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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Oct 09. 2023

동유럽 민주화 시대의 종언과 이에 대한 고찰

오르반, 두다, 피초로 보는 동유럽 내 서구적 가치관의 종식

https://youtu.be/TA5nOOSRS4c?si=-WooWTxAckvd_DN_

얼마  슬로바키아의 선거가 끝났다. 원내정당 중 가장 승자로 꼽히는 것은 42석을 얻는 사회민주당일텐데 동유럽에서 굉장히 이게 지금 화젯거리가 되고 있다. 바로 이 사회민주당이라는 정당의 당수 로베르트 피초가 대놓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을 중단하고 러시아에 대한 제재 또한 하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LGBT를 공개적으로 반대한다고 얘기했기 때문. 이는 경쟁 정당이자 리버럴 세력인 진보 슬로바키아당과도 사뭇 다른 행보라고도 볼 수 있으며 사회민주당이라는 이름을 걸고 있는 정당이 친러는 몰라도 LGBT 반대 얘기하는 것은 특이하게 보일 법하다.


슬로바키아는 그동안 13대의 MiG-29를 우크라이나에 인도하여 EU로부터 2억 유로(1억 7,500만 파운드), 미국으로부터 7억 유로 상당의 군사 지원금을 받는 등 우크라이나 지원에 있어서도 상당히 적극적인 나라였다. 그러나 폴란드 두다 대통령의 무기 지원 단 선언 여파가 가시기도 전에 슬로바키아에 친러 성향 정부가 들어서게 생긴 판국이 되었고 또 LGBT를 혐오한다고 하는 등 유럽연합의 정서와는 도저히 맞지 않는 듯한 입장을 내보이는 이가 유럽 국가들이 러시아로부터 자국을 지키는 전방인 동유럽의 국가의 지도자가 될 가능성이 높아졌으니 서방 세계 입장에서는 꽤 골치이긴 할 것이다.


이번에 승리를 거둔 사회민주당이라는 정당의 당명을 보고 "어? 친서방 리버럴 정당 아니야?"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텐데 일단 서유럽과 동유럽은 정치 지형 자체가 천지차이다. 왜냐면 슬로바키아 사회민주당의 뿌리는 다른 정당도 아니고 바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이기 때문. 그러다 보니 구좌파 특성에다가 동유럽 특유의 강경한 보수성에 맞물려서 서구의 사회민주당과는 달리 문화적 자유주의에 호의적으로 보일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슬로바키아 사회민주당은 경제적 사회민주주의 성향이기에 좌파 정당으로 볼 수도 있지만은 반이민, 반LGBT 성향을 표방한다는 점에서 유럽 우익 대중주의 정당과도 상당히 접점이 큰 편이다. 실제로 사회민주당의 주된 협력 대상은 국민당이라는 우익 대중주의 정당이다.

현재 여러가지 연정 시나리오가 고려되고 있는데 일단 사회민주당이 연정을 주도하여 그 속에 다른 정당들이 가담하는 형태가 될 확률이 높다. 다만 슬로바키아의 새 정부는 오르반, 두다와 함께 유럽연합의 혼란을 더욱 가중시키는 듯한 행보는 어느정도 내보이지 않을까 싶다. 물론 사회민주당이 압승을 거두지 못해 연정을 해야 하는 특성상 오르반처럼 막나가진 못하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슬로바키아의 총선 결과가 의미하는게 있다면 점점 유럽연합의 장기적인 전망이 좋지 않아지고 있다는 것에 있다. 유럽연합의 이단아 오르반을 시작으로 폴렉시트의 두다, 그리고 슬로바키아의 피초까지 유럽 방위를 담당하고 연합의 가치를 더 널리 퍼트려야 할 동유럽 국가들의 지도자들이 이탈하고 있는 상황이다.


