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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Oct 10. 2023

이스라엘은 어떻게 핵무장에 성공했는가?

독자적 핵무장과 의도적 모호성과 베긴 독트린이라는 핵 전략

* 글 시작에 앞서 하마스의 침공으로 현재 이스라엘에 전쟁이 벌어진 상태입니다. 전쟁이 하루 빨리 끝나고 이스라엘이든, 팔레스타인이든 민간인 피해가 더 이상 지속되지 않길 기원합니다.


이스라엘은 1948년 건국 초기부터 불안했다. 이스라엘의 국토 면적은 좁고 공격에 취약한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는데다가 주변은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같은 적국들에게 포위된 상태였다. 거기다가 지하자원과 수자원도 부족했으니 당장 망해도 크게 이상할 것이 없었는데 건국하자 마자 바로 전쟁까지 벌어지는 등 상황은 영 좋지 않았다. 1차 중동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지만 이 과정에서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등 5개의 인접국이 다 적국으로 돌아서면서 태생적으로 아랍 국가들과의 분쟁 및 갈등을 안고 시작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초대 총리인 벤구리온 시절 때부터 자국 안보를 지켜내기 위한 각종 노력을 다했었다. 1차 중동전쟁 이후로도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 전멸을 기치로 내걸고 틈만 보이면 계속 공격을 가해왔다.  그 결과로 이스라엘의 구조적 열등성 극복을 위해서는 단기전을 벌이고 최대한 이스라엘 영토 안에서 전쟁이 벌어지는 것을 피해야 한다고 판단, 적지에서 신속하게 전개하는 전략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 전략은 선제공격적 성격이 강하며 질적우위를 중요시하는 특징이 있는데 이러한 전략은 6일 전쟁에서 잘 나타났다.

그런 배타적 생존 방식의 일환으로서 이스라엘은 재래식 군사력 증강 외에도 1948년부터 국방부 직속 핵연구 기관을 만들어 시몬 페레스 국방부 부국장의 주도로 핵 개발을 시작했다. 1953년 말까지 벤구리온은 구체적인 핵 개발보다는 기술을 축적하는 것에 집중했는데 이는 당시 핵 개발 성공국이 미국, 영국, 소련 3개국 뿐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수에즈 전쟁 당시 소련 불가닌 수상이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 3개국에 핵무기 사용을 포함한 군사행동을 불사하겠다고 위협하고 이에 3개국은 어쩔 수 없이 굴복하여 물러나면서 이때부터 이스라엘은 핵무장 과정에서 핵무기와 전폭기, 미사일, 잠수함 등 운반수단 확보에도 신경쓰게 된다

한편 1957년에는 드디어 미국을 신뢰하지 못한 나머지 동병상련의 처지로 손잡게 된 프랑스의 도움으로 원자로를 건설하게 되었고 양국은 원자로 및 핵연료 재처리 시설의 건설과 우라늄 공급에 합의를 보았다. 1958년 네게브 사막에 위치한 디모나에 핵시설이 건설되며 프로젝트는 가동되기 시작했고 1963년부터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했다. 이쯤을 전후에서 우라늄을 농축하고 플루토늄을 추출하여 핵개발이 시작되었고 첫 핵무기 보유는 정확한 정보는 없지만 아마 1966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1960년에 프랑스는 알제리 사막에서 첫 핵실험을 가졌는데 이때 이스라엘 과학자들이 현장에 가서 데이터를 공유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스라엘은 오늘날까지도 다른 실질적 핵보유국들과는 다르게 공식적으로 자국의 핵 보유 능력을 선전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이스라엘은 중동에서 최초로 핵무기를 들여오는 국가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면서도 핵무기 보유 여부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던 레비 에슈콜 전 총리의 애매모호한 답변에서 나온 "의도적 모호성"이라고 볼 수 있다. 들여온다(introduce)라는 표현은 핵무기를 완성 상태가 아닌 기폭 장치와 핵물질을 분리한 상태로 보관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덕분에 이스라엘은 지금까지도 핵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불투명한 상태에 머무름으로써 적국의 공격 의지를 억제하는 동시억 비핵보유국의 혜택을 챙기고 있는 중인거고.

이러한 독특한 모호성 전략은 아랍국가들이 이스라엘을 지도상에 지워버리는 것을 못하게 미리 방지하게 만들어버림과 동시에 아랍 국가들이 핵 개발 명분을 얻지 못하게 해버리는 큰 성과를 거뒀다. 또한 애매한 입장 덕분에 미국이나 핵 비확산을 약속한 서방 국가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핵 전략은 핵 개발로 인한 국제사회에서의 댓가 지불을 피하면서 주변 아랍국가들을 억제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아무튼 이스라엘은 프랑스의 협조로 핵무기를 성공적으로 개발했으며 이는 프랑스-이스라엘이 서로 알제리와 이집트에 대한 이해가 일치했던 것도 있으며 미국의 묵인도 도움이 되었다.


