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엘엘리온 Jan 01. 2024

정신병원과 교도소

내 직업을 소개할 때마다 사람들로부터 곧잘 받는 요구가 하나 있다.

“거기 있으면 신기한 일 많지 않아요?  재미있는 이야기 좀 해주세요”

이 요청은 ‘정신병원’에서 근무할 때에도, ‘교도소’에서 일을 한다고 소개할 때에도 변함없이 받게 된다.  

직장은 바뀌었는데, 일과 관련하여서는 동일한 주문을 받는다. 

두 곳 모두, 뭔가 범상치 않은 사건과 사고들이 일어나는 곳이라고 여겨지는 탓일 게다.     


직장이 바뀌었음에도 공통적으로 듣는 질문도 하나 있다.

“위험하지 않아요?”

‘염려’라기보다 ‘호기심’에 가까운 주변인들의 이 질문은, 내 부모에게 있어서만큼은 실제적인 위협이 될 수 있는 불안과 걱정이다. 이것을 알면서도, 기어이 부모님의 마음을 뒤로하고, 고집스레 나는 ‘정신병원’으로 출근을 했다.  심지어, 십여 년이 지난 후에는 ‘정신질환자들이 있는 교도소’로 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도 이런 내 걸음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의 질문을 종종 받는다.  정신질환자들이 있는 이곳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여러 차례의 승진기회도 떠나보냈기 때문이다.  연금과 승진을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공무원 사회에서 이 결정이 의아하다는 것은 나도 너무 잘 안다.  그래서 고민한 순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결과적으로 지금의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토록 나를 이들에게 묶어두는 것일까?

어떤 직업을 선택하게 된 계기를 묻는 인터뷰 영상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것이, “제 주변에 아픈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돕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와 같은 대답이다.

하지만, 나는 살면서 정신병자를 본 적이 없다.  동네에서 한 번쯤은 본다는 머리에 꽃 단 여자도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내가 정신병자인가?’라는 질문에까지 이르게 된다.

맞는 말이기도 하다.

정확하게 병원에서 진단을 받은 적은 없지만, 나는 내 인생에서 ‘우울증’이라는 단어를 배제할 수가 없다.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단짝친구를 잃었던 대학교 1학년 때, 출산 후에 불안정했던 감정들, 그리고, 지금도 나는 매 달 PMDD (Premenstual Dysphoric Disorder:월경 전 불쾌 장애)라는 것과 함께 살아간다.  힘든 일이다.  나 자신도 그러하지만, 본의 아니게 주변 사람들에까지 그 여파가 미칠까 봐 조심스럽다.  그러함에도 스스로의 기분을 조절하기가 쉽지 않다.  이런 내가 ‘상담’과 관련된 일을 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구렁텅이에 몰아넣는 것일지도 모른다.  


부담스러운 대상자와 상담이 예정되어 있는 날은 며칠 전부터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리고 몇 건의 상담을 끝내고 사무실로 돌아오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머리나 마음을 쓰는 일이 아닌, 몸을 움직여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면서 남은 하루를 보낸다.  그리고, 다음 날 내 감정이 빠지고, 단순히 기록적이고 분석적인 글을 남길 수 있을 때 상담기록을 작성함으로써 한 건에 대한 상담업무를 마친다.  그에 반해, 상담을 마침과 동시에 그 기록을 바로 시스템에 올리는 동료들이 있다.  그들의 에너지가 부럽고 대단하다고 느껴지지 않을 수가 없다.  상담 내용을 다시 복기하여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는 소진되었던 에너지를 다시 채울 만큼의 시간이 필요한 나와는 다른 것이다.  


이런 나는, 주변 사람들이 기대하는 ‘정신병원’이나, ‘교도소’와 관련해서 들려줄 에피소드가 없다.  특별히 재미있을 일도, 놀라울 일도 없는 일상이기도 하지만, 그저 가십거리처럼 가볍게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일을 접한 초기에는,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애써 한 가지의 에피소드를 떠올려 이야기했던 적이 있기도 하다.

학생 시절, 실습 나간 정신병동에서의 일이었는데, 20대 초반으로 기억되는 여자 환자가 회진 때 의사에게 한 질문이 그것이었다.


의사: 뭐, 불편한 거 없어요?

환자: 불편한 건 없지만, 너무너무 궁금한 한 가지가 있는데요...

의사: 예, 말씀해 보세요

환자: 근데요~~ 우리는... 왜 맛동산 먹고 즐거운 파티를 안 하나요?  나는 어제도 맛동산을 먹었는데...     


그렇게 질문하는 그녀의 손에는 맛동산 빈 봉지가 들려 있었고, 갑자기 훅 들어온 예상치 못한 질문에 모두들 순간 멍해졌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의사는 무엇이라고 대답을 해주었다.  그 황당한 질문이 강렬해서인지, 의사의 대답까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이 에피소드 정도라면 사람들의 기대에 부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역시나 사람들은 “역시~~ 정신병원 이야기네~”라며 만족한 듯이 웃어주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녀의 이야기를 정신병원의 재미난 하나의 에피소드로 말할 수 없는 사건이 있었다.     

병동에서 환자들과 함께 TV를 보고 있을 때였다.  마침, 정신병동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던 참이었다.  우리가 보고 있던 화면 속에서는, 정신질환자 역을 맡은 여자 배우가 병동 바닥에 엎드려 개구리가 헤엄치는 듯한 모습으로 소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장면의 연출 의도는 시청자들에게 재미를 주기 위한 것처럼 느껴졌지만, 그것을 보고 있던 진짜 정신질환자들은 아무도 웃지 않았다.  그리고, 한 여자 환자가 그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한 마디를 남기고 병실로 들어가 버렸다.

“선생님, 우리 저러지 않잖아요.  제발 TV나 방송 같은 데서 우리를 저렇게 묘사하지 말라고 말해주세요!”    

 

그렇다.  누군가의 질병이 다른 이의 웃음거리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다.  비록, 그 행동이 내 상식선 안에 있지 않고, 그 기괴스러움이 내 생각의 범위에서 벗어나 있다고 할지라도.     

‘요즘 같은 세상에서 안 미치고 어떻게 사냐?  우리 모두가 정신병자야~!!’와 같은 말을 하기도 하지만, 이들과 우리에게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치료’를 요할 만큼의 고통을 받지 않는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이 고통의 연속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우리는 그것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적응해 간다.

하지만, 병원에서 내려지는 ‘진단’을 받는다는 것은 ‘치료’의 대상이 되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상은 자신이나 타인에게 고통을 주거나 때로는 삶을 황폐화시키기도 한다.

나는 정상과 정신증 사이의 어디쯤인가에 위치해 있는 신경증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아직까지는 드러나지 않은 나의 어떤 모습을 이들에게서 언뜻언뜻 발견하기에, 자석처럼 끌리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만 그럴까?

어쩌면, 우리 모두가 ‘정상-신경증-정신증’이라는 직선의 어느 지점에 위치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현재 우리가 서 있는 지점의 위치는 변할 수도 있지 않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더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