결국 1989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동유럽의 민주화 실험은 서서히 실패를 향해가고 있는 것이고 슬로바키아 총선에서 친러 성향의 정당이 승리한 건 쐐기를 박은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떠오를 만한 의문이자 이 글의 주제 의식인 왜 동유럽은 민주화를 스스로 쟁취했음에도 다시 돌고 돌아서 권위주의적이거나 그토록 혁명 당시에는 유럽을 열망했음에도 정작 지금은 유럽회의주의 성향의 정치인을 지지하려 하나, 인데 내가 생각하는 답은 1989년 동유럽 전반의 민주화라는 것 자체가 서유럽의 엘리트 민주주의를 그대로 계승한 덕분에 중산층 지식인 중심의 자유민주주의로 이행하였고 그 결과 민주화라는 본질보다 서구화라는 것에 주객전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민주화 이후 동유럽의 상황은 내리막길을 걷는 중이다. 특히 2008년 금융위기는 그것의 극단적인 사례였다. 탈냉전 흐름 속에서 서구는 동구권의 실패로부터 배우지 못했고 그렇게 동/서 유럽은 같은 유럽연합에 속해있지만 실상은 동유럽이 서유럽에 병합된 꼴이 되었다. 동유럽의 민주화 운동 속 시위들은 단순히 직선제 요구가 아니라 교육과 의료 등 사회주의가 약속한 이상을 제대로 실천하라는 의미에서 들고 일어난 것이었고 그 이상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체제를 변화시켜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 들어선 자유민주주의 정권도 공산주의가 왜 무너졌는지에 대한 검토가 부족했고 승리한 쪽마저 퇴행하게 되어 동유럽 자유민주주의가 이전의 공산 정권만도 못한 상황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실제로 동유럽 공산정권의 붕괴 이후 동서유럽의 통합으로 느슨한 유럽정부가 생겼지만 그곳의 결정권은 오로지 지배 카르텔에게만 있었다. 즉 유권자의 의사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과두제이며 선출되지 않은 사람들이 주요 기능을 하는 건 소련 공산당과 비슷할 지경이다. 유럽 전체를 자유민주주의로 전환시킨다는 사명을 가진 초민주적 기구 유럽연합은 정작 내부가 민주적이긴 커녕 자기들만의 헌법으로 일부 국가들의 반론과 반기를 내정 간섭까지 해가며 찍어눌렀다. 소련 시절 브레즈네프의 "제한주권론"을 떠올리게 하는 유럽통합의 실체는 마치 카를 슈미트가 자유주의는 다원주의와 중립성을 내세워 탈정치화를 추구하여 정치에서 적과 동지의 구분이라는 이분법을 거부하지만 그 폐기 시도 자체가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전제하고 실천하는 것이라고 한 말과 일맥상통한다.


사실 동유럽이 민주화의 탈을 쓴 서구화를 거부하는게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위에서 언급한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시점이었다. 서구화가 "진보"였던 것에 회의감이 퍼지기 시작했고 그 서구화의 해법대로 신자유주의, 개방 경제를 했으나 어차피 당시 동유럽은 공산권의 관료주의, 부패라는 잔재가 이어진 채 경제 체제만 자본주의로 바꾼 사회였다. 결과적으로 오히려 복지만 축소되고 정부가 파산 위기를 맞으며 민주화 이래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던 서구의 진보적, 자유주의적 가치가 과연 무조건 정답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한 신자유주의 정책의 실패로 인한 비참한 상태에서 동유럽의 시민들의 서구적 가치관에 대한 믿음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흐름의 선구자에 있었던 인물이 바로 헝가리 총리인 빅토르 오르반이다. 오르반은 공산 정권에 맞서 싸우던 민주투사였던 만큼 처음에는 서구의 가치관에 호의적이었으나 사회당의 긴축정책을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하며 성향이 바뀌었고 2010년에 집권함으로써 동유럽에 권위주의, 전통적 보수주의 세력이 다시 들어서기 시작했다. 오르반은 민주화 이후 동유럽의 대표 정책들인 자유화, 탈규제, 민영화 정책들에 반기를 들며 경제 주권을 앞세워 유럽연합, 다국적 기업, IMF에 저항하겠다고 선언했다. 또 유럽연합 중심 정책에서 벗어나 민족과 국가의 자율성을 요구하기 시작해 외자 제공을 빌미로 한 내정 간섭에 맞섰다.

오르반의 결과는 어느정도 성장하는 걸로 이어졌다. 금융위기로 바닥쳤던 경제는 다시 되살아났고 코로나 이전까지 무리없이 성장했었다. 실업률도 낮아졌고 국가 부채도 줄어들었으며 일률 과세를 채택하고 전기요금과 수도요금 같은 공공 요금을 인하했다. 금융, 연금 기관들의 국유화도 추진되었고 공공 일자리도 크게 늘렸다. 무엇보다 동유럽에서 가장 심각한 저출산 국가였던 헝가리가 2012년 1.23명대 출산율에서 현재는 1.56명대로 올라가며 동유럽 국가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출산 정책을 선보였었다. 2022년에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폭등한 에너지값, 식료품 값을 동결하고 2월에는 25세 미만의 청년층의 개인 소득세를 면제 및 군인과 경찰관을 대상으로 급여를 인상을 시켰다. 실업자들에게는 한화로 약 35만 원 가량의 기본소득을 지급했는데 이것 덕분에 그해 선에서 여당 피데스는 압승을 거뒀다.