실제로 그동안 이스라엘에게 NPT 가입 압력을 넣었던 미국은 1969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골다 메이어 총리 간의 정상회담을 통해 사실상 이스라엘의 핵보유를 묵인하기로 했고 이는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여담으로 이것도 말하자면 이스라엘은 모호성 전략에 따라 철저하게 핵 개발 관련 자료들을 비밀로 유지하면서도 소문, 성명, 유출 등의 방법으로 핵 이미지를 강화해서 핵능력을 간접적으로 공표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스라엘 핵 전략에 있어서 주변국 핵 위협 대응 방식으로 대표적인 것을 하나 꼽을 때에는 1980년대 당시에 메니헴 베긴 총리가 발표했던 '베긴 독트린'을 빼놓을 수가 없다.

베긴 독트린은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나중이 아닌 지금"을 위해서 주변 아랍 국가들이 핵을 포함한 대량살상무기 보유를 막기 위해 예방타격에 나선다는 것이다. 일례로 1981년 6월 7일에 이스라엘은 이라크 바그다드 근교에 있던 오시라크 원자로를 F-16A 전폭기 8대와 F-15A 호위기 6대를 동원해 요르단과 사우디의 영공을 거쳐 기습하면서 선제적 예방 공격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이때 총리가 바로 메나헴 베긴이었으며 당시 이스라엘은 국제사회의 비난에 맞서 유엔헌장 제51조에 명시된 내용에 따라 국가가 갖는 자연적이고 고유한 권리인 자위권을 행사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오시라크 원자로 폭격 이후 베긴 총리가 직접 "중동에서 이스라엘의 적이 대량살상무기를 갖는 것을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라는 "베긴 독트린"을 발표하여 오늘날 이스라엘 국방, 안보 정책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다.

21세기 이후에도 베긴 독트린은 적용된 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시리아가 그 대상이었다. 시리아는 당시 북한의 도움으로 동북부 데이어 에조르 근교에 알 키바르 원자로를 건설하고 있었다. 북한은 이미 2006년에 1차 핵실험을 성공했었고 자신들과 우호적이던 시리아에 핵기술을 줬던 것이다. 정보를 입수한 이스라엘은 미국의 협조와 부시 대통령의 기밀 엄수를 약속받아 무력행사에 나섰는데 사실 굉장히 위험했다. 시리아의 방공망은 26년 전 이라크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우수했고 작전 실패시 이라크와는 달리 아예 국경을, 그것도 골란 고원이라는 전략적 요충지를 맞대고 있는 인접국인 시리아가 최악의 경우에는 전면전을 개시할 가능성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끝끝내 이스라엘은 군사적 옵션을 고집했고 2007년 9월 5일, 과수원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F-15I와 F-16I 전폭기 8대가 출격해 목표물인 알 키바르 원자로를 파괴했다.

한편 사건의 당사자인 시리아는 핵개발 의혹이 들켰다간 문제시될 것이기에 별 일 없었던 듯이 넘어갔고 사건 자체를 아예 덮어버렸다. 미국은 북한과 시리아 사이의 핵개발 커넥션 의혹이 자신들의 우방국 이스라엘을 통해 제기되었음에도 굳이 일 더 크게 벌일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여 조용히 침묵을 지켰고 오시라크 원자로 때처럼 국제사회에서 대대적으로 비난을 퍼붓지는 않았었다. 이 사건에서 10명의 기술자가 목숨을 잃었고 시리아와 핵 기술 협력 논란이 있던 북한마저도 미국이 추가적으로 나서는게 없는 걸 확인한 이후 2007년 10.3 이행조치에 합의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핵무장 모델과 핵 전략은 국제정치에 있어서 상당히 흥미로운 주제다. 내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행태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것과는 별개로 옳고 그름을 떠나 건국 직후부터 사방에 적국으로 포위되어 언제든 바다로 밀려나 다 죽을 위치에 있던 이스라엘이 4차례 중동전쟁의 승리는 물론이고, 핵이라는 자칫 더 위험해질 수 있는 방식까지 꺼내들면서 생존을 위한 방안을 끊임 없이 찾던 것은 충분히 공부해볼 만한 사례라고 생각한다. 매우 호전적인 광견 국가지만 최소한 그들에 대해 모르는 것보다는 알고 나서 좋은 점은 수용하고 비판할 건 비판하는게 더 옳은 자세가 아닌가 생각한다.


