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국은 과연 '사민평등'이 이뤄진 시대였는가?
또 다른 왕권신수설, 신분제 사회
- 일각에서 일제가 적어도 쇼와 이전에는 나름대로 자유주의적이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래서 말인데, 일제는 다이쇼 환상으로 대표되는 것처럼 신분제 사회가 아닌 입헌자유주의 체제였을까? 정답은 아니다. 애초에 일제는 소작제가 유지되던 나라였고 '사민평등'을 내세우며 폐도령을 실시하고 무사 계급의 특권을 폐지했지만 그럼에도 화족이라는 특권 계층이 존재했으며 이들은 조슈 번과 사쓰마 번의 다이묘 가문들 뿐 아니라 유신 과정에서 공을 세운 지사들까지도 포함되었다. 사민평등은 그저 막부 시대 이래 대대손손 지켜져 오며 도쿠가와 가문의 지배 체제의 기반이 된 무사 계급의 특권을 없애기 위해 내세워진 것이며 사실 대정봉환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 오히려 일제는 에도 막부와는 다른 의미로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다. 화족 내에서도 공작, 남작, 백작 등 서양식 귀족제도가 도입되어 막부 시절 도쿠가와 가문의 가신들인 신번(성씨가 도쿠가와나 마쓰다이라인 쇼군의 친척), 후다이 번(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도쿠가와 편에서 선 다이묘들의 번) 같은 봉건적 잔재가 단지 메이지 천황과 귀족원을 중심으로 한 화족제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당장 좁게는 메이지 유신부터 1918년 하라 다카시 내각까지, 넓게는 1925년 보통선거권의 도입으로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절정에 달했을 때까지 일본의 입헌 정치를 주도한 건 조슈, 사쓰마로 대표되는 양대 파벌이었다.
- 또 무엇보다 일제에서 주권이 있었던 것은 국민이 아니었다. 바로 그 대상은 천황. 아시아 최초로 근대적 헌법을 만들었지만 한계 또한 분명했던 셈. 헌법 1조부터 만세일계의 천황이 통치하는 나라가 대일본제국이라 규정하며 3조에서는 아예 천황은 신성하기에 범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한다. 그렇기에 일제는 영국과 같은 입헌 군주국과는 거리가 멀었다. 굳이 비슷한 곳을 꼽자면 입헌 군주국의 외형을 갖추면서 내면은 전제군주적 성격이 강했었던 프로이센과 이를 계승한 독일 제국에 가까운 셈. 실제로 이토 히로부미는 자유민권운동가들의 바램을 거부하고 헌법 초안 과정에서 독일을 많이 참고했다.
- 따라서 일제 헌법에 대해 누가 국민이 주권이 있어야 한다고 얘기하는 건 물론이고 천황제의 신성성에 의문을 제기하면 X되기 마련이었다. 이른바 불경죄로 잡혀갈 수 있다는 말. 헌법이 이렇다 보니 미노베 다쓰키치 교수의 천황기관설 정도만 얘기해도 탄압받기 일쑤였다. 천황기관설에서도 주권은 국민에게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천황에게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미노베는 국가법인설을 끌고 와 국가가 주체적인 권한을 가지며 국민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고 한다. 또 천황을 다른 기관의 위에 둔 건 덤이고. 이게 당대 일본에서 기타 잇키 <국체론 및 순정사회주의> 이전에 가장 진보적으로 평가받던 학설이었고 이렇듯 일제는 입헌자유주의보단 전근대적 왕권신수설을 그대로 따르는 국가였다.
- 일제에서 보통선거권이 제정된 건 앞서 말했다시피 1925년이다. 정당 내각이 들어선게 1918년이었으니 한참 후에야 생긴 셈. 그 기간 동안 선거는 어떻게 했나고? 1890년에서야 헌법 제정으로 생겨난게 귀족원이었다. 당연히 투표권은 납세액을 기준으로 나눠졌으며 그 기준은 당대 기준으로 어느정도 경제력이 있어야 했다. 그러다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기점으로 납세자가 늘어나며 보통선거권이 제정되나...싶었지만 결과는 알다시피 대역사건으로 공안 정국 형성되면서 묻혔다. 그리고 처음 주장이 제기된 것에 비해 아주 늦게서야 1925년 가토 다카아키 내각 하에서 보통선거법이 제정되었는데 문제는 그 악명높은 치안유지법도 이 시기에 같이 제정되서 별 의미가 없었고 그마저도 1926년 다이쇼 시대가 저물고 시작된 쇼와 시대에서 완전히 파탄나버렸다.
- 여담으로 일제의 식민정책도 보통 입헌군주국이나 자유주의 국가에서 실시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대강 설명하자면 동화주의의 대표 모델인 프랑스 식민정책은 본국 헌법의 식민지 적용이나 주민의 정치적 권리에 보다 적극적이다. 물론 이 역시 차별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뒤바뀌지만. 반면 일제는 정치적, 사회적 동화주의는 피하는 반면 경제적 통합을 위한 제도적 장치는 열성적으로 만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는 조선과 일본을 동일한 관세, 민법 체계 아래에 두어 통치자의 편리성을 키우면서도 결국 중의원 선거제도를 조선에 끝까지 도입하지 않는 등 정치적 권리를 안주며 내선일체 주장과 대비되는 모습을 보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 오히려 일본이 입헌자유주의가 된 것은 GHQ 이후라고 볼 수 있다. 자민당-경단련-보수 언론 카르텔이 물론 입헌주의적 관점에 입각한다기 보단 2키 3스케가 굴리던 만주국 모델에 더 가깝다만 어쨌든 사회당이 제1야당이 되고 불경죄와 치안유지법이 폐지되어 전학련-전공투 같은 사회운동도 대역사건 때만큼 탄압받지 않았다. 여성도 투표권이 생긴 건 덤이고. 뭣보다 다이쇼 데모크라시~쇼와 초기 때 일본은 인도나 브라질 정도 밖에 되질 않았으며 고도성장기로 진입한 후에야 GDP 2위를 찍으며 헌법 9조 탓에 군대가 없으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대동아공영권의 절정이었던 시기보다 더 발언권이 쎄졌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