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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Oct 18. 2023

체첸 분리주의자들의 흑화와 몰락이 상징하는 교훈

체첸 반군으로 보는 소수민족 독립운동과 테러리즘의 경계

https://youtu.be/ALpjLYFjSjM?si=_gvc9wODAcA9iqZF

최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온갖 유혈 사태들이 곳곳에서 벌어지는 중이다. 물론 이스라엘이 그동안 무리하게 정착촌 건설을 밀어붙였던 것이나, 더 나아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건국 과정 자체의 문제를 생각한다면 당연히 지금 이 지경이 된 것에는 그들의 책임도 크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시점에서 이스라엘보다 범죄 행위 측면에서 더 크게 비판을 받고 있는 건 바로 하마스다. 분명 하마스라는 억압하는 강국에 맞서 싸우는 분리주의자 무장단체 특성상 팔레스타인의 독립이라는 명분이 컸고 그거 덕분에 충분히 정당성을 확보할 요건이 있었지만 이미 민간인들을 저렇게 죽여대는 영상을 대놓고 본인들 스스로 틱톡에 올린 시점에서 그 있던 명분조차 다 증발해버렸던 것이다.


하마스의 이러한 잔혹성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처음 보는 반인륜적 행태인 것처럼 경악한 거 같은데 나는 사실 이거 외에도 분리주의자 무장단체들이 흑화의 극단을 달리며 테러리즘으로 최소한의 독립이라는 명분조차 날린 사례가 중동 지역의 윗동네 캅카스에도 있었던 걸 알고 있었다. 그건 바로 몇백년 간의 러시아의 폭압 통치에 저항하는 독립군을 내세우며 출발했으나 이내 곧 한낱 테러리스트들로 흑화해버린 체첸 반군이다. 글 내용을 끝까지 읽어보면 알겠지만 오늘 주제로 다룰 체첸 반군의 모습은 놀랍게도 지금 하마스가 보이고 있는 행보와 너무 유사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어느정도의 정당성을 가지고 출발했으나 수단이 목적을 잡아먹어버리며 괴물이 되었다는 점에서 말이다.


체첸이라는 지역의 역사부터 알아보자. 체첸인들은 캅카스 지역의 민족인 나흐족의 일파 중 하나인 부족이다. 이들은 예전에 노흐치라고 불렸는데 13세기에 캅카스 지역에 침입해온 몽골계 킵차크 한국에 저항을 했지만 결국에는 많은 피해를 입고 지배를 받았다. 하지만 이 시기에 노흐치들의 저항은 훗날 체첸인들의 저항적인 민족성이 형성되는 것의 기원이 될 만큼 중요한 것이다. 한편 16~17세기 이후 오스만 튀르크 제국이 이슬람권의 맹주로서 영토를 넓히면서 캅카스 지역도 오스만의 영향권 안에 들어왔는데 이때부터 노흐치들도 이슬람교를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한편 러시아는 예카테리나 2세 집권기 동안인 1772년에 오스만과의 전쟁을 통해 캅카스 지역으로 본격적으로 남하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캅카스 지역에 요새를 짓고 병참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아울 지역의 지도자였던 셰이흐 만수르는 이슬람교 신자로서 "침입자들을 몰아내기 위한 지하드를 수행하기 전에 이슬람 율법을 준수하자"는 메세지를 전파하며 마을 주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이걸 몰랐는지 1785년 러시아군은 피에리 대령이 이끄는 부대를 마을로 진입시켰는데 만수르는 대충 예상을 하고 이미 주민들을 마을 밖으로 대피시킨 후였다. 텅 마을에 진입한 러시아군은 마을을 약탈한 후 후퇴했는데 이로써 만수르는 러시아 제국의 의도를 확실하게 파악했다. 그래서 곧 바로 지하드를 선언하고 퇴각 중인 러시아군을 순자강 인근에서 기습하여 몇백명이 넘는 병사들을 사살했는데 이 전투는 체첸과 러시아의 대립이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으며 이때부터 체첸이라는 말이 러시아에서 쓰이기 시작한다.


