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이슨 Jul 23. 2023

유나바머는 현대의 레닌이 될 수 있는가?

시어도어 카진스키의 철학과 반기술주의에 대한 고찰

https://youtu.be/Ztcf8LcDxWY?si=Pe5U1bA4vGA8QKpb

유나바머라는 코드명이 붙은 시어도어 카진스키는 보통의 테러리스트에 대한 인식이라면 나쁘게 보면 빈 라덴, 동정적으로 보자면 영화 <조커>의 아서 플렉과 같은 취급을 대부분이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빈 라덴과 같은 극악무도한 테러리스트와도 아서 플렉 같은 그저 광대로 전락해 린치당하다가 악의 길로 접어든 불쌍하기만 할 뿐인 존재와도 거리가 멀었다. 명문대 교수에서 자연으로 돌아가 은거하는 테러리스트로, 그리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할 논리를 마련하기 위해 책을 쓰고 이것이 나름대로 큰 주목을 받았다는 것이다.


2023년 올해 유나바머는 세상을 떴다. 대부분의 이는 관심이 없었고 그나마 아는 이들조차 유나바머를 냉소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음에도 통찰자로써 유나바머는 여전히 현대 사회에서 좋은 방향이든, 비판적인 방향이든 의미하는 많다고 본다. 여담으로 이 글은 그의 저서 <산업사회와 그 미래>와 <반기술 혁명> 속 주장을 바탕으로 작성했다.

통찰자로서 원시 사회와 현대 사회를 과감히 분석하다


유나바머는 인간의 욕망을 최소한의 노력으로 만족시킬 수 있는 욕망과 상당한 노력으로 충족이 되는 욕망, 아무리 노력해도 충족이 불가능한 욕망로 나뉜다고 보았다. 현대 산업 사회에서 인간의 욕망은 첫번째와 세번째에 속하며 두번째 욕망은 인위적으로 조작된다. 반면 원시사회에서 생필품은 대개 두번째 욕망이며 현대에서 대대수의 사람들에게 두번째 욕망으로 대표되는 권력 과정에 대한 인위적 욕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에 현대 사회에서 대다수를 괴롭히는 건 목적 상실감이었다. 그리고 자율성의 부재로 우리의 삶은 다른 사람이 내리는 결정에 좌우된다.


그래서 현대 사회는 여러 수단을 통하여 두번째 욕망의 권력이 마치 정상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며 눈속임 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는 광고인데 대중의 욕망을 통제하며 허위의 욕구를 만들어낸다. 더 좋은 명품에 대한 욕구를 조장하고 인간이 이를 구매하도록 부추긴다. 구매를 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고 돈을 얻기 위해서는 노동을 해야한다. 자신의 노동에 따른 가로 돈을 얻기 때문에 많은 인간들을 실제로는 필요하지도 않은 상업적인 욕구를 충족하는 것이 정상적인 "노력에 의한 욕구 총족"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그가 이상적인 대안으로 여기는 것은 인간이 자율적으로 욕망을 추구하였던 원시 사회이다. 원시인들은 자신을 위협하는 것에 그저 앉아서 당하지 않았으며 그에 비해 현대인은  사고, 식품 속 발암 물질, 환경 공해, 전쟁, 늘어나는 세금, 프라이버시 침해 등의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원시인은 자신의 손으로 안전을 지키지만 현대인의 안전은 너무 멀리 떨어져있거나 거대해서 개인적으로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는 타인들이나 조직들의 손에 맡겨져 현대인의 안전에 대한 욕망은 첫번째와 세번째의 욕망으로 전락했다.


