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원 이광수: 반민족행위자와 내셔널리스트 사이에서
민족이 실존하기 위해 필요한 것
- 민족주의(nationalism)은 근대의 산물이다. 그러나 그것은 비교적 한정된 지역에서 언어, 생활 관습, 정치제도를 공유하는 인간집단이 근대에 들어와 형성되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민족주의 등장 이전에도 물론 민족이라 불릴 만한 인간 집단은 존재해왔지만 그 집단을 민족으로 사념하고 표상하는 실천이나 체계는 민족주의라는 개념이 등장하기 전까지 '민족'이라는 유기체로써 실존하지 않았다. 이처럼 민족이라는 집단은 오랫동안 같은 가치를 공유하며 살아왔지만 민족주의 없이는 민족이라는 유기체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 일각에서는 서구 근대의 민족주의가 동아시아에 들어오기 이전에도 한반도에는 민족 개념이 미약하게나마 있었다고 한다. 동이족이라는 표현이 그 근거고. 그러나 동이족은 중화질서 내의 범주일 뿐이며 서양에서 나온 민족 개념과는 상당히 차이가 크기에 한반도인들이 3.1 운동 이전까지 독자적으로 민족 국가로써 존재해왔다는 소리는 틀린 말이다. 임진왜란과 대몽항쟁 당시의 의병은 민족 감정에서 일본과 싸운 것이 아니라 전근대 왕조에 대한 충성 혹은 백성들의 생명과 사유재산을 강탈한 것에 대해 저항권을 행사한 것에 가깝다.
-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동안 한반도는 민족의식에 기반한 독립적인 주권 국가 형성에는 실패했지만 세계적인 기준에서의 민족 개념이 형성되던 시기였다. 그리고 이 담론장에 있던 사람은 소설 <무정>과 친일파로 유명한 춘원 이광수였다. 그는 최초로 온전한 한국어 근대소설을 썼고 만주, 도쿄, 상하이 등을 다니며 세계를 체험했다. 또 반식민 민족주의 투쟁에도 앞장섰으며 자유연애라는 파격적 행보를 보였다. 그가 민족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인식은 민족을 위해 민족을 해체한 후 탈바꿈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이광수는 민족을 배신한 최악의 친일파로 손꼽힌다.
- 나는 이광수나 친일 행위를 한 것과 별개로 그를 민족을 배신하고 일제의 당근에 넘어간 기회주의자라 매도하고 싶진 않다. 다시 말하지만 민족은 오래전부터 가치와 제도를 공유하면서 살아온 인간집단을 사념케하는 민족주의라는 실천적 행위를 통해 실존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이광수를 단순한 반민족행위자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그의 친일은 한반도에서 민족이 실존하기 위한 사념을 당대 상황 속에서 전개한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
- 이광수의 '민족 개조' 역시 단순히 영달을 위한 친일만은 아니었다. 민족개조 입장에서 행한 극단적인 반민족행위마저도 민족을 사념하는 방식을 일관되게 내정한 언설이었다. 따라서 이광수의 반민족행위는 한반도에서의 민족형성을 부(負)의 방향에서 주조해온 계보다. 즉 그의 민족주의는 반민족의 언설이기보다는 규범적 민족주의의 그늘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20세기 초 이래 현재까지 이어지는 한반도 민족주의의 단면인 '자기 혐오'를 보여주고 있다.
- 김윤식이라는 학자는 밤의 논리가 이광수의 민족의식을 상징한다고 한다. 낮의 논리는 인간 이성이 최고로 향하는 합리주의 겸 가속주의이며 반면 밤의 논리는 제국주의의 합리주의와 진보주의를 따라잡기 위한 아무런 방도가 없는데 교육과 산업만 준비하면 만사가 될 거라는 것. 그게 식민지 시기 민족형성의 담론이었고 김윤식은 이광수는 제3의 시점을 보지 못하고 심정적 민족주의에 갇혔다 평했다. 그래서 이광수는 노예상태에서 벗어나는 길은 주인이 되는게 아니라 노예의식을 끝까지 밀고 나가 노예로서 저항해 길 없는 곳의 길을 개척한 중국의 문인 루쉰을 따라잡지 못한 것이다.