1813년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러시아는 다시 캅카스 지역에서 더 남진해 아제르바이잔까지 장악했다. 1816년에 예르몰로프 장군은 그는 블라디카프카즈를 거점으로 순자강을 따라서 새로운 요새선을 구축하여 그로즈니 지역의 방어태세를 보강하였는데 그 과정에 그곳에 사는 체첸 주민들을 내쫓았다. 이에 주민들은 1820년대부터 다시 러시아에 맞서 무장투쟁을 벌이게 되었는데 예르몰로프 장군의 공포감 조성식 진압에 결국 체첸 저항세력은 산악지대로 밀려나게 되었다. 하지만 저런 대응은 너무 당연하게도 오히려 억압받는 체첸인을 비롯한 캅카스 주민들의 단결력만 키워줬고 니콜라이 1세의 캅카스 지역에 대한 통치방식은 더욱 더 강경해졌다.


이때 러시아군은 기습과 매복을 사전에 방지한답시고 마을들을 초토화 시키며 토벌전에 나섰고 체첸인들은 이맘 샤밀이라는 새로운 지도자를 중심으로 뭉치면서 예전 셰이흐 만수르의 저항이 실패했던 것을 반면교사 삼아 전면적인 전투보단 소모전과 게릴라전 위주로 러시아군을 지치게 하는 전략으로 맞섰는데 이는 무려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이어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국 1859년 샤밀은 러시아군에게 붙잡히고 유배 당하면서 이 저항도 실패했다. 1850년에는 쿤타 하지라는 인물이 수피즘을 전파하고 다녔는데 여기에 많은 주민들이 동조했다. 그러자 러시아 제국 정부는 이들이 셰이흐 만수르나 이맘 샤밀처럼 무장투쟁을 조장할 것을 우려했는지 곧 바로 그를 구금시켜버렸다. 이에 하지의 추종자 약 3천명은 항의하는 집회를 가졌는데 그 과정에 러시아군은 그들이 단도를 착용한 것을 공격으로 간주해 총기를 발포했다. 이로인해 쿤타 하지의 추종자 그룹은 사실상 와해 되었고 그들의 토지는 러시아 제국 정부에 의해 몰수 당했다. 그렇지만 수피즘은 이후로도 체첸 민족운동에 큰 영향을 끼친다.

1917년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가 붕괴되고 러시아 전역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 틈으로 체첸 분리주의자들은 독립 국가를 건설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하지만 1918년 데니킨 장군이 이끄는 남러시아 백군이 캅카스 일대로 남하하였고 그들은 모스크바 공략이 실패한 이후부터 지역 주민들의 물자와 인력을 징발하면서 갈등을 빚는다. 이때 백군은 다케스탄을 점령하고 캅카스 산악공화국을 강경히 때려부쉈다. 그 후 백군은 적백내전에서 패배하였고 이어서 소비에트 적군이 들어왔다. 레닌은 '러시아 내 이슬람교도'에 대한 성명서를 통해 모든 이슬람교도의 권리를 보장해준다고 선언했지만 정작 몇년이 지나자 샤리아 법정은 인민 법정으로 바뀌었고 1929년에는 스탈린의 농업 집단화 정책이 체첸 지역에도 적용되기 시작하는 등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또 대숙청의 여파에 체첸 역시 피해가지 못했다.


결국 반소련 감정이 극심해진 체첸인들은 1941년부터 벌어진 독소전쟁 시기에  캅카스 지역에 진출한 독일군에게 협력했고 그 대가로 소련 당국은 강제 이주를 시켜버리게 된다. 강제 이주는 1943년부터 시작되었고 1944년 2월 29일, 내무인민위원회의 수장 라브렌티 베리야가 스탈린에게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고산지대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 걸쳐서 강제 이주 정책이 시행되어 약 50만명이 달하는 인구가 화물열차에 실려 쫓겨났다고 한다. 물론 스탈린 사후 흐루시초프가 집권하면서 되돌아왔지만. 이것이 현대까지 이어져오는 체첸 내 반러시아 감정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지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자, 여기까지만 본다면 체첸 민족은 피해자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체첸인들이 저항 운동을 했다지만 실질적으로 체첸인들에게 피해를 가장 많이 입힌 건 러시아였고 애당초 제정 러시아 시절 캅카스 일대로 남하하면서 모든 문제가 발생한 만큼 소련 시절까지는 분명히 러시아 측의 책임이 훨씬 크다고 볼 여지가 있다. 체첸의 독립은 1980년대 말 소련군 장군 출신 조하르 두다예프를 중심으로 바이나흐 민주당이 창당되면서 구체화되었는데 이들은 단순히 자치권 확대를 넘어 소련(이후 러시아 연방) 벗어나 주권을 가진 독립국가가 되는 것을 원했으며, 아직 이때까지만 해도 체첸 독립세력 내에서 이슬람 원리주의적 성향은 크게 드러나지 않았었다. 어쨌든 두다예프의 주도 하에 체첸 분리주의자들은 소련 공산당의 8월 쿠데타의 혼란을 틈 타 정부청사와 방송국을 점거하고 체첸 지역 소비에트의 서기장 자브가예프를 무너뜨리며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마침내 독립에 성공했다.