유나바머는 현대 사회에서 람들은 권력 과정에 대한 욕구를 어떻게 충족시킨다고 보았는가? 그 중 하나는 대규모 운동과 강력한 조직을 자신과 동일화시키는 방식이다. 그가 한창 활동할 당시 미국은 파나마를 침공해 독재자 노리에가를 축출시키는 일을 벌였다. 미국은 권력 과정을 통과했고 많은 미국인들은 자신을 미국과 동일시하여 대리 만족을 느꼈다. 즉 파나마 침공은 사람들에게 권력을 갖고 있다는 느낌을 제공해준 대표적인 사례로 군대, 기업체, 정당, 인도주의 단체, 종교 운동, 이데올로기 운동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자유에 대해서는 권력 과정을 통과할 수 있는 기회라 하였다. 여기에도 대리 만족을 위한 활동이라는 인위적 목표가 아니라 진정한 목표가 있어야 하며 대규모 조직으로부터 간섭 없이 당사자의 존재가 걸린 생과 사의 문제를 스스로 통제할 수 있음을 뜻한다. 의식주 환경 내에 있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위협에 대한 방어능력들이 그러하다. 자유는 권력을 확보하는 것으로 여기서 권력은 다른 사람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둘러싼 환경을 통제하기 위한 권력이다.

는 왜 혁명이 필요하다 했는가?


이유는 크게 거창한 건 없다. 애초에 산업 사회라는 것 자체가 인간의 행동을 제어할 수 밖에 없는 체제고 그렇지 않다면 생산과 체계가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위험성을 내포하니 말이다. 또 체제는 보통 사람들이 무력감을 느끼게 하기 위해 심리적 장치들을 활용, 공식적 규제른 강화하고 있다. 사람들이 체제의 욕구에 맞춰 행동을 수정하도록 끊임없이 압박을 가하며 결국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적 행동 패턴과는 동 떨어진 방식으로 행동하게 시킨다. 이는 원시인들이 어린이를 훈련시킬 때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과 합당한 조화를 이루도록 훈련시키는 것과 대조적이다.


그리고 테크놀로지를 통해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유나바머는 보었다. 환경 문제의 경우 다른 파벌간의 투쟁과 타협으로 점철되어 어느 한쪽이 주도권을 잡았다가 다른 쪽이 잡기도 한다. 중요한 사회문제들은 결코 합리적이고 포괄적인 계획을 통해 해결되지 않으며 수많은 경쟁 집단들이 저마다의 단기적인 이익을 위해 경쟁하며 타협점을 간신히 찾는다. 따라서 테크놀로지를 효율적으로 운영해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 아예 전체를 폐기해버리는 편이 쉬운 셈.


그리고 혁명의 방식은 좌파주의와는 다르게 "연대"를 통해 집단화를 부추키는 방향으로 가서는 안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집단화는 인간을 타율화하며 욕망을 왜곡하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유나바머는 집단화된 대중 혁명이 아닌 소수 지식인들이 개인적으로 혁명을 주도하는 방식을 지지하며 그 사례로써 자코뱅주의와 레닌주의를 고평가한 것이다. 그가 말하긴 모든 혁명은 다수가 아닌 소수에 의해 일어났으며 자연으로의 복귀도 소수의 테러적 활동으로 이루어질 것이라 봤다.

