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헌법의 한계 (음슴체 주의)
대일본제국 헌법, 입헌주의와 전제주의 사이에서
* SNS에 올렸던 글 복붙해서 올리는 거라 브런치에서는 평소에 안쓰던 음슴체니 주의 바람.
메이지 헌법이 사실 근대적으로 다른 서구를 따라잡을 만한 대단히 진보적인 것이었느냐 하면 글쎄다 싶음. 물론 당시 기준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 정도만 제외하면 입헌주의가 제대로 자리 잡은 국가가 몇이나 되겠나 싶지만. 그래도 몇가지만 짚자면
1. 제1조에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통치한다고 되어있고 제3조에는 천황은 신성하기에 침해할 수 없다고 되어있음. 사실 대한제국의 대한국 국제처럼 전제군주제면 문제가 없고 거긴 헌법이 안 생겨도 이상할 게 없음. 근데 일본은 겉으로는 헌법 하의 근대 국가라는 외형을 띄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독일 제국의 카이저가 그랬듯이 천황의 신성성을 유지하고자 했음. 왜냐면 메이지 유신 자체가 존황양이를 통해 대정봉환으로 이뤄 막부의 통치권을 천황에게 반납하면서 되었으니까. 그렇게 해서 나온게 천황주권설과 실질적 통치는 번벌로 구성된 내각이 하는 이중 구조였음.
2. 그러니 이 이중 구조는 처음부터 모순이었음. 생각해보면 간단한데 애당초 일본 제국 시절은 천황주권설대로 천황이 통치한 적이 없음. 메이지 천황은 청일전쟁 때 무쓰 외상을 비판하며 불만을 살짝 표출한 거 빼면 상징적 국가원수의 역할을 했으며 다이쇼 천황은 너무 병약해서 은둔함. 쇼와 천황은 2.26 사건 때나 옥음방송에 있어서 천황의 권력을 사용했지만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이 중일전쟁 일으키고 도조 히데키 내각이 태평양 전쟁 일으킬 때는 방관자 포지션에 있었음.
3. 따라서 이러한 헌법을 두고 해석 논쟁이 생겼다. 첫번째는 호즈미 야사카로 대표되는 천황주권설. 그는 헌법은 군주의 명령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고 따라서 통치권은 당연히 천황에게 귀속되고 또한 천황의 대권은 절대무제한적인 것으로 해석함. 두번째는 이치키 기토쿠로의 국가 법인설. 내용인 즉슨 국가는 하나의 법인으로써 천황은 절대적인 기관이라는 것.
4. 그리고 이제 전전 시대 헌법 논쟁의 불판 제공지이자 훗날 군국주의 세력의 명분으로 작용되는 미노베 다쓰키치 교수의 천황기관설이 나옴. 천황은 국가와 분리되고 기관은 도구이기에 국가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것임. 즉 국가의 소유물이라는 사실을 부정한 것. 또 국가는 국민을 위한 도구가 아니며 국민이 국가를 위한 도구라고 한 건 덤. 그러나 결국 천황의 신성성을 건드리지는 못한게 결국 천황은 다른 기관으로부터 침해받지 않는 절대적인 기관으로써 도의적으로만 국가를 봉사할 이유가 있고 책임은 없다는 것임.
5. 이러한 국체론 논쟁의 흐름 속 최종보스는 기타 잇키였음. 만세일계, 군신일치론을 비판한 기타는 한편으로는 <국가개조법안대강>에서 천황의 권력으로 헌법을 정지시키고 국가개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함. 모순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한마디로 천황의 국민이 아니라 국민의 천황이라는 것임. 천황은 특권을 가지고 있는 한 국민으로써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는 국민으로 국가가 조직된다고 봄. 쉽게 말해 천황이나 국민이나 둘다 기관이라는건데 실상은 천황기관설보다도 훨씬 급진적인 주장이나 황도파 청년장교들은 <국체론 및 순정사회주의>나 불경죄로 연재 중단된 <국민 대 황실의 역사적 관찰: 소위 국체론의 타파>는 안보고 <국가개조법안대강> 속 천황의 이름으로 하는 헌법 정지 이것만 보고 천황이 2.26 쿠데타를 지지해줄 거라 착각한 게 아이러니.
