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엘엘리온 Jan 07. 2024

아가씨, 영희

그녀를 기억하고 싶다.

그 사람을 감송하기 위해 이 글의 제목도 실명을 그대로 사용하려고 한다.

‘영희’라는 두 글자만큼이나 그에 대한 내 느낌을 모두 담을 수 있는 표현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에게 영희는 찬란한 청춘을 빼앗겨 버린 한 ‘아가씨’를 설명하는 단어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물음을 갖게 한 낱말이기도 하다.     


“그녀의 청춘을 하얀 건물 속에 가둔 ‘정신질환’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겁 많은 그녀로 하여금 폭력을 사용하게 하는 ‘환청’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정신병원 폐쇄병동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다.

병동 로비에는 TV를 보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그리고 그냥 멍하니 앉아 있는 사람들이 한데 모여 각자의 시간에 몰두하고 있었다.

나는 그 무리 중 한 명으로, 구분된 공간에서 혈액 검사를 위한 채혈을 하고 있었다.

환자의 팔에 꽂힌 주삿바늘이 붉은 혈액을 빨아들이고 있던 중, 갑작스러운 어떤 외부의 힘에 의해 나는 주사기를 놓치고 말았다.  내 손을 떠난 주사기는 고정되어 있지 못하고, 혈관을 빠져나오다가 삐딱한 모습으로 멈춰 섰고, 그 주변으로는 피가 삐죽삐죽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외부의 힘이 치고 지나간 내 뺨은 안경을 반밖에 걸치지 못하고 있었다.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상황 파악이 채 되기도 전에 영희를 끌어안았다.

~미안해요~~ 몰라요~~ 몰라요~~ 미안해요~~”

~~’라는 소리를 연신 내뱉으며 뒷걸음질 치는 영희는 나보다 더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채혈이 중단된 환자 뒷수습을 누가 했었는지, 맞은 자리가 아팠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영희가 몹시 불안해 보였었다는 것만을 회상할 수 있는 나는, 반사적으로 영희를 부둥켜안았던 것이다.  차에 뛰어드는 누군가를 발견한다면 지체 없이 말리게 되는 것처럼 그 찰나 영희의 불안한 몸짓을 본 사람이라면 그녀를 안정시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을 떠올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환청’이었다.

영희가 나를 때린 이유는 ‘환청’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저기 안경 쓴 사람을 때려~!!!”     


이 일은 내가 환청이라는 것을 실제적으로 경험한 첫 사건이었다.

내 귀로 환청을 들은 것은 아니지만, 그에 따른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만큼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이 날의 타격감으로 인해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영희를 잊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녀가 내 마음에 새겨진 더 큰 이유는 영희가 내 또래의 ‘아가씨’였다는 사실이다. 

나를 때린 사람이지만, 나는 영희가 밉지 않았다.

오히려, 까닭 모를 미안함이 올라와 더 잘 챙겨주고, 더 잘해주었다.

영희는 나보다 고작 3살 많은 20대 후반의 나이였다.  

그 당시의 내가 그러했듯이 영희도 한참 자신을 꾸밀 나이였다.  예쁘게 화장도 하고, 예쁜 옷도 고르고, 

설레는 데이트도 하고, 주말에 볼 영화를 고르고...

그런데, 영희는 세상과 분리된 ‘정신병원’이라는 곳에, 그마저도 허락된 공간 외에는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는 ‘폐쇄병동’이라는 곳에 갇혀 있었다.  그곳이 영희가 볼 수 있는 세상의 전부였다.  

쉬는 날 신나게 친구들과 놀고 근무를 들어간 날은 영희에게 괜스레 더 미안해졌다.  내가 영희의 몫까지 빼앗아 즐거움을 한껏 누리고 온, 그런 기분이었다.

그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영희에게 가서 말을 걸었고, 짧게 잘린 커트머리를 빗어주고, 옷매무새도 만져주었다.  

내가 세상에서 누리는 즐거움은 20대의 나이라면 마땅히 누구나가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희에게서 그것을 박탈해 간 ‘정신병’이라는 것이 야속했고, 그 병 앞에서 속수무책 당하고 있는 영희가 안타까웠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지금, 나는 아줌마가 되어 있다.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으며, 직업을 가진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다.

영희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 병동을 뛰쳐나와 더 넓고 화려한 세상에서 살아봤을까?

미용실에서 전문 디자이너에게 머리를 맡겨 봤을까? 

내가 들어간 영화관 어디쯤에 영희도 앉아 있었던 적이 있었을까?

     

정신질환은 관리하는 병이다.  어떤 치료로 인해서 뚝딱 낫는 병이 아닌, 당뇨와 고혈압처럼 평생 증상을 관리하고 조절하는 병.  환청이 되었든, 망상이 되었든, 그 증상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무시하고 학업과 직업 활동을 할 수 있는 것.  그렇게 스스로를 책임지고 자립할 수 있는 것.  이것이 정신질환 치료의 목표이다.

영희는 이런 치료 목표의 어디쯤에 도달해 있을까?     


환청이라는 것에 속수무책으로 휘둘렸던 영희는, 나 이외에도 병원에서 한솥밥을 먹는 식구들을 때리는 일들이 곧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처럼 느껴졌다.

‘정신질환’, ‘폭력’이라는 단어를 떼어놓고 보는 ‘영희’라는 사람은 무척이나 맑고 아름다운 존재였기 때문에 그렇게 느꼈으리라.  상글상글 웃던 모습은, 보는 사람도 함께 웃게 만들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을 아리게도 하는 슬픈 미소였다.     


나쁜 행동을 지시하고, 협박하던 그 소리로부터 영희가 자유로워지길 소망한다.  그 나쁜 소리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형체도 없는 그것은 영희를 절대로 해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아가씨: 1. 처녀나 젊은 여자를 대접하여 이르는 말

            2. 예전에, 미혼의 양반집 딸을 높여 이르거나 부르던 말

(네이버 사전의 설명 중 이 두 가지가 영희에 대한 내 느낌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서 방점은 ‘대접하여’와 ‘양반집 딸’이다.  스스로 위생관리조차 할 줄 몰라 짧은 커트머리에 늘 비듬이 앉아있고, 덥수룩한 모양을 유지하면서 정신병동에 갇혀 있는 영희였지만, 내 눈에는 ‘찬란’하고 ‘빛나’ 보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정신병원과 교도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