- 이광수가 친일을 하게 된 것을 살펴보자. 한반도의 민족 형성은 한편으로는 고백하는 내면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민 되기의 열망과 좌절이었는데 이광수는 이 둘을 통합하여 1940년대 시기에 친일행각을 벌인다. 제국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에 동조한 여타 지식인들처럼 이광수도 내선일체 및 황민화 실현을 내걸고 조선인, 일본인 모두의 쇄신을 촉구하는 에세이와 소설을 발표하는데 그 목적은 제국의 신민들이 철저한 자기 내면의 고백과 반성을 통해 국민으로 거듭나는 일을 뜻했다. 고백을 통한 자기반성 및 도덕을, 건설 중인 제국 국민과 결합함으로써 내면으로 침잠하지 않은 민족 개조의 꿈을 이루는게 이광수의 목적이었고.
- <민족개조론>은 메이지 말~다이쇼 시대에 이르는 일본 담론장을 식민지 조선에 적용시킨 텍스트가 아니다. 오히려 이건 일본 지성계를 도약한 신종족의 작품이었다. 그래서 이광수는 민족개조론의 도덕성을 내세웠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그토록 혐오하던 조선의 악습을 타파하면서도 필연적인 갈등 분출과 조정을 얘기힌지 않는다. 이광수가 제시하는 민족개조의 길은 조선민족을 퇴폐로 이끈 민족성격의 개조다. 구스타프 르 봉은 민족 근본성격의 변화를 불가능하다 얘기했지만 이광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성격개조를 통한 민족개조를 설파했다. 왜냐면 성격개조는 정치와는 달리 오랜 시간을 거쳐 숙성되어 '무실역행'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 여기서 이광수는 정치 단체를 민족개조의 주체가 아니라 못박는다. 이광수에게 민족개조란 정치나 투쟁과 동 떨어진 도덕과 수양과 실천으로 이뤄진 심리와 성격, 즉 관념에서 이뤄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은 시간이 얼마나 걸리건 개조의 지평 위에서 개인의 심리-성격을 개조하고 민족으로 수렴한다. 근데 이 제안은 일본의 식민정책학을 경유해 프랑스 혁명 이래 근대 정치이념에 대한 굴절인 한에서 치명적인 유산이 된다. <민족개조론>은 개인이 국민되기 과정에서 드러나는 근대 정치의 폭력성을 말소한 탈정치화의 언설이었다.
- 또 이광수에게 한반도 민족은 국민이 아니었다. 식민지 주민들은 제국 일본이라는 근대 국가 판도 내에서 국가에 등록되지 못하는 예외통치 영역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반도의 민족은 배제돼 분할된 인민의 형상, 부정과 실현과 혁명과 내전으로 스스로를 현전하는 인민의 형상이며 민족자결 원칙이 역설적으로 드러내보인 근대정치이념의 근원 현상인 난민과 다르지 않았다. 한반도 난민들은 만주에서 열도로 이주를 강요당하는 그저 태어났을 뿐인 벌거벗은 생명이라는 것.
- 그러나 <민족개조론>의 민족은 난민으로 스스로를 형상화하지 않았다. 이광수는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지적 분위기로부터 자연스럽게 습득한 무해한 마음과 성격을 탈정치화의 매트릭스로 삼았다. 이때 탈정치화란 국가의 계기를 결여한 차원이 아니다. 오히려 탈정치화는 마음만을 간직한 채 무실역행하는 인긴이 민족을 개조할 수 있는 '땅'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은폐하는 것, 즉 식민지 조선의 민족이 난민일 수 밖에 없는 의식에서 말소하는 탈정치화였다.
- 이광수의 민족주의는 이렇듯 개인이 국민되기 과정에 도사리고 있는 난민이라는 형상을 한반도 민족 사념에서 말끔히 지워버리는 치명적 유산을 남겼다. 난민을 난민이라 형상화할 수 밖에 없던 한반도 민족주의 담론이 스스로의 형상을 되찾은 것은 1960년대였다. 이때부터 비로소 국민과 난민 사이의 '민족'은 문제화의 문턱을 섬어설 수 있었다.
(김항 교수의 '개인 국민 난민 사이의 민족: 이광수 <민족개조론> 다시 읽기'를 보고 메모한 거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