1992년 5월, 파벨 그라초프 장관과 체첸 사이의 협의를 통해 체첸 영내의 러시아군이 철수할 때 남기고 간 무기들은 체첸 무장세력에게 있어서 커다란 자산이 되었다. 하지만 이 무기들은 혼란 속에서 민간에도 흘러가게 되었고 두다예프 정권이 총기소지를 허용해주는 결정타를 때리며 체첸 내 범죄 발생이 급격히 늘어가며 치안은 엉망이 되어버리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사실상 이때부터 두다예프라는 인물이 독립국가의 대통령으로 깜냥이 안되는 인물이었다는게 잘 드러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고 실제로도 두다예프는 공화제 국가의 국가원수라기 보다는 전형적인 군벌 지도자에 가까운 모습만 보였었다.


두다예프가 말한 경제 역시 문제가 많았다. 두다예프 대통령은 취임 하면서 "석유는 우리를 제2의 쿠웨이트로 만들어줄 것"이라며 당당하고 자신있게 선언했지만 정작 체첸 경제의 중요한 기반인 석유 생산량은 오히려 격감했다. 또한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의 충격으로 인해 실업률은 40% 수준이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중동 국가들과 소규모 월경무역을 했지만 오히려 러시아 연방으로부터 밀수지역이라는 비난의 명분만 갖다주는 꼴이었다. 무엇보다 체첸 경제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러시아인들이 '토박이 민족'이 아닌 지역 거주민을 추방하는 법이 제정되면서 빠져나간게 굉장히 치명적이었다.


1차 체첸전쟁 도중 두다예프가 사망한 이후에 집권한 아슬란 마스하도프라는 인물도 딱히 더 나을 것은 없는 지도자였다. 내부적으로는 마스하도프 정권은 두다예프에 비해 리더쉽이 많이 부족했었다고 평가받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체첸 정규군 외에도 각종 무장세력들이 난립하며 군벌화 되어갔다. 특히 살만 라두예프가 이끄는 부대들은 두다예프 전 대통령 경호병들까지 흡수한 상태였었다. 그리고 이 각종 무장세력들이 난립하는 상황은 곧 강경파들의 폭주로 이어졌고 마스하도프 정권은 바사예프, 라두예프, 알 하타브 등 강경파 군벌 지휘관들을 통제하는 것에 실패해버렸다.