내가 생각하는 유나바머의 의의


난 유나바머를 최소한 진지하게 고려할 가치 정도는 있다고 보는 쪽이다. 물론 난 반기술주의자가 아니며 전근대 사상에 관심이 많을지언정 그렇다고 원시 사회에 대한 추종자는 아니다. 그럼에도 난 유나바머가 단순히 희화화되거나 싸이코 테러리스트로 취급받을 광대, 혹은 악인만이라는 시각으로 그를 평가할 수 없다고 한다. 유나바머를 비아냥거리는 사람들 중에는 그를 제대로 알고 비판하는 이도 물론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그냥 뉴스 몇줄 보고 오사마 빈 라덴하고 비교하는 등 그의 책이나 저작을 읽어본 사람이 있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내가 유나바머의 최대 의의로 꼽는 것은 현대 사회에 대한 통찰이다. 현대 사회에서의 인간의 욕구 충족은 정상적이지 않은 것도 사실이고 권력 과정에서 자율성이 배제된 채 타율적으로 의존하는 경우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많은 대중들은 자신을 특정 거대 집단 혹은 국가에 동일시하는게 현실이라는 부분은 씁쓸한 지적이다. 그런 점에서 유나바머는 진정한 인간의 본성은 집단이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자율적으로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상당히 중요한 지적을 해줬다.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자율적인 존재로써의 인간이다. 현대 사회는 자유주의라는 이념이 등장한 이후로 역사상 최대한의 인간으로서의 자유를 누리는 시대로 평가받지만 정작 자유를 누린다는 인간들은 그 이전 시대의 사람들보다 훨씬 타율적인 존재가 되어 남들에게 자신의 안전과 판단을 맡기고 있다. 분명 나는 유나바머가 이상향으로 극찬한 원시 사회는 바람직한 체제라고 보지 않는다. 분명 평균 수명도 짧고 질병이라는 현대 사회와는 다른 의미의 자신을 위협하는 것에는 무력했으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심리적 안정은 신체적 안정과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으며 우리를 안전하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은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자신감과 같이 별로 객관적이라 할 수 없는 보호 장치다. 원시인들은 자기 방어를 위해 싸울 수 있으며 음식을 찾아 먼 길을 여행할 수도 있다. 물론 노력한 만큼 성공하리라는 보장도 없지만 원시인은 자신을 위협하는 것에 당하고만 있지 않는 자율성이라는 부분 만큼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질병이라는 부분 역시 사물의 본성이기에 자연적인 흐름이라며 냉철히 받아들일 수 있는 반면 현대의 개인에게 가해지는 위협의 대부분은 인간이 만든 것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현대인은 어떠한 부분에서는 본질적으로 원시 사회의 속칭 "야만인들"보다도 무력한 존재인 셈인 것이다. 원시 사회의 재앙은 대부분이 자연적인 현상으로써 당연히 무력해질 수 밖에 없는 환경적 요소였다면 현대 사회의 무력감은 대부분 인간이 만들어낸 것에서 기인하며 진정한 목표의 부재와 자율성의 부재로 벌어진 참극이라는 유나바머의 말은 일리가 있는 셈이다. 당장  우리 삶이 핵발전소에서의 안전 기준이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지와 얼마나 많은 농약이 식품에 투약되는지, 그리고 대기에 오염 물질이 얼마나 허용되는지에 좌우된다는 그의 주장이 과연 아예 완전히 허무맹랑한 헛소리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 의문이다.


이처럼 유나바머의 주장은 현실성은 둘째 치더라도 문제 의식 자체는 지금도 유효한 부분이 분명히 있다. 가령 개인의 욕망을 통제하는 상업화와 집단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해선 산업 사회가 서구에서 처음 출현한 이래 꾸준히 논의가 진행되던 사안이었으며 유나바머의 <산업 사회와 그 미래>는 이러한 논의의 장에 분명 일정 부분은 기여한 점이 있다. 중앙일보의 1995년 8월 16일자 칼럼은 유나바머의 방법이 동의는 없을 수는 지만 미국 성인의 25%가 현대기술 산업 사회의 기본 가치에 회의를 품고 있는 것으로 조사가 되었다면서 기술 문명에 한 공포에 의외로 많은 이들이 동의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내 생각을 말해보자면 기술 문명은 "칼"과 같은 존재다. 칼은 인류에게 있어서 스스로를 지켜주는 도구임과 동시에 재료를 다듬고 요리에 투입하기 위한 과정에서 꼭 필요한 존재였다. 그러나 이면에서는 인류가 냉병기로 전쟁을 치르던 시절까지 칼은 정복을 위한 살인 도구로 활용되어 왔으며 스스로를 지키는 걸 넘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용도로도 사용되었다. 기술 문명과 산업 사회도 마찬가지로 인류 역사상 최고의 찬란한 시대를 불러온 측면도 있었지만 그것의 또 다른 측면이 우리 인간을 스스로 파괴로 몰아갈 여지가 있는 양날의 검으로써 유나바머의 우려가 단순한 기우라고만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보론: 유나바머의 방법론은 틀렸는가? (Feat. 혁명의 본질적인 의미)


