나 많은 생각을 돌아왔나 생각해 보면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은 지금 이 일을 해야 하는 이유를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났었고, 그걸 종료하고 행동을 해나가는 것이다. 당신의 행동은 과거와 다르다.
새로운 것을 굳이 찾지 말라는 말은 아니어도, 다음에 다른 새로운 일이 있겠지라고 유보하는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말이다. 어떤 사람은 이런 마음을 계속 유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 조차 그 사람의 인생이고 뭐라고 할 당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생에 무엇을 해야 한다는 건 존재하지 않지 않은가?
즐거울 때는 주의하고 괴로울 때는 앞의 희망을 바라봐야 한다. 그것이 삶을 유지하고 지속 가능하게 하는 명제이자 힘의 원천이다. 지금 인생의 지루한 과정을 통과하고 있다면 당신은 지금 인생의 중요한 국면을 맞이한 것이다. 지금 인생의 소중함을 다시금 깨닫게 하고,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지에 대해 준비하는 예비과정이기 때문이다. 굳이 뭔갈 찾지 않더라도 당신은 이미 준비해나가고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무엇을 하는 이런 역설은 도가의 성찰을 담는 말인 것 같다. 지금의 지루함은 이런 무위의 철학을 말하는 것이다. 지루함을 견딘다는 표현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이 견딤은 미래를 위한 예비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