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에 종교는 무엇인가?
신의 존재 이전에 우리는 종교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가 신을 이해한다고 할지라도, 실천적인 믿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끝없이 방황할 것이다. 이 글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대한 독후감이자 나의 생각이다.
난폭하고 거칠지만 수완 좋은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의 아들 세명 드미트리, 이반, 알료샤는 종교에 대한 삼분법을 대표한다. 감정적이고 열정의 화신인 드미트리, 그와 대조되는 둘째 아들 이반은 이성의 힘으로써 신앙을 이해한다. 다만, 둘에게는 신앙보다는 신을 이해한다에 가깝다.
신을 이해한다는 게 무엇일까? 그것은 믿음이전에 자신에게 신을 합리화 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이 둘은 신의 존재를 완전히 신뢰하지 못한다. 도스토옙스키의 또 다른 소설 악령에 나오는 무신론자 무리들 마냥 이 둘의 신앙은 전적인 믿음보다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마다 나오는 인신(人神) 사상에 가깝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곧 신이 되었다는 소리다. 전지전능한 신은 참으로 허무맹랑해 보인다. 르네상스 이전이었다면 마녀사냥의 대상이 될만한 이런 소리가 이 시대부터 현시대까지 가능하다. 니체가 선언한 '신은 죽었다. Gott ist tot'이전에 도스토옙스키가 이런 사상을 예견했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인 것 같다.
미챠(드미트리)와 이반의 공통점은 종국에 가서야 신에게 매달리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죽음 직전에 기독교로 회의했다는 폰 노이만의 일화가 떠오르기도 한다. 내가 아는 게 맞다면, 파스칼의 내기에 의해 그는 신을 믿은 것이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신이 있다면 천국과 지옥이 있을 것이고, 따라서 신을 믿는 쪽이 더 이득이라는 파스칼의 명제에 설득당한 것이다. 이것은 신앙이라기보다는 논리에 호소한 신앙이다.
내가 이해한 것이 맞다면, 이 둘은 비굴한 모습을 보여준다. 사랑과 자신의 감정에 호소하고 감옥에 들어가서야 신에 대한 생각을 반추하는 드미트리, 스메르쟈코프의 소행이 자신의 사상 때문이라는 죄책감에 신에 대한 관념에 시달리는 이반의 모습은 어찌 보면 비겁해 보이기까지 한다. 정작 아무 일도 없을 때는 신에 대해 냉소하다가, 극한의 상황에서 신을 찾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신을 굳이 찾는다기 보다는, 내면에서 모호하게 피어오르는 신에 대한 관념을 마주치지 않고 피하기가 어렵다는 게 더 정확한 서술인 것 같다.
이 소설의 구조를 보건대, 도스토옙스키가 무엇을 떠올려서 발전시켰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내 생각에는 알료샤의 존재, 그리고 조시마 장로의 스토리가 주축이 되어 소설을 구상했을 것으로 유추해 본다.
조시마 장로의 일화는 그의 형에 대한 이야기와 젊은 시절 사랑의 질투라는 정념에 사로잡혀 여자를 살해한 어떤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보여준다. 형은 죽을 때가 되어서 하나님의 사랑의 편재함을 지상에서 목격한다. 나비의 움직임, 동물의 행동, 사람들을 보면서 삶이란 사랑으로 가득 차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살인자인 남자에 대한 이야기는 연정을 품은 여자를 살해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까지 하고 애도 놓지만, 그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남자가 고뇌하는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종국에 가서야 자백하지만 감옥에서 그는 죽게 된다.
이제 드디어 알료샤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온 것 같다. 도스토옙스키는 알료샤를 이상적인 인간으로 생각하고 만들어 낸 게 분명하다. 내 유추이지만, 조시마 장로이야기에서 볼 수 있는 자기 형에 대한 이야기와 닮아있는 알료샤의 모습은 결코 우연이라고 볼 수 없다. 조시마 장로가 알료샤를 자기 아들처럼 생각한 이유기도 한 것 같다.
알료샤는 이 소설 내에서 드미트리와 이반의 매개자이자 중간, 그리고 무엇보다 더 나아가서 종교적인 신뢰 즉, 믿음이 가능한 인간이다. 믿음, 신뢰, 사랑 없는 종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인물이자, 가장 사랑스럽고 온전한 인간으로 묘사된다.
알료샤는 두 형의 괴로움을 같이 겪어준다. 같이 괴로워한다. 다만, 그 둘의 사상 역시도 이해하고 있다. 두 여자에게 시달려 질투와 사랑의 광기에 사로잡힌 드미트리의 신관, 이성적으로 이해했지만 하나님의 말이 지극히 어려운 일이고 존재에 대한 회의를 품은 이반의 신관. 이 둘의 신관을 모두 이해하면서도 이 둘을 가족으로써, 그리고 이성적인 이해로써, 마지막으로 감정적인 연민으로써 공감한다.
