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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Sep 06. 2022

러일전쟁의 성격: 아시아의 승리와 제국주의 침략

한일 양국의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인식

압도적인 기술 우위를 배경으로 식민지 지배의 물결은 19세기 아시아에도 밀려왔습니다. 그 위기감이 일본 근대화의 원동력이 되었음은 틀림이 없습니다. 아시아 최초로 입헌정치를 내세우며 독립을 지켜냈습니다. 일러전쟁은 식민지 지배 하에 있던 많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인들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 2015년 8월 14일 아베 신조 총리 -


이 말은 2015년 전후 70주년을 맞이 해 일본 정부가 발표한 아베 담화에 있는 내용이다. 당연히 우리나라에서는 일본이 과거사를 사죄 안한다며 난리 났었다. 물론 이 내용 뒤에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 대해선 사과하며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를 이어가겠다는 입장을 내비쳤으나 앞뒤가 안맞다며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런데 사실 이는 단순히 아베와 일본 우익만의 문제가 아니다. 바로 더 나아가 한일 양국 국민의 러일전쟁과 메이지 시대에 대한 인식 차이와 직결되는 문제다. 당연히 일본인들도 전전 쇼와 시대에 대한 인식은 그다지 안좋다. 하지만 반대로 메이지 시대와 다이쇼 시대는 제국의 최전성기였던 만큼 좋은데 문제는 이때가 한국은 제국주의 침략을 당했던 시기라는 것이다.


일본 국민 소설가 중에 시바 료타로라는 사람이 있다. <료마가 간다>, <언덕 위의 구름>을 쓴 것으로 유명한 사람인데 이 사람의 역사관은 오늘날 일본 국민의 인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고도의 메이지 시대 찬양론자로써 어두운 쇼와 시대는 철저히 침묵한 밝았던 시대만을 조명하는 경향이 있었던, 소위 말해 국뽕 성향이 있던 사람이었다.


당연하게도 시바는 <언덕 위의 구름>이라는 아키야마 형제의 러일전쟁 참전기를 쓰며 일본 제국의 영광을 표현했던 사람인 만큼 러일전쟁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2000년 아사히 신문에서 선정한 일본 역사상 최고의 문인 투표에서 아쿠타카와 류노스케와 다자이 오사무를 제치고 3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이러한 국민 작가의 사고 방식은 일본인들의 뇌리에 깊게 꽂혔다.

일본의 현대 문인 시바 료타로. 그의 역사관은 놀라울 정도로 오늘날 일본인과 비슷하다.

그렇다면 의문이 있을 것이다. 왜 일본인은 태평양전쟁과 중일전쟁은 부끄러워 하면서 러일전쟁은 자랑스러워 하는가, 말이다. 이에 대한 해답은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에서 엿볼 수 있다. 이 책은 일본인의 혼네 문화, 즉 앞과 뒤가 다른 모습을 분석하는 책인데 약간 뭐랄까 일종의 두 개의 자아가 있는 셈이다.


일본인들은 일본 제국의 전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왜냐면 그때가 오늘날 일본국의 뿌리니까. 그렇지만 전전 쇼와 시대는 일본을 나락으로 떨어뜨렸고 또 외부의 인식이 나쁜데 바깥의 평가를 신경쓰는 일본 특성상 절대 긍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상대적으로 긍정할 수 있는 부분이 있던 시대인 메이지와 다이쇼를 긍정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이런 말하면 독일은 뭐냐고 묻기도 하는데 독일인들에게는 나치 독일이나 빌헬름 2세의 독일을 부정해도 근대 국가의 정체성으로써 비스마르크의 독일 제국은 있다. 그렇기에 독일 정부가 아직도 제2제국 시절 아프리카 식민지배에 대해선 배상을 안하는 거고. 하지만 일본에게 일본 제국 자체를 부정한다면 남는 것은 근대 국가 형성 이전 에도 막부 밖에 안남는다. 게다가 일본 국기 자체가 일본 제국에서 물려받은 것이고.


그러다 보니 이렇게 일본 제국 말기는 부정하지만 초기와 중기는 긍정하니 제국 자체는 긍정하는 듯하면서 부정하는 것 같기도 한 이런 애매한 스탠스를 취하는 것이다. 여기서 일본이 과거사를 인정 안한다는 주변국이 반발이 나오는 것이고 반대로 일본은 침략 자체는 사과했는데 뭘 더하냐는 얘기가 나오는 것이다. 즉 일본인의 특성을 알아야 과거사 문제를 볼 수 있다.


