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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Jul 02. 2023

일본 야당의 실패 (2): 민주당의 아마추어 정권

미숙하고 이상만 앞섰던 정치

1998년, 2년전에 일본 사회당 탈당파와 자민당 탈당파들이 주축이 되어 창당한 민주당은 민정당, 민주개혁연합, 신당우애 등의 다른 야권 세력들과의 연합으로 다시 재창당 되었다. 그 후로도 계속 야권이 상태가 엉망이 틈을 타서 성장을 해왔고 2003년에는 오자와 이치로가 이끌던 자유당도 하토야마 유키오와 간 나오토의 제안을 듣고 합류하였다.

한편 자민당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의 무난한 국정 운영으로 어느정도 경제 위기를 수습했기에 나름 순항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2005년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자신의 숙원 사업인 우정민영화 법안이 자민당 내 관료파들까지 반대하며 참의원에서 부결되자 중의원을 해산하는 정치적 무리수를 벌이고 결국 중의원 선거가 치러지는 해프닝이 벌어진다.


이때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인기가 예전 같은 시기는 아니었기 때문에 '자폭해산', '벼락치기 해산'이라는 시각이 많았었다. 그러나 당내 공천 경쟁에서 고이즈미가 대놓고 반대파들을 학살해버렸고 선거 결과는 자민당이 296석이나 얻으며 완전히 압승이었다. 고이즈미는 이 일로 순식간에 다시 한번 떠올랐지만 반면 민주당은 113석 밖에 못얻었는데 이는 60석이나 잃은 결과였다. 결국 오카다 가쓰야 당시 민주당 대표는 선거 참패에 책임을 지고 당 대표직을 사퇴하였다.

하지만 고이즈미는 얼마 못가서 임기 만료로 인해 사퇴하게 되었고 그 뒤를 이어서 2006년부터 2009년까지 약 1년 주기로 자민당은 아베 신조(1차 내각), 후쿠다 야스오, 아소 다로로 총리가 3명이나 바뀌었다. 이 시기에 아베 신조와 후쿠다 야스오, 아소 다로는 무능하고 유약한 모습을 보이며 지지층에게 실망감을 안겨줬고 그 결과 2007년 참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이 109석을 얻은 것에 비해 자민당은 고작 83석이 전부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 자민당은 점점 인식이 악화되어 갔고 2009년에 아소 다로 총리는 중의원 해산이라는 승부수를 던진다. 그러나 결과는 정권교체와 탈관료를 내세운 하토야마 유키오 총재의 민주당이 308석을 얻었고 반면에 집권 여당인 자민당은 무려 181석이나 잃은 채 고작 119석 밖에 못 건졌다. 이 당시 민주당이 얻은 의석은 나카소네 내각 시절의 자민당 의석보다 많으며 투표율도 69.28%나 되었다. 그렇게 민주당 정권은 많은 일본인들의 기대를 안고 출범하게 되었다.

그러나 제대로 된 국정운영 경험이 없던 민주당인 만큼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은 처음부터 삐걱거렸다. 하토야마 총리는 중의원 선거 당시에 민주당의 주요 공약이었던 오키나와 현의 주일미군 후텐마 기지 이전을 시행하려고 했지만 그 과정에서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는 것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다. 참고로 이때 미일관계의 악화는 반대로 친미 외교를 펼치던 한국의 이명박 정부에게 기회가 되었고 덕분에 한미관계는 좋아졌다.

후텐마 기지 이전 외에도 선거 당시 민주당의 공약들을 보면 중졸 때까지 1인당 연 31만 2천엔 지급(자녀수당), 고속도로 통행료 무료화, 공립고교 무상화 등이 핵심이었으며 민주당 측은 이걸 각종 공공사업의 재검토와 지출 삭감, 공무원 인건비 20% 감축, 각종 보조금 삭감, 소득공제 폐지로 재원을 확보할 수 있다고 했었다. 그러나 자민당 뿐만 아니라 전문가들도 재원 확보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한 바가 있고 언론에서도 하토야마 총리가 큰 정부 수준의 복지를 주장하는데 정작 증세에는 반대하는 모순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했었다.

