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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Jun 17. 2023

적백내전, 무엇이 백군의 패배 요인일까?

실패한 전쟁사-1

백군의 선전 포스터. 붉은군대를 성장시키던 트로츠키를 악마로 묘사한 그림이다.

https://youtu.be/hB89XOb__XQ?si=X0otKfyH_WSsLmMQ

러시아 백군은 왜 패했는가? 한번 대안적 관점에서 얘기해보고자 한다.

첫번째로 세력이 너무 다양했다. 남러시아의 안톤 데니킨과 브라겔, 시베리아의 콜차크, 거기에 더해 코르닐로프까지 반 볼셰비키라는 이름 하에 각 세력들이 연합체를 만든게 백군이었다. 왕정복고 성향의 반동주의자, 입헌군주제 지지자, 자유주의자, 그리고 사혁당 우파까지. 사혁당 우파 쪽에서는 케렌스키 측근이었다가 코르닐로프 쪽으로  붙었던 사빈코프가 대표적인 이다. 여기서 코르닐로프는 전간기 헝가리의 호르티 제독이나 루마니아의 안토네스쿠와 비슷한 성향의 군사독재자 스타일이었고 사빈코프 같은 사회주의자 출신 극우주의자도 있었으며 중책은 아니었지만 이반 일린 같은 이는 훗날 무솔리니 지지자가 된다.

그러다 보니 통일성이 없었다. 여기에 더해 백군 쪽을 지원하는 체코 군단은 백군을 돕기보단 고국에 돌아가는게 목표였고 이들의 배신으로 콜차크가 적군에 넘겨졌다. 가장 백군이 모스크바 근처까지 진격했었던 순간에도 남러시아 백군과 시베리아 백군은 통합된 지휘체계 하에 움직이지 못했고 이는 트로츠키를 중심으로 강력한 중앙 집권적 체계를 마련한 적군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거기에 더해 왕당파들에게 왕정복고 명분이 되어줄 니콜라이 2세 일가족은 백군들이 먼저 확보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 한 레닌에 의해 모두가 총살되었다

시베리아에 출병한 일본군. 하라 다카시 내각의 결정으로 파병간 이들은 한국 독립군과 싸우다가 니콜라옙스크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또 이때 강간 문제 때문에 위안소가 설립되었다.

두번째로 외국 개입을 너무 믿은 것이다. 당시는 1차세계대전이 끝난지 얼마 안된 시점이라 각국들이 피로에 쌓여있을 때였는데 영국 쪽에서 백군을 무조건적으로 밀어줘야 한다고 주장한 이는 처칠을 빼면 많지 않았다. 프랑스는 신생 폴란드 제1공화국을 밀어줬지만 백군과는 크게 엮이지 않았고 미국은 일단 해병대를 상륙시켜 시베리아 백군을 지원했으나 윌슨 대통령과 그레이브스 장군은 콜차크를 매우 싫어했다. 따라서 가장 백군 지원에 열성적이었던 건 외만주(연해주)를 얻을 속셈이었던 일본군이었는데 그들은 백군 정부를 인정하기 보단 이권 챙겨먹기에 열중해서 콜차크가 무기 구입을 위해 지불한 금괴들을 받고서는 철수할 때까지 주지 않는, 이른바 '먹튀'해버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백군이 외국 세력과 손잡은 것은 국내 여론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 없는 최악의 자충수였다. 특히 시베리아 정부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사혁당이랑 완전히척을 줬는데 이게 시베리아 극동 전역에서 친 붉은군대 계열 빨치산이 준동하는 원인이 된다. 훗날 스탈린이 실시하는 농업 집단화의 원인이 적백내전 당시의 열강들의 개입에 대한 트라우마에서 시작된 것처럼 당대 러시아인들에게 외국 지원으로 싸우는게 좋게 보일리 없었다. 게다가 백군의 일반 병사들은 징집병이라 제정 러시아에 충성을 다하는 장교들과는 괴리감이 컸다. 그냥 콜차크가 죽은 것이 고작 체코 군단의 뒤통수 치기 이거 하나 때문인 것만 생각해도 백군은 너무 외국 세력을 믿었다.

영화 <제독의 연인> 中. 이 영화는 콜차크 및 백군 미화라는 비판과 볼셰비키에 의해 잊힌 자들을 재조명했다는 평이 공존한다.

세번째는 안 그래도 외국 세력 개입으로 지지를 깎아먹었는데 거기에 더해 민사작전도 개판이었다는 것이다. 소련 대백과사전에서는 예카테린부르크에서만 25,000명이 학살당하거나 고문을 당해 죽었다고 나오는데 소련 공산당의 입장이 맞는지와는 별개로 이르쿠츠크 주 명령서에 만나는 마을들을 불태우고 인질 잡으면 총살하라고 나와있기도 하니 아예 거짓말은 아닌셈. 또 콜차크의 부하들이 마을 전체를 포격으로 불태우고 4,000명 농민들의 희생이 나왔다는 얘기도 있다. 1919년 3월, 콜차크는 실제로 "아무르 지역에서 지역 주민들을 몰살시킨 일본군을 따를 것"을 주문한다.

네번째는 백군은 한번도 주요 도시와 산업 시설, 철도를 손에 넣었던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 볼셰비키는 처음부터 끝까지 러시아의 중심부를 장악하고 있었으며 백군은 대부분 변경지대였다. 데니킨은 이를 타계하기 위해 우크라이나로 진출해 적군을 위협했으나 어차피 이 와중에도 주요 도시들은 여전히 소비에트 정부의 영향권 안에 있었으며 철도 덕분에 병력 이동에도 백군보다 유리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도시가 수중에 있었던 적군은 안정적으로 생필품 공급이 가능했고 백군은 농촌만 가지고 있었는데 거기서도 농민들의 토지를 다시 지주들의 땅으로 되돌려서 원성을 샀다. 그 결과는 알다시피 대규모 징집과 옛 제정 러시아군 장교 합류 허용을 통해 전열을 재정비한 적군이 반격에 나설 때 통일된 체계 하에 대응 못하고 순식간에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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