그리고 마스하도프 시기가 체첸 반군의 이슬람 극단주의화가 진행되기 시작하던 시점이기도 했다. 비록 두다예프는 대통령 선서를 하면서 쿠란에 손을 얹고 "쿠란에 대고 맹세하지 않는 자는 새로운 체제 하에서 조직의 지도자가 될 권리가 없다."라고 밝히는 등 이슬람교에 친화적인 태도를 보이긴 했으나 적어도 그는 소련 공산당에 입당할 정도로 무신론자였으며 체첸전민족회의의 주도로 나온 국가주권에 관한 선언 제4조는 "공화국 국민은 종교신앙 관계없이 평등하다"고 분명히 명시하고 있었다. 1992년 1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두다예프는 "나는 국가를 이슬람적 원칙에 따라 만들지 않을 것이다"라고 확실하게 선을 그었기도 했고 더 나아가 울라마평의회로부터 샤리아에 관한 의견 표명을 요구받았을 때 응하지 않은 채 샤리아 문제를 심의하는 일 자체를 거부하기도 했었다. 이는 이슬람에 친화적인 언행을 하여 체첸 민족주의 정서를 강화 및 정권 유지를 하는 것과는 별도로 세속 국가를 지향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두다예프가 죽고 각종 군벌들이 난립하게 되면서 체첸 내부에 그나마 있었던 세속주의는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특히 무자헤딘 용사 출신의 이븐 알 하타브가 이끄는 캠프는 공식적으로는 체첸 정부 기관이었지만 실질적으론 개인 사병이나 다름 없었다. 바사예프와 합동으로 게릴라 전 교육, 테러리스트 교육, 중화기 교육 등을 캠프에서 진행하였고 갈 수록 체첸 내부에 이슬람 원리주의가 확산되어가고 있는 것에는 이러한 배경의 영향도 결코 작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마스하도프는 견제하고자 하였지만 해외 이슬람 조직들로부터의 자금 지원을 받고 있는데다가 체첸 내 강경파인 샤밀 바사예프와의 우호 관계를 맺고 있었던 이븐 알 하타브의 독자 세력화를 두다예프보다도 유약한 마스하도프가 막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게 체첸의 강경파 군벌들은 마스하도프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마구잡이로 날뛰게 되었다. 1995년부터 샤밀 바사예프 장군과 체첸 결사대원들은 러시아 남부 부됴노프스크 지역의 병원을 점거하고 인질극을 벌이며 100명이 넘는 민간인들을 쏴죽이는 사건까지 벌였던 전력이 있었던 만큼 그들은 거리낄게 없었다. 그 결과 1998년과 1999년 동안 아르비 바라예프, 람잔 아흐마도프, 살만 라두예프 같은 체첸의 과격주의자들은 러시아를 상대로 자꾸 납치와 테러들을 계속 벌여댔고 심지어 옐친 정권이 특사로 파견한 블라소프마저 1998년 5월에 납치하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마스하도프 정권은 아예 다 포기했는지 바사예프가 하자는대로 샤리아법 도입하면서 대놓고 이슬람 국가임을 선포한 것은 덤이고.


체첸 반군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1999년 8월, 러시아 연방의 구성국인 다케스탄 공화국에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지하드를 선포하며 침공했다. 이들을 이끄는 건 체첸 내에서도 강경파로 꼽히는 샤밀 바사예프와 무자헤딘 참전용사 출신인 이븐 알 하타브였고 이 침공의 목표는 체첸과 다케스탄 지역을 아우르는 이슬람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이어서 9월에는 러시아 내 주요도시들에서 대규모 테러가 벌어졌다. 이 테러로 수백명의 무고한 민간인이 죽거나 불구가 되었고 주거지들도 상당수가 파괴되는 참사로 이어졌고 이게 그 유명한 2차 체첸전쟁이 벌어져 체첸의 수도 그로즈니가 푸틴에 의해 초토화되는 일의 원인이 되었다.

2차 체첸전쟁에서 반군들은 이른바 "체첸 클리어"라고 불리는 러시아군 포로들을 잔혹하게 참살하는 영상들을 이곳저곳에 유포했고 그래도 그 전까지 강대국에게 억압받는 약소민족이라 동정이 간다던 여론 자체가 크게 들어가게 되었다. 인종청소를 마구잡이로 했던 "발칸의 도살자"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조차도 죽였다는 흔적 자체를 최대한 지우려고 했고 그 히틀러도 홀로코스트를 외부에 공표하지 않았다는 걸 생각하면 체첸 분리주의자들의 이 행동은 명분을 깎아먹는 것은 물론이고 적들의 분노와 국제여론의 외면까지 불러오기 딱 좋은 것이었다. 저러한 체첸 반군의 공포심 확산 목적으로 한 공개적인 참살 영상 유포는 오늘날 하마스가 보이고 있는 범죄 행위와 목적이든 행위 자체이든 상당히 유사한 부분이 많다.