거기다가 엔고를 오히려 긍정하는 듯한 행보도 보였었다. 그랬기에 하토야마 뿐만 아니라 민주당 정권기 동안 전반적으로 엔고 현상이 심해졌는데 일본 정부는 조치를 취하기는 커녕 방관하거나 가만히 있기만 했고 당연히 일본의 수출 경쟁력은 급격히 떨어졌다. 그 뿐만 아니라 몇몇 기업들은 아예 도산하기 까지 했으며 훗날 여기에 동일본 대지진까지 겹쳐서 일본은 경제는 그야말로 심한 경기침체에 빠져버린다.

하토야마 유키오는 정책의 무능과 후텐마 기지 이전, 오자와 이치로 간사장의 정치자금 스캔까지 터지면서 결국 쫓겨나듯이 9개월 만에 사퇴해버렸다. 그 후 집권한 간 나오토 총리는 초창기에는 나름 주목을 받으며 지지율도 괜찮았었다. 그러나 공식석상에서 관료 조직을 상대로 대놓고 적개심을 표출하는 행보로 인해 정부와 관료 조직 간의 관계를 악화시켰고 이는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 등의 여러 악재가 터질 때 대응과 수습에 커다란 차질을 줬다.

총선에서 압승한 일본 민주당의 총재 하토야마 유키오

기다가 2010년에는 중국의 경제규모가 침체에 빠져있는 일본 경제를 뛰어넘어버리는 일까지 벌어졌고 지지율은 20%대 이하까지 추락해버렸다. 결국 얼마 못가서 간 나오토 총리도 사퇴하게 되었고 노다 요시히코가 민주당 총재선과 참의원 및 중의원의 총리 지명 투표를 거쳐서 차기 총리로 결정되었다. 노다 요시히코는 이전 총리들의 실패를 보면서 관료 조직과의 협력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헌법 개정 추진과 집단적 자위권 규정에도 찬성하는 등 자민당 지지층들도 동의할 만한 정책들을 펼쳤다.

그래서인지 노다 정권의 초창기 지지율은 요미우리 신문의 여론조사로는 65% 정도까지 나왔었다. 노다 요시히코 총리는 또한 한국에게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협상을 제안했으나 당시 한국 여론이 한일군사정보협정 추진 논란 때문에 이명박 정부가 친일파 소리를 들을 시기라서 그런지 여론 눈치 보다가 무산되어 버렸다. 어쨌거나 이 일 이후로 노다 정권 시기 동안에 한일관계는 계속 악화의 길을 걸었으며 이명박 대통령 독도 방문 논란 및 천황 과거사 사죄 요구 사태로 갈등이 절정에 달했었다. 또 센카쿠 분쟁에 대해서도 하토야마, 간과는 달리 강한 반중 색채를 보였었다.

이렇듯 외교, 안보는 나름 자민당과 협치가 가능할 정도로 민주당 내에서는 강경한 성향이었던 것도 모자라 경제 문제에 있어서도 자민당에 타협적인 태도를 보였다. 특히 그는 소비세 찬성파였다. 여기에 대해 잠시 설명하자면 왜 증세찬성파가 우파적이냐고 지적을 할 수도 있는데 일본에선 보통 좌파는 소득세 인상을 지지하고 반대로 우파는 소비세 인상을 지지한다. 실제로 일본에서 소비세를 주로 인상시켰던 정권을 보면 자민당이다.

그랬기에 소비세 인상 법안을 추진시키다가 반대파인 오자와 이치로가 반발했으며 이를 두고 당내 분열이 극심해지면서 법안 처리가 힘들어지자 자민당과의 대연정까지도 고려하는 웃픈 사건까지도 있었다고 한다. 관료들과의 관계도 제대로 조정 못한 탓에 간 내각 때와는 반대로 휘둘리게 되었다고 하고.

