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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Apr 02. 2023

'정치적인 것의 개념' 해설

<정치적인 것의 개념> 첫 구절에서 슈미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국가는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전제한다고. 인민의 정치적 지위로서의 국가는 이해될 수 없다.  그것보다 민주주의의 결과이며 18세기 절대주의 국가에서 19세기 중립 국가, 20세기 전체 국가로 변화해갔다. 따라서 국가와 사회의 동일성에 기반한 20세기 전체 국가의 출현은 그 가능성에 있어서 정치적이다.

그렇다면 정치적인 것이란 무엇일까?간단하다. 적과 동지의 구별이다. 적이란 경쟁상대 또는 상대방 일반이 아니다. 사적인 혐오감 때문에 증오하는 대상도 아니며 단지 적이란 현실적 가능성으로서 투쟁하는 인간의 저체이며 바로 그러한 전체와 대립하는 전체다. 따라서 적이란 공적인 적(hostis)만을 의미한다. 즉 폴레미오스이며 에히도로스는 아니다.

이러한 정치적인 것의 개념은 그 자체로 20세기 고전적인 민족국가의 위기에 대한 반응이었다. 보통선거권의 관철과 노동자 정당의 진출, 대중정치 출현 등 유럽 사회에 들이닥친 민주화 물결이 낳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출현은 그 자체로 거대한 위기였다. 개입주의 국가가 없는 영역에서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 재구상은 보수적 위기 대응책 중 하나였다.

당시 막스 베버는 정치적인 것과 정치지향성을 구분하며 특수한 하나의 정치단체로 국가를 연결시킨 다음 정당과의 종차를 정당한 물리력의 독점으로 봤다. 반면 그람시는 이탈리아-라틴적인 전통 사상에서 국가와 시민사회를 분리하였으며 국가와 혁명이라는 레닌의 관점을 정치사회, 시민사회와 혁명으로 확장한다. 반면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재구성 함으로써  국가를 급진적으로 개조해 바꾸어 말하면 레닌의 관점을 국가와 반혁명으로 바꾼 것이다.

클라우제비츠가 말한 극단적인 정치적 수단으로서의 전쟁은 모든 정치적 개념의 기초하여 이러한 적과 동지의 구별이라는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러나 전쟁은 이러한 구별이 사람들 사이에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한 또는 적어도 현실적으로 가능한 한에서만 의미를 가진다고 슈미트는 봤다. 이와 같은 인간 생활의 영역들의 특수한 대립들로부터 적과 동지의 편 가르기, 그리고 어떠한 전쟁도 도출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어것까지나 적과 동지의 결속이 현실적 가능성 또는 현실성으로서 존재하는가의 여부이며 인간적인 동기가 작용하고 있는지는 논외라고 했다.

마르크스주의에게서의 계급도 상대방 계급이나 부르주아 국가들을 적으로 가르는 상황에서 경제적인 의미를 넘어 정치적 세력이 된다고 슈미트는 지적하고 있다. 한 국가 내부에서 프롤레타리아가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경우 프롤레타리아 국가가 성립하는데 그것은 예컨대 민족국가, 사제국가, 상인국가, 군인국가, 관료국가 또는 어떠한 통일체 범주에 속하는 계급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조직이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국가들이 부르주아 국가들을 적과 동지로 분류한다면 완전한 실재성이 나타난다.

이러한 맥락에서 슈미트가 왜 그토록 자유주의를 싫어하는지 알 수 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자유주의 사상은 매우 체계적인 방식으로 국가와 정치를 회피한다는데 자유주의의 사고에서는 정치적 통일체의 희생이 받아들여질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자유주의의 정열은 폭력과 부자유에 반대하며 원칙적으로 무제한인 개인의 자유, 사유재산과 자유경쟁에 대한 어떠한 침해나 위협도 폭력이라고 불리며 그 자체로 악이라고 한다.

하지만 슈미트는 단호하게 정치적인 것의 해체는 모두 국가와 정치를 파멸시키는 길이라고 말한다. 자유주의는 정치적인 것을 부정하지만 누구보다 정치적인 방법론을 신봉하며 자유주의의 시대에는 각별한 정열을 가지고 정치적 관점에서의 타당성을 박탈하고 정치적 관점의 도덕, 법, 그리고 경제의 규범성과 질서들에 종속되었다. 언제나 단지 구체적인 개인이나 단체들이 다른 구체적인 개인이나 단체즐을 지배하는 것이다.

자유주의 사상은 처음부터 국가와 정치에 대해 폭력이라는 비난을 퍼부으면서 인류의 상승하는 진보라는 노선을 내세웠다. 그러나 복고를 시도하는 시대가 지나고 투쟁이 재개되자마자 다시 승리한 것은 대립론이었고 결국 모든 윤리와 경제 양극을 둘러싸고 있을 뿐인 정의나 논리구성으로는 국가와 정치를 근절할 수 없으며 세계를 탈정치화할 수도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고 슈미트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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