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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Jun 13. 2023

8월 15일에 대한 고찰

해방의 의미와 단절

- 1945년 8월 15일, 이를 통해 우리는 연속성의 단절을 경험했다. 당시 동아시아 전체를 지배하던 제국이 멸망함에 따라. 그 후 우리는 직전 8월 14일과 15일은 단순한 광복의 유무에서만 찾는다.


- 일본 제국은 고마워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생각해보라 그들은 패전과 제국의 붕괴와 함께 오로지 일본 국적의 일본인들만 챙겼을 뿐 나머지 대동아공영권의 아시아 동포들과 제국의 이등, 삼등 신민들을 무책임하게도 내버렸다. 제국의 멸망은 비록 피지배 민족들의 근대 국민 국가의 수립으로 이어졌지만 그 간격의 사이에 잊혀진 이들은 누가 보상하는가?


- 동아시아 근대의 틀을 만든 건 좋으나 싫으나 제국 일본이 만들었다. 당시 세계적으로 서구의 식민지배가 힘을 발휘하고 있었고 조선인들과 만주인들은 일본의 지배를 통해, 수카르노와 찬드라 보스와 같은 서구 지배 하에 있는 아시아 피지배 민족 독립운동가들은 홀로 근대화에 성공해 서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제국 일본의 위상을 본받고 싶어했다.


- 한국에서 2008년 조선인 가미카제 위령비를 설치하려다가 논란이 생긴 적이 있다. 결국 광복회 회원들의 시위 끝에 강제 철거되었고. 그러나 식민지배를 받던 시절을 살아온 조선인 가미카제 대원들은 누구보다 조선인들이 근대인으로 거듭나길 바랬다. 한 가미카제 대원은 수기에서 제국 일본이 영미와의 전쟁에서 이기고 조선인들이 대동아전쟁에서 활약한다면 조선 민족의 지위도 올라갈 것이라는 기대를 표현했으며 한편으로는 천황을 뒤에서 욕하기도 했다.


- 비록 어쨌거나 그들이 일본의 침략 전쟁에 부역한 것은 사실이나 단순히 그들이 제국에 맹목적으로 충성한 매국노였다고 볼 수 있는가? 난 아니라고 본다. 단지 그 시대의 한계 속에서 침략에 동원될 수 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자신이 자기가 속한 민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어쩔 수 없이 간 것이다. 책임을 물으려거든 대동아를 부르짖으며 공영권의 아시아 동포들을 패망과 함께 내팽겨친 제국 일본을 비난해야지, 왜 아무것도 못하는 시대에 자신의 할 수 있는 걸 한 식민지의 약자에게 화풀이하며 책임을 돌리는가?


- 그리고 불편한 진실이지만 육군특별지원병제에 지원한 조선인들도 많았다. 훗날 인도네시아 독립군의 간부가 되는 양칠성은 군무원이었지만 56.5:1이라는 경쟁률을 뛰어넘어 입대했다. 물론 정은석의 사례는 순사의 무언의 압박 같은 반강제가 있긴 했지만 말이다. 그러면 하나 물어보자 이들은 매국노이며 단순히 친일파들처럼 호위호식하기 위해 일본군이 되었는가?


- 당연히 아니다. 개인의 영달을 위해 육군특별지원병에 자원한 이도 있었지만 조선 사회가 1920년대부터 징병제의 목소리를 내온 것은 가장 큰 목표는 조선인 참정권이었다. 지원병에 합격하여 훈련소로 가는 이들의 마음 속에는 자신들이 전쟁에 역할을 하여 제국 일본의 인정을 받아 조선인들의 권리가 향상되는 것까지 염두에 뒀을 것이다. 1차대전에 참전한 인도인 병사들이 대전 후 영국이 인도 내 자치권을 향상시켜준 것이 매력적이었으리라. 당장 조선 공산당의 이강국부터가 육군특별지원병제가 독립국가 수립 후 인민혁명군 창설의 근간이 될 것이라 봤다.


- 또 하나 잊힌 이들은 바로 태평양 전선의 조선인 군속들이다. 전후 네덜란드군과 영국군은 이들을 B, C급 전범으로 분류해 사형에 처한 경우도 굉장히 많았는데 전선으로 내몬 제국 붕괴 후의 일본과 고향 한국 모두 이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주지 않았다. 물론 리콴유의 조선인 첫인상에 대한 기록처럼 태평양에 간 조선인들이 현지인들에게 일본인 따까리로만 보이긴 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쓰미 아이코 교수가 쓴 <적도에 묻히다>에는 고려독립청년당이라는 조선인 군속들의 비밀 결사에 대한 얘기도 있으며 조선인 위안소의 실체를 알고 충격을 먹었다는 얘기도 나온다.


- 그럼에도 살아남은 조선인 군속들은 어떻게 했을까? 바로 인도네시아 독립군에 들어가 그들을 훈련시켜 네덜란드 침략군에 맞서 싸웠다. 대표적인 이가 양칠성으로 1949년 네덜란드군에 붙잡혀 총살될 때까지 일본군 패잔병 출신으로써 독립군 부대를 이끌었다. 그가 사망하고 그와 친했던 독립군 장병들이 고위 군 장성이 되어 수카르노 정권과 수하르토 정권이 핵심이 되었고 이때 외국인 독립영웅으로써 훈장이 수여되었다. 제국 일본의 침략전쟁에 동원되어 부역한 피지배 민족의 청년이 전후 진정한 대동아의 가치를 실현한 혁명가가 된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


- 그러나 일본과 한국은 그들을 버렸다. 우쓰미 아이코 교수가 주인도네시아 일본 대사관의 허술한 일처리에 따졌지만 귀찮다는 반응만 보였다. 그들을 전선에 내몬 자들이 책임은 지기 싫다는 것이다. 한국과 북한 모두 태평양 전쟁에 참가한 조선인 군속들을 B, C급 전범이라는 이유로 언급하는 것 자체를 하지 않았고 최근에서야 역사문제연구소 등에서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 1945년 8월 그날 이후 제국이었던 일본은 일원들은 내팽겨쳤고 우리나라 역시 근대 국가를 설립한다는 이유로 1910년부터 1945년까지의 역사를 단순히 독립운동가vs친일파 구도로 만들어 언더도그마적, 정의감에 따른 역사 재판을 했다. 한 마디로 국가의 정체성을 성찰하기도 전에 단순한 구도로 복잡했던 식민지 시절의 역사를 종이 한 장만으로 정리해버린 셈이다. 그 과정에서 중국 전선의 지원병들, 태평양 전선의 조선인 군속들, 가라후토와 지시마 열도의 전후에 버려진 조선인 근로자들, 전후 중국에 남아 국공내전에 참여한 일본군들, 조선인의 권리를 위해 가미카제 대원이 된 자들, 원자폭탄 두 방에 피폭된 조선인들까지 수많은 이들이 정치인들의 단면적 역사 해석에 의해 수십년 동안 묻혔다.


- 뉴라이트는 제국 일본의 근대를 미화하기 바쁘다. 조선인 협력엘리트의 존재를 잘 짚고 선악 구도를 해체한다고는 하나 일제 밑에서 평범했던 조선인들에 대해서는 무시한다. 반면 진보 진영은 근대 국민 국가가 되기 위해 독립운동가들과 민중들이 지불한 값을 얘기하지만 조선인들이 조선인의 권리를 위해 일제의 전쟁에 나갔다는 사실이나 연합국에 의해 희생당한 조선인 B, C급 전범들인 군속들은 의도적으로 무시하며 매국노, 친일파로 폄하한다. 이같은 단순한 역사 의식 속에 무슨 발전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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