러일전쟁이 아시아 해방을 이뤄냈다는 아베 전 총리의 주장도 살펴보자. 우리 입장에서는 절대 용납이 안되는 말이지만 일본은 자기 딴에 나름의 근거로 얘기했다. 그게 러일전쟁 당시 아시아인들의 반응이었다. 당장 대한제국에서부터 독립협회는 러시아가 아닌 일본을 응원했는데 당시까지만 해도 아관파천 이래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해지는 걸 두려워 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관동군은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만철을 설립할 때부터 생겨났다.

의외로 중국에서도 쑨원도 러일전쟁을 긍정했다. 그는 와세다 대학의 설립자이자 일본 정계의 거물 오쿠마 시게노부와 친한 사이니 이상할 것은 없을 것이다. 인도에서도 일본의 침략성을 먼저 꿰뚫어 본 타고르를 제외한 나머지 인도인들은 일본의 승리에 환호했다. 터키 역시 러일전쟁으로 힘을 얻은 청년 튀르크당이 엔베르 파샤 주도로 쿠데타를 일으켜 삼두정치 체제를 세웠다.


이렇게 아시아인들이 당시에 환호했던 것은 두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번째는 서구 제국주의의 먹잇감이던 황인종이 처음으로 백인에게 승리했기 때문일 것이고 두번째는 일본이 아직까진 아시아에서 이미지가 좋았었기 때문이다. 당장 중국에서도 일본의 이미지가 본격적으로 나빠지기 시작한 것은 위안스카이 정권에게 21개조 요구를 하고 칭다오를 뜯어간 이후부터였으니 말이다.


또 러일전쟁은 진짜 아이러니 하지만 일본에 민주주의가 제한적이나마 시작되는 것의 시작이기도 한 사건이었다. 포츠머스 강화 조약 이후 벌어진 강화 반대 운동은 전쟁의 참전과 세금 납세를 명분으로 곧 참정권 운동으로 번졌다. 그 결과 다이쇼 시대에 와서는 가토 다카아키 내각 하에 보통선거법이 제정되어 25세 이상 남성에게 투표권이 주어졌다.


이게 일본이 러일전쟁을 긍정하는 근거다. 뭐 어찌 되었건 자기 나라에게는 긍정적인 사건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러일전쟁의 이면 역시 있다. 굳이 한일합방은 너무 유명해서 언급하지 않고 가겠지만 그래도 이면은 많다. 바로 일본 제국이 전쟁이 끝난 시점부터 1차세계대전 직전까지 파산 직전 상태에 내몰려 있었다는 것이다.


러일전쟁은 국가의 체급부터 너무 차이 났기에 청일전쟁과는 달리 이겨도 별로 얻을 게 없었다. 포츠머스 조약으로 일본이 얻은 것은 한국과 북방영토 지역 밖에 없었으며 국채로 80%나 충당되었던 전비를 메꿀 배상금은 얻어내지 못했다. 거기에 더해 한일합방 이후 한국주차군을 조선군으로 개편하면서 군비 과잉과 더불어 식민지 경영에 비용이 너무 많이 소모되면서 빚도 심각할 정도로 늘었다.


덕분에 실생활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 일본은 징병제였음에도 농촌의 장정들이나 도시 빈민들이 주로 징집되는 구조라 일할 사람이 빠진 농촌이 피폐해지기도 했다. 다이쇼에서 쇼와까지 걸쳐있는 농민의 삶 수준 하락은 이때가 전조였다. 또 다이쇼 데모크라시에 끼친 영향도 장기적으로 봤을 때 그랬다는 것이고 당장은 일본 정부가 히비야 폭동을 기점으로 강경한 공안 정국을 형성했었다. 실제로 러일전쟁 이후 고토쿠 슈스이를 비롯한 사회주의자들을 대역사건이라 해서 대거 사형시켰다.


우리나라의 민족적 입장에서 러일전쟁을 비판하는 것도 물론 필요하겠지만 그보다 당시 일본 내의 이면을 위주로 비판하는 것도 일본인에게 러일전쟁 비판을 수용하게 만드는 방법일 수도 있다. 또 일본이 제국 시절 자체를 부정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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