P.S. 따로 굳이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진행상황에 대해 정리할 계획은 없으나 그래도 내 입장을 밝히자면 전형적인 다른 중동 정세 속 사건들처럼 악vs악, 덤앤더머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봄. 시리아 내전 때 알레포 지역의 반군이 지하에 무기를 보관하거나 민간 마을에 군사 거점들을 세웠었던 것처럼 이번 사태에서 하마스 역시 가자지구 주민 깊숙이 자리잡고 모스크, 학교, 민가 주변에 근거지를 세워둠. 시리아 내전 때 반군이 보였던 전술처럼 저걸로 민간인 피해 발생하면 언론 플레이가 가능하기 때문인데 같은 무슬림 형제단 계열 아니랄까 하는 짓이 독립군은 커녕 스스로 테러집단으로 보일 만한 행동들이나 하고 자빠짐.


그리고 그냥 침공하는 것도 아니고,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그걸 대놓고 SNS에 올리면서 침공한다는 건 진짜 시리아 내전 시절 반군들이랑 너무 닮아서 황당할 지경. 시리아 내전 때 반군 계열에서 파루크 여단이라는 곳은 포로들을 잔인하게 죽이는 것도 모자라 인육 섭취까지 하던 막장 집단이었고 그 외 자유시리아군, 알 누스라 전선 등 각종 반군 단체들이 민간인들을 밥 먹듯이 죽인 결과가 국제사회에서의 반군 지지 여론이 튀르키예를 빼고 완전히 상실했던 것이나(다만 미국은 SDF는 지지) 또 시리아 정부군의 60%가 수니파인데 같은 수니파까지도 적으로 돌리게 된 것임. 분명 내전 초창기 아사드 정권은 매우 위태로운 상태였는데 이걸 극복한 건 러시아의 지윈도 있겠지만 가장 결정적인 것은 반정부 시위를 격렬하게 벌이던 시리아 국민 여론이 반군을 떠났기 때문. 따라서 하마스가 지금 저렇게 복수한다고 막 죽이고 다니는 거 전략적 관점에서 봐도 여론이 악화되면서 자신들의 우군인 반서방 세계까지도 외면하게 만들 자충수가 될 수도 있음.


그러나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로 더 나을 것도 없는 국가고 다르게 보자면 하마스라는 저 괴물을 만든 원흉이기도 함. 애당초 무리하게 남의 땅에서 천년 전 경전 구절 근거로 건국한 것 자체가 스스로 원한살 행동을 한 것인 셈이고 하마스가 과격하게 나온 것 만큼이나 쟤네도 그동안 팔레스타인 민간인들을 사람 취급 안하고 밀어버려서 증오가 증오를 낳게 만든 책임이 큼. 한마디로 말하자면, 팔레스타인의 하마스나 이스라엘이나 서로 적대적 공생 관계일 뿐이지 어느 쪽이 더 낫다고 할 것도 없음. 그냥 그들의 싸움 속에서 중간에 낀 민간인만 죽어나가는 거고, 특히 중동이라는 곳의 정세는 국제정치라는 특성이 보통은 그렇지만 특정 누군가가 더 선할 것이라는 믿음을 버려야 함. 왜냐면 중동에서는 5.18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게 느껴질 만큼 폭력이라는게 일상화되어 있기 때문. 뭐 그런 점에서 나는 이스라엘, 하마스 모두 지지하지 않으며 거기에 감정이입해서 팔레스타인 폭도 진압 외치거나 반대로 이스라엘 척결하고 하마스가 승리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이런 애들 보면 솔직히 조금 보기 불편함. 아니 평소에 그 나라에서 사람이 파리떼처럼 죽어가던 말던 관심도 없던 인간들이 뭐 하나 사건 터지니까 단체로 정치병이라도 걸렸나??


출처:


김태현, <이스라엘의 핵전략과 군사력 건설이 북한에 주는 함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국가안보와 전략 18 (3), 2018

조관행 외, <주변국의 군사적 위협 대비 이스라엘 공군의 군사력 운용과 건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군사 (128), 2023

이창위, <북핵 앞에 선 우리의 선택>, 궁리, 2019

오용현 <이스라엘의 핵 위협 인식과 전략선택의 메카니즘>, 2019, 경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p37~40, p85~89, p120~123

노석조 <강한 이스라엘 군대의 비밀>, 2018, 메디치, p105~126

한승조, <핵 개발 과정에서의 예방공격 효용성 연구 : 이스라엘에 의한 이라크와 시리아 공격을 중심으로>, 한국융합보안학회,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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