모든 종교라고 말하기엔 나의 종교에 대한 식견이 부족하기에 함부로 말하기 애매하지만, 종교의 기능 중 사랑이 없다면 종교라고 할 수 있을까? 이 말로 나는 이 소설을 요약해 보고 싶다.
신의 존재 이전에 종교에는 사랑이 있다. 실천적인 믿음, 즉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 간단하고도 매우 어려운 명제는 평생을 도덕적인 심판관이 되어 우리를 괴롭게 한다.
도스토옙스키는 무신론의 비극을 항상 소설 속에 한 명씩 인물화 시켜서 배치해 놓는다. 인신론의 아주 대표적인 인물은 악령의 키릴로프 일 것이다. 이 인간은 천재적인 두뇌로 신에 대해 자신의 무신론적인 이해를 보인다. 이 인간은 앞서 말한 대로 자기가 신이 되었다. 다만 이 인물은 타인과 자신의 신념에 사로잡혀 자살하기에 이른다.
나는 종교적인 전통이 부족한 환경에서 자랐다. 따라서 종교의 신에 대해서는 이반과 미챠의 생각과 비슷한지 모른다. 신에 대한 불가지론조차 이에 속한다. 다만, 나도 알료샤의 존재가 매우 신경 쓰인다.
알료샤는 어쩌면 논리와 감정 어디에서 출발하든 연역적인 귀결의 종점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어디서 시작할지라도 결국에 다다르는 종교의 끝은 사랑이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본래 학문은 허무맹랑하고 인간의 감정도 허무맹랑하다. 무엇을 내세우든 그에 걸맞은 위계라는 게 생긴다. 타인을 그 잣대로 깔보기도 하고, 분류하기도 하고, 일등부터 꼴찌까지 우리는 차등을 논리와 감정으로 이름 붙여 점수 매길 수 있다.
인간은 비교에 익숙하다. 내가 얼마나 신을 잘 이해하는지, 내가 얼마나 감정적으로 신앙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지 뭐든 간에 신뢰와 사랑 없이는 종교는 종교가 아니다. 감정을 내세우든 이성을 내세우든 종교 앞에서 이 둘은 무력화된다.
과연 진실로 성경은 이것을 예측한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성경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것일까? 성경에서 무조건적인 믿음과 사랑을 말하는 게 신기해 보인다.
욥기의 욥은 하나님과 사탄의 내기에 시험당해 신앙을 잃다가 다시 신앙을 회복하여 회개하게 된다. 내가 아는 하나님이라면 이럴 리 없어, 다시 나에게 축복을 주실 거야. 이런 믿음을 가져 보았자 그는 더욱 실망하게 된다.
드미트리는 자신의 고결함을 증명하기 위해 애쓰는 것 같다.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당위적인지, 합리적인지 열변을 토한다. 다만 그것은 신의 뜻도 아니며, 자신의 방황이었다. 여자 두 명 사이에서 질투에 시달리는 미챠는 자신의 당위성을 신을 개입시켜 끼워 맞춘 것이다.
비종교인으로써 신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나는 여러 번 고민해 봤다. 그러나 결국 '너의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아주 간결한 명제에 근거를 대는 일일 뿐이었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도대체 얼마나 돌아갔던지 생각해 보면,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내가 이 말을 온전히 이해했는지 확신도 안 선다.
무조건적인 믿음을 말한 게 무얼까. 아마 이 문장이 가지는 신성함 때문일 거다. 이 문장은 세속의 사람으로서 이해되지도 않고 이해되기도 한다. 우리의 수학적 명제 논리에서 완전히 벗어나 신성을 띠는 문장인 것 같다.
진정 알료샤의 길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나도 가늠이 안된다. 사랑과 신뢰가 부족한 건 항상 세계 내에서 그래왔다. 기만과 사기의 정도가 다양할지언정 결코 누군가를 세속에서 신뢰하고 사랑하기는 매우 어렵다. 심지어 연인이어도 말이다! 아마 고대부터 지금까지 가장 어려웠던 것이 이 "사랑"일 지 모른다.
타인의 사랑이 곧 나의 사랑이자 신에 대한 사랑이다. 이 사랑의 삼위일체는 전적인 믿음과 신뢰만으로 가능하다. 나는 진정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 가늠할 수 없다. 내 인생에서 이걸 성취할 수 있는 건지. 그리고 그것이 성취의 대상인 것인지 조차 확언 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랑을 성취한다는 표현은 매우 이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