의회민주정의 시스템 아래에 찌들대로 찌들어버린 한국 사회에서는 유나바머의 테러를 옹호한다고 하면 인간 쓰레기 취급이나 반사회적 성격장애 취급받을 것이다. 특히나 한국은 그 보수적이고 메이와쿠라는 폐쇄적인 문화가 극심한 일본보다도 시위, 데모가 훨씬 온건하고 의견 표출조차도 위선적이다 싶을 정도로 쓸데없이 점잖은 나라이다. 한국에서 6공 이래 가장 폭력적인 정치 운동이었던 NL. PD 운동권이나 가스통 할배들도 옆나라 일본의 전공투, 적군파, 중핵파나 미시마 유키오의 방패회와 비교했을 때 평화롭다 못해 선비들끼리 모여 유학에 논하는 모습이 연상될 정도로 진짜 한국은 유독 폭력적인 방법론이 설 수가 없는 나라다. 아무리 정치인들이 한국이 혐오 사회니 헤이트스피치니 지껄이더라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촛불 시위 같은 것을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해결한 평화 "혁명"이다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당당히 싸지르는 사람들이 정치인을 하고 있는 나라인데 애초에 폭력이라는 방식이 역사적으로 체제 변화에 있어서 어떻게 작용했는지 모르니까 저딴 소리를 하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도 바스티유 폭동이라는 약탈로 시작된 사건이고 한국인들이 자유민주주의의 우상으로 떠받드는 미국은 보스턴 차사건이라는 폭동과 워싱턴이라는 영국 입장에서는 내란 수괴, 폭도인 사람이 폭력으로 세운 나라다. 하물며 비폭력주의자로 유명한 넬슨 만델라조차도 말기에는 무장 투쟁에 가담했고 마틴 루터킹도 비록 폭력적 방법론에 기울진 않았지만 경쟁자 말콤 엑스의 영향으로 구조적 모순을 지적하는 등 급진주의자로 변해갔다,


그런 관점에서 폭력은 체제의 변화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폭력을 수반하지 않고 민주화를 이룬 필리핀은 독재자 마르코스에서 아키노 가문으로 권력자가 바뀌었을 뿐이지 사회의 양극화와 체제의 모순과 같은 근본적인 문제는 바뀌지 않고 더욱 악화될 뿐이었다. 한국은 안 그런가? 전두환 및 하나회에서 양김의 영향을 받은 민주화 정치인들로 권력 구도가 바뀌었을 뿐이지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는 항상 억눌려 왔으며 다른 방향에서 고질병이 터지기에 이른다.


혁명에 요소로서 폭력이 수반되는 것, 나는 피해 범위를 무차별적으로 늘리는 것은 막아야 한다고 보지만 아예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비폭력으로 모순이 커지다가 언젠가 폭발하여 크게 다치는 것보다는 차라리 폭력이 사회를 바꾸는 긍정적인 요소라고 솔직하게 인정하고 필요에 따라서 적절히 유혈을 조절하며 최소한의 피해를 줄여가면서 목표에 도달하는게 최선은 될 수는 없어도 적어도 차악이 되는 건 필요하다고 본다. 특히 루이 16세의 처형과 니콜라이 2세의 처형은 폭력이 기존 체제를 부술 수 있는 가장 혁명적인 방법임을 잘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유나바머의 테러도 난 폭력이라는 방법론이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폭력으로 사회를 바꿀 수만 있고 그럴 의지만 있다면 남들이 다 비난하는 방법론으로 싸우는 것도 그럴 듯한 것은 사실이다. 최소한 유나바머가 폭력적이라 비난하는 이들은 혁명에 대한 이해가 없다. 그러나 난 유나바머의 테러라는 방법론에는 크게 동의할 수는 없다. 물론 오사마 빈 라덴식 소프트 타깃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 대량 살상보다는 낫지만 유나바머의 테러는 일부 과학자나 지도층을 대상으로 한 부분적 테러인데 그래봤자 체제는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 본다.


왜냐고? 쉽게 말해 모기가 사자를 찌르는 것과 다름 없기 때문. 유나바머는 레닌의 전위당 이론과 프랑스 혁명의 자코뱅을 인용해 대중이라는 존재는 혁명에 필요 없으니 소수의 지식인들로 테러를 하여 체제를 무너뜨려야 한다고 했는데 총체적 변화가 없는데 될리가. 참고로 레닌이 전위당 이론을 주장한 것은 맞지만 그래도 그는 어디까지나 엘리트들이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줘야 한다는 것이지 혁명의 주체로써 대중의 존재를 부인한 것은 아니다. 결과적으로 레닌은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켰고 유나바머는 실패했으며 마오쩌둥이 말한 민중과의 관계는 "물과 물고기"라는 사실을 유나바머가 간과한 셈,