하지만 노다 요시히코 총리는 민주당 내에서부터 소수파였고 지지 기반도 취약한 상태에서 분열까지 하는 모습과 더불어 딱히 국정운영을 잘하진 않았기 때문에 오래 가지 못했다. 2012년 노다 총리는 승부수로써 중의원 해산을 감행했고 곧 이어서 중의원 선거가 치러졌지만 결과는 아베노믹스를 앞세운 아베 신조가 이끄는 자민당의 승리였다. 이 선거에서 자민당은 294석을 얻으며 옛 영광을 회복했지만 반대로 민주당은 기존 230석 중 173석을 잃은 57석 밖에 안되는 초라한 성적을 얻었는데 이로써 기대를 받으며 출범했었던 3년 3개월 간의 민주당 정권기의 결과는 허무하게 실패로 끝났다.

민주당 이후 들어선 아베는 확실히 관료를 통제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보통 일본에서 정부 장관들은 관료들이 내준 정책에 도장찍는 역할만 하는 관례가 있었는데 아베는 이를 과감하게 깸으로써 관료가 주도하는 정치가 아니라 정치가 주도하는 관료를 만들고자 했다. 마치 다나카 가쿠에이가 생각나는 대목인데 아베는 이로써 확실한 능력을 보였었다. 그러나 아베 이후 자민당 내각, 즉 스가나 기시다는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일본 민주당 정권이 실패한 이유는 물론 관료와 자민당의 비협조가 자초한 부분도 있다. 당장 후쿠시마 원전 사고 당시 도쿄전력은 내각에 협조를 거부하며 상세 정보 공개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었는데 오로지 간 나오토 총리만이 상세 정보를 공개하여 일본 열도 전체가 방사능 천국이 되는 걸 막았다. 이는 간 나오토의 분명한 업적이며 그래도 민주당 정권이 자민당보다 나았던 부분을 꼽자면 이걸 고를 수 있을 것이다. 또 우리 입장에서는 물론 노다 요시히코는 독도 문제와 개헌에 강경한 입장을 표명했지만 하토야마 유키오는 서대문 형무소까지 찾아가 무릎 꿇고 사죄하거나 간 나오토는 한일합방 100주년을 맞아 간 담화를 발표해 진정성이 충분한 사과를 했었으니 한일관계가 그나마 좋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일본인들에게 민주당 정권의 행보는 무엇보다 안정감이 없었으며 마치 초보 운전자에게 장거리 운전을 맡긴거나 다름 없었다. 그들은 1990년대 시절 연정을 통해 했던게 유일한 여당으로서 경험이었고 그마저도 실패로 끝났다. 어찌보면 2009년 중의원 선거는 아베(1차)-후쿠다-아소로 이어지는 자민당 '도련님' 내각의 미숙한 국정 운영을 심판하고 새로운 세력에게 한번 개혁을 맡겨보는 성격이 강했다. 그리고 선택받은 민주당 정권은 도련님 내각의 행보와 별반 다르지 못했고 오히려 그 도련님 내각의 무능하고 어리숙하다고 평받던 아베가 칼을 갈고 아베노믹스를 내세워 나오자 참패하게 되었다.


가 요시히데 전 총리가 일본 민주당 정권에 대해 평했던 인터뷰 내용을 인용하며 글을 마치겠다.


" (간 나오토 정권은) 예전의 정치가와 관료의 관계를 전부 부정하고 관료를 배제했다. 그 결과 거대한 국가 운영에 실패했다. 노다 정권은 관료와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역으로 관료들에게 휘둘리게 되어 총리의 얼굴이 안 보이게 되었다. 진정한 정치 주도는 관료를 적절히 이용하면서 국익을 최대한으로 증대시키는 것이다. "

- 스가 요시히데 전 총리가 관방장관 시절 잡지사와의 인터뷰에서 민주당 정권에 관해 한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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