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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원죄와 구원

애니 <길티 크라운>

by 제이슨

흔히 좋은 작품은 여러가지 기준이 있겠지만 대충 작품성이 좋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래서 보통 작품성이 좋은 작품들은 흥행도 잘 따라오는 경우가 많다. <신세기 에반게리온>도 <강철의 연금술사>도 <기동전사 건담 시리즈>도 <진격의 거인>도 그렇게 명작 반열에 들 수 있던 것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작품의 완성도는 좋은데 너무 어려우면 실패한다고 한다. 왜 그럴지 의문이 드는 사람도 있을텐데 그 이유는 간단하다. 생각해보라. 저기 노스 센티널 섬 주민들에게 스마트폰을 알려준다고 한들 그들이 그걸 이해할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어떤 작품은 어떤 사람들한테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다.


아라키 테츠로 감독이 만든 길티크라운이 그러하다. 아라키 테츠로 감독은 데스노트 감독으로 유명한데 그가 영향을 받은 감독으로는 토미노 요시유키와 안노 히데아키가 있다. 그래서 그들을 한번씩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는데 우선 토미노 요시유키의 작품 성향은 염세적이면서도 생태주의적, 평화주의적 사상이 물씬 나타난다.


안노 히데아키 역시 21세기 이후 일본 애니의 방향성을 제시했다고 평가받을 만큼 독특하면서도 강렬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데 그의 세계관은 성경에 기반해있다. 그래서인지 두 감독의 영향을 받은 아라키 테츠로 감독은 자신이 만든 작품의 제목을 길티 크라운으로 정했는지 모른다.

길티 크라운, 직역하면 죄의 왕관이라는 뜻이다. 성경을 아는 사람들은 죄, 왕관하면 딱 한 가지가 떠오를 것이다. 바로 예수님이 쓰셨던 면류관이다. 성경에 따르면 면류관은 죄를 상징하고 예수가 면류관을 썼다는 것은 죄를 짊어진다는 것을 의미, 면류관의 죄를 소멸시키기 위해 예수가 죽었고 그러다가 다시 부활해서 면류관의 죄를 파기시켰다.


길티 크라운은 이러한 플롯을 따라간다. 이노리는 마나라는 또 다른 자아가 있는데 마나는 오우마의 기억 속 누나로써 시작의 돌을 만져 아포칼립스 바이러스를 창궐하게 만든 원흉이다. 이노리는 슈이치로가 마나와 의식접촉을 하기 위해 만든 버디이고 동시에 마나라는 내용물을 담기 위한 그릇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노리의 영혼은 불완전하다.


하지만 슈에 의해 점점 감정을 깨달아간 이노리는 아이러니 하게도 마나 덕분에 자신만의 색깔을 찾게 된다. "민족은 다른 민족에게 억압받을 때 비로소 자신을 지각하게 된다"는 에르네스트 르낭의 말이 생각나는 지점이다. 다시 성경으로 돌아와 이브는 선악과를 먹은뒤 남편인 아담에게까지 나눠주게 된다. 신의 명령을 어긴 이 일로 인간은 원죄가 생기고, 불완전한 존재로 전락하고 신과 결별한다.


나는 이런 이브를 길티크라운에서 마나가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아포칼립스 바이러스는 선악과를 먹는 행위, 즉 원죄를 의미하고 이를 처음 접한 이가 마나이게 그녀가 이브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건 좀 더 고차원적인 해석이긴 한데 마나는 죄를 지은 이후의 이브이고 다른 자아인 이노리는 죄를 짓기 전 이브의 모습이라고도 해석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아담은 누굴까? 돌려서 보자면 마나는 자기 동생 슈를 아담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성경에서는 아담이 창조된 후에 이브가 창조되는데 역설적이게도 길티 크라운에서는 이브가 먼저 창조되고 신이 아닌 그녀가 아담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슈는 보이드 게놈으로 왕의 힘을 얻는데 이는 신의 힘을 뜻한다.


그리고 세번째로 보이드 게놈의 힘을 쓰는 시점은 의미가 있는게 1)아담과 이브가 원죄를 지고, 2)신이 인간의 원죄를 씻기 위해 예수를 보내고, 3)결국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림으로써 원죄를 씻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의 힘을 세번째로 쓰는 시점에서 슈는 예수처럼 인간의 원죄를 씻기 위한 구원자가 되기로 한 것이다.


마지막 장면은 성경과 대비되며 끝난다. 이브 역할인 이노리가 구원자인 슈를 위해 대신 희생하며 끝나는데 이는 예수를 대신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를 십자가에 매달던 사람들과 극명히 대비된다. 나는 이 장면을 통해 아라키 테츠로 감독이 인간도 언젠가는 원죄를 씻고 구원을 받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길티 크라운은 사실 몇년 전에 봤었다. 그러나 그때는 다 봤었긴 했어도 너무 어려웠다. 그렇지만 이제와서 보면 조금은 이해한 것 같다. 성경적이고 난해한 해석이지만 길티크라운을 어려운 작품임에도 다시 한번 봐줬음 좋겠다고 생각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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