맺음말: 하지만 나는 그에게 동의할 수는 없다


유나바머가 얼마나 명확한 신념과 체계를 가지고 있었는지와 그가 단순한 미치광이 살인범이 아닌 혁명가로써의 면모 또한 일정부분 존재했는지 여부는 위에서 내가 설명한 내용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건 분명히 하자면 난 유나바머가 통찰력이 있는 문제 제기를 하였고 신념을 가진 저항가로서의 면모가 존재했는지와는 별개로 그의 사상적 신념에는 동의하기 어렵다고 밝히는 바이다. 솔직히 이건 내가 반기술주의자이거나 에코 파시즘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기도 하고.


일단 인류의 역사를 단순히 모두가 투쟁적으로 살았었던 원시 사회와 타락할대로 타락한 산업 사회로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없다고 본다. 그렇게 나눈다면 바로 원시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 이어졌다는 건데 가능할리가. 고대와 중세, 근세라는 중요한 과도기를 빼먹고 원시 아니면 현대다 이렇게 주장하는 건 오류다. 그리고 또 하나. 이미 현대 문명에 찌들대로 찌든 인류가 엄청난 불편함을 감수하고 원시 사회로 되돌아갈 수 있는가? 유나바머는 자연적 욕구를 이야기하지만 산업 사회가 무너진다 해서 인간이 자율적 욕망을 할 수 있는지가 의문이며 먼 미래에 와서는 또 다시 산업 사회로의 지향을 꿈꾸지 않을까?


유나바머는 원초적인 정서에 의해 지배당하는 것을 긍정한다. 그렇기에 그는 이데올로기와 미디어 선전에 의해 왜곡된 감정이 지배하는 걸 비판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이 산업 사회 이전에 필요한 중요 요소, 즉 국가라는 것을 만든 건 유나바머가 되돌아가야 한다고 그토록 주장하던 원초적인 정서 때문이었다. 왜냐면 인간의 원초적인 정서는 소위 "자연권"이라고 불리는 생명과 재산권에 대한 갈망이었고 이를 보호하기 위해 세운 것이 바로 국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나바머가 문제 의식을 제기한 현대 사회의 요소는 그가 긍정적으로 바라봤던 자율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인간성이 만들어낸 유산인 것이다.


그것이 내가 유나바머의 문제 의식을 한번쯤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고 보면서도 그의 혁명론이 절대 성공할 수 없었으며 사상 또한 모순적이고 앞뒤가 안 맞는 부분이 다소 존재한다고 보는 이유다. 이 점에서 유나바머의 철학이 비판받는 것은 충분히 합리적이라 본다. 근데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 유나바머에 대한 비난의 대부분이 철학에 내재한 모순적인 부분이 아니라 테러와 폭력이라는 행위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지. 내가 유나바머에 동정적인 시선을 취하게 된 것도 그가 무슨 주장을 했는지에 관심도 없는 사람들이 테러 하나만 보고 그것만 까는 부분도 있었고.


유나바머는 최근에 죽었다. 사인은 극단적 선택이라고 말이 나오고 있다. 나는 그 신념이 옳은지는 역사가 판단할 일이라고 보며 최소한 내 입장에서는 사상적 동의가 가는 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사상 동의 여부는 별개로 그가 뒤집고자 했던 자본주의 산업 사회에 대해 제시한 통찰은 그 사회를 유지하려는 입장이든 부수려는 입장이든 분명히 자신들의 논리를 더욱 단단하게 해줄 거름이 될 수 있다. 나는 유나바머가 남긴 최대 유산이라면 기술 문명 파괴 혁명의 시발점으로서의 기반도, 테러라는 폭력적 행위에 대한 경각심도, 하물며 유나바머의 기구한 인생사의 교훈도 아닌 현대 사회의 근간에 대한 논의의 장을 열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테러리스트로써의 카진스키는 개죽음을 맞이 했다. 그러나 통찰자로써 유나바머는 죽어서도 우리에게 현대 사회와 기술 문명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앞으로 오랫동안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난 그를 단순히 실패한 테러리스트라는 관점으로만 바라보고 싶지는 않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