한편 체첸 세력은 무자헤딘의 영향으로 어느덧 '민족 해방'이라는 목표가 '이슬람 국가의 수립'으로 바뀌어갔다. 2000년 3월, 1천명의 체첸 반군들은 러시아군 진지를 기습하였고 그해 5월에는 원격 폭탄을 이용해 즈베르예프 장군을 살해하는 등 체첸 반군 세력들은 기존의 산악 게릴라 전 외에도 이젠 테러 전술까지 적극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2001년 11월, 러시아군에 의해 가족이 사망한 가즈예프라는 체첸인 여성이 러시아 장군인 가드지에프를 자살폭탄 공격으로 죽였다. 또한 다음달에는 러시아군을 향해 폭발물을 실은 트럭을 몰고 돌진하던 15세의 체첸인 소녀가 총에 맞아 사살되었고 그 외에도 각종 자살폭탄 테러들이 2002년까지 러시아에서 여러번 벌어졌다. 이후 2002년, 그리고 2004년에는 목표 달성은 커녕 러시아의 강경한 때려잡을 의지를 키우거나 체첸 반군의 민낯을 제대로 보여주며 저 밑까지 이미지가 추락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첫번째 사건은 2002년 1월에는 모스크바 극장에 들이닥친 40명의 체첸 테러리스트들이 민간인 700명을 인질로 잡는 사태였다. 이때 체첸 테러리스트들은 체첸 공화국에서의 러시아군의 철수를 요구했지만 러시아군은 강경 진압으로 방향을 잡고 극장 내에 독가스를 투입했다. 독가스의 투입으로 체첸 테러리스트들은 제압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인질로 잡혔던 민간인 100여명도 같이 희생당하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사건 과정에서 러시아 스페츠나츠의 민간인 인질을 고려하지 않았던 강경 진압은 체첸 반군의 인질극 이상으로 많이 비판받았긴 했으나 이 사건으로 체첸 측이 얻은 것은 없었고 러시아 정부의 강경한 진압 의지만 재확인되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 일은 2년 뒤에 있었던 2004년 9월, 북오세티야 공화국 부근의 베슬란 학교에서 벌어지는 참극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당시 베슬란 학교는 30명의 무장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약 1,000명의 인질들이 붙잡혔는데 이때 인질 중에서는 어린이들이 많았고 이후 특수부대를 중심으로 진행된 인질구출작전과 체첸 테러리스트들의 마구잡이 살해로 인해 300명이 넘는 사망자발생했다. 베슬란 학교 사건의 또 다른 특징은 그동안의 체첸 반군 방침을 바꿔서 그냥 민간인도 아니고 어린이들을 타깃으로 삼았다는 것이었으며 결국 이건 같은 체첸인들마저 사건을 주도한 바사예프와 그들의 잔혹성에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심지어 2002년 모스크바 극장 인질극 사태 때까지만 해도 체첸 테러리스트들은 인질을 가급적이면 죽이려 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마구 쏴대며 학살극을 벌였다는 것.


당연히 이러한 강경파의 테러 행위는 안 그래도 체첸을 조질 생각으로 가득차 있던 러시아 정부를 자극하는 짓이었기에 러시아와의 협상을 바라는 체첸 반군 세력 내 온건파들의 영향력은 갈 수록 축소되었다. 결국 2005년 2월, 온건파의 핵심인 아슬란 마스하도프가 러시아와의 마지막 교섭에 실패하고 다음달에 스페츠나츠에 의해 암살당하면서 체첸 반군 내 온건파는 사실상 와해되고 말았다. 베슬란 학교 사건을 계기로 서구권 내 체첸 분리주의 운동을 소수민족의 독립투쟁으로 바라보던 여론이 아예 다 죽어버렸고 이슬람권에서조차 체첸 반군을 독립군이 아닌 테러리스트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렇게 체첸 반군은 억압자에 맞서 독립 국가를 세운다는 목표로 출발했지만 그 과정에서 목적보다는 수단이 우선시되었고 결과적으로 그 수단에 잡아먹혀 뭘 위해 싸움을 시작했는지 목적조차 잊어버린 괴물로 변해버렸다.

체첸 반군의 타락은 체첸 주민들의 외면을 불러왔다. 2차 전쟁 이후로도 러시아에 적개심을 드러내던 체첸인들은 여전히 많았지만 반군들이 체첸의 독립을 핑계로 어린이들마저 거리낌없이 죽이는 광경을 보며 점차 그들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2003년 여론조사에서 응답자 중 3분의 2에 이르는 사람이 체첸은 러시아의 일부로 남아있어야 했으며 2003년 이후 계속 연구된 바에 따르면 여전히 러시아의 일부로 남길 원하는 응답이 80%를 넘는다. 또한 러시아 연방 내 체첸 공화국 지도부가 알하노프에서 람잔 카디로프로 정권이 바뀐 이래 실시된 2008년 여론조사에서는 카디로프를 신임한다는 체첸인들의 응답이 87%에 이르면서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나 블라디미르 푸틴을 넘어서기도 했었다. 이는 2000년대 들어서 러시아의 경제가 성장세에 접어들면서 나타나는 결과이기도 하다.