6. 제28조에 신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고 하는데 실상은 제한이 컸음. 국가신토를 정부 차원에서 강요하다시피한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도 모를 리 없는 일제 말 신사참배를 보면 다 알 거고. 물론 불교 계열 니치렌종을 믿는 이시와라 간지나 기독교 신자 요시노 사쿠조, 무신론자 후쿠자와 유키치 등이 일본 사회에서 잘 나갔던 걸 생각하면 종교의 자유 자체를 부정하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탄압은 상당했음. 군국주의 시대에는 불교 신자들이나 기독교 신자들도 신사 참배를 해야 했고 무엇보다도 천황은 전전 시대 내내 살아있는 신, 즉 현인신으로 신성시 되었음.
7. 제11조 천황은 육해군을 통수한다 이것도 세이난 전쟁부터 시베리아 출병 때까진 큰 논란은 안됨. 이게 독일 제국 헌법 영향으로부터 나타난 문제인데 1차세계대전 당시 빌헬름 2세는 뒷방에 밀려났으며 독일의 전황과 전시 통제는 오로지 루덴도르프와 힌덴부르크의 손에 있었음. 근데 재미난 건 루덴도르프가 확립시킨 총력전 개념과 전시경제 모델을 일본식으로 변형시켜 <육군 팸플릿>을 만든 이가 통제파의 초대 영수인 나가타 데쓰잔이라는 것.
8. 일본도 1929년 장쭤린 폭사 사건 부터 이 루트를 따라가기 시작했고 1931년 이시와라 간지와 이타가키 세이지로가 독단적으로 만주사변을 일으킬 때 내각은 통제하지 못함. 특히나 당시는 쇼와 공황과 도호쿠 대기근을 민간 내각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기에 문민 통제에 대한 불신이 높아지던 시기였음. 군부는 헌법에 따라 내각에 독립되어 있는 기관이었고 천황 직속 기관이었음. 근데 천황은 실질적으로 군을 조종한 적이 거의 없으며 기껏 해봐야 쇼와 천황이 2.26 때 직접 진압군 지휘하겠다며 화냈던 일이 전부임. 어쨌거나 군부는 천황의 이름을 당당히 들이밀 수 있었기에 테러를 저지르더라도 충군애국이라는 이름으로 참작이 되었음.
9. 그 예로 런던 해군 군축조약을 맺은 하마구치 오사치 총리를 죽인 민간 우익은 군부의 비호 속에서 사형 선고 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 1940년에 석방됨. 특히 5.15 사건 때는 사건을 저지른 해군 장교들은 아무도 사형을 선고받지 않았으며 수감된 민간인 오카와 슈메이도 가석방으로 풀려나 다시 아시아주의 홍보 활동을 함. 결국 이것의 절정판이 2.26 사건이었는데 이때는 의외로 처벌이 엄했음. 그 이유는 쇼와 천황이 측근들이 간신으로 몰려 테러당한 것에 분노했기 때문인데 이때만큼은 권력을 사용해서 이소베 아사이치와 청년장교들부터 가담하진 않았지만 영향 준 기타 잇키, 니시다 미쓰기까지 전부 총살.
10. 그리고 제11조는 2.26 사건 이후 더욱 악용되어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내내 일본 제국은 천황의 이름으로 전쟁을 시작함. 천황이 전쟁에 의구심이 있었던 건 틀린 말은 아니나 어쨌든 전쟁이 선포되는 과정에서 천황의 동의 없이 전쟁은 이루어지지 못하며 도조 히데키나 야마모토 이소로쿠보다도 전황을 더 자세히 알고 있었던 거는 사실임. 결정적으로 천황이 제1조와 제11조를 제대로 써먹은 마지막 순간은 궁성사건을 진압하고 옥음방송을 내보내 포츠담 선언을 수용하여 전쟁을 끝낸 것이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