(오르반에 대한 평가는 권위주의적 통치, 잦은 외교적 마찰, 부패는 심화, 민주주의 훼손 등으로 안좋게 보는 쪽과 반대로 국방력과 전반적인 경제 상황, 인구 관련 지표들을 개선했다는 이유로 높게 보는 쪽으로 극과 극으로 갈리는 편이다.)


이어서 집권한 것은 폴란드의 안제이 두다였다. 두다 대통령은 법과 정의라는 강성 우익 정당 소속으로 오르반과는 달리 친미 반러 성향이었지만 국내에 있어서는 경제적 개입주의 노선을 취할 때는 확실하게 취하고 유럽연합의 가치를 거부하면서까지 자국 내 보수성에 호소하는 전략을 상당히 많이 사용했다. 폴렉시트 논란을 비롯해 LGBT 관련 탄압 법안들을 제정하며 유럽연합과 그렇게나 크게 갈등을 빚었다. 폴란드는 유럽 방위선의 최전방 방패막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루마니아는 어떨까? 이곳도 1989년 당시에 비해 상당히 복고지향적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위대한 루마니아인" 투표에서 추축국 진영에 가담하여 홀로코스트에도 참여한 친독 성향의 군사독재자 안토네스쿠가 10위권 안에 들어갔던 것을 시작으로 루마니아 역사상 가장 최악의 지도자로 꼽혀서 금기시되던 "유럽의 김일성"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라는 지도자에 대한 재평가조차도 종종 나오는 중이다. 어떤 설문조사에서는 절반 이상의 응답자들이 차우셰스쿠 시절이 생활수준이나 직업 안정성 등의 측면에서 지금보다 좋았다고 인식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 실제로 Isogep의 2018년 여론조사에서는 64.3%의 루마니아 국민들이 차우셰스쿠에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결과도 나왔다. 루마니아에서 민주화가 막 이뤄질 때 공산정권에 대한 혐오감이 극에 달했었던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결국 개만도 못한 시절이라 평가받던 정권이 그립다는 여론이 대부분일 정도로 민주화 이후 동유럽의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그만큼 개판이었다는 것의 증표이기도 하다.


동유럽 민주화 시대가 점차 저물어가고 있다. 2010년대 중반까지는 기껏 해봐야 오르반 정도만 유럽연합의 이단아였고 2019~2020년도까지는 폴란드의 두다가 발톱을 드러내기 시작한 정도였지만 이제는 체코와 함께 중부유럽 중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에 앞장서는 국가인 슬로바키아에서 유럽연합의 우크라이나 지지, 대러제재 참여 촉구, LGBT 옹호 등의 행보에 반감을 가진 정당이 총선에서 이겼다. 물론 오르반, 두다와는 달리 좌파 정당, 정치인이긴 하지만 내놓은 사회문화적 법안들이 죄다 반이민, 반동성애에 치중하고 있는 점은 그들 또한 유럽통합의 가치에 회의감을 느끼는 일종의 동족(?)이라고 볼 수 있는 증거이기도 하다.


오르반에서 두다로, 피초로 이어지는 동유럽 내부 속 일련의 반 유럽통합의 흐름들과 안토네스쿠 또는 차우셰스쿠 같은 독재 시절에 대한 향수는 앞으로 더욱 가속화될 가능성이 높다. 이미 2008년 금융위기에서 동유럽 국가들은 직격타를 맞은 상황 속 서구 국가들의 권고대로 긴축 정책을 펼치고 대대적으로 민영화 했다가 엄청난 피를 봐야 했고 그걸 보고 국민들은 전통적 보수주의자가 되거나 아니면 아예 공산 정권 시절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이는 서구적 가치관이 동유럽 국가들에서 종식되어버려서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한다는 걸 의미하며 우익 대중주의에 반대하는 좌파 시민들조차도 공산주의에 향수를 가지면 가졌지, 결코 1989년 민주화 직후 당시처럼 서구에 막연한 환상을 가진 사람들이 비중이 크게 줄었다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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