또 그거 외에도 카디로프는 2006년부터 2007년 사이에 대규모 사면 프로그램이라는 당근책을 던져줬고 예상대로 많은 반군들은 자수를 선택함으로써 목숨을 건지며 러시아에 빌붙어 체첸 민중을 탄압한다는 프레임을 어느정도 벗기도 했다. 아이러니한 점이 더 있다면 납치혼 같은 야만적인 풍습이 당연시 될 정도의 이슬람 근본주의에 씨족 사회가 결합된 형태였던 체첸 지역의 오랜 전통을 끝낸 것은 다름 아닌 카디로프 정권이었고 러시아의 압력 탓이었지만 가문 간의 알력 다툼도 21세기 이후 크게 약화되었다. 무엇보다 러시아 정부에 충성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체첸어를 중시하는 정책을 펼치거나 민족주의 정서, 이슬람교 정서에 부합하는 당근책도 민중에게 제시하고 있는 점도 있고.


그러나 근본적인 이유는 두다예프를 비롯한 분리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았던 1990년대가 너무 혼란과 살육, 부패로 점철된 끔찍한 시기였다고 체첸 주민 본인들이 스스로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러시아군 또한 2차 체첸 전쟁에서 그로즈니 시 자체를 초토화시키는 전술을 펼쳤고 많은 민간인들을 살상하는 짓을 하기도 하였으나 그래도 최소한의 규율이나 정규군이기라도 했던 러시아군이 적어도 마구잡이로 살육에 미친 체첸 반군보다야 낫다고 느꼈기에 그런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당장 1990년대 초반부터 체첸에서 지하경제는 이미 통제불능의 상태였던 것만 봐도 체첸 반군들이 행정에 있어서 소련 말 공산당 지도부 이상으로 무능했다는게 뻔히 보이기도 하고.


2006년, 체첸 반군의 사령관이 된 도쿠 우마로프는 드디어 대놓고 본인들의 목표는 자유민주 국가의 수립이 아니라 샤리아 법으로 통치되는 이슬람 국가라고 밝히며 다음해에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을 캅카스 에미레이트로 개편했다. 이 시점에서 체첸 반군에게 아주 약간의, 궤변으로도 사용될 만한 명분까지도 완전히 전멸해버렸다 봐도 과언이 아니고 독립이건 민족해방이건 어떠한 대의도 없이 그저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폭주를 멈출 수 없는 광신적인 살인기계, 테러조직으로 완전히 타락해버렸다. 도쿠 우마로프는 2014년에 죽었고 나머지 잔당들은 IS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발악하다가 망했다. 이러한 체첸 반군의 사례는 독립국가를 세운다는 이상적인 목적으로 출발한 민족해방운동 조직들도 심연을 들여다 보다가 본인들도 그 심연에 물들어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될 수 있다는 걸 잘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체첸의 사례에서 알 수 있는 점이라면 독립운동과 테러리즘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도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은 강력한 명분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을 계속 했고 방식도 체첸 반군이 했었던 현대의 소프트 타깃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 테러에 비해서는 매우 온건하고 또 특정 대상을 골라서 했기 때문에 테러리즘이 아닌 독립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고. 그러나 한국이나 몇몇 국가들을 제외한 보통 제3세계의 민족해방운동들은 처음에는 확고한 명분과 기반을 갖추고 시작하지만 그 끝이 너무 안좋은 경우들이 많았기에 어디까지가 독립운동이고, 반대로 테러리즘의 범주는 어느정도로 잡아야 하느냐 논쟁이 생기는 거다.


체첸 반군의 실패는 결국 독립, 민족해방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강대국에 의해 짓밟힌 소수민족 분리주의 세력이라 해서 마냥 언더도그마적 관점으로 그들을 옹호만 하면 안된다는 걸 잘 보여주고 있다. 체첸 반군 뿐만 아니다. 21세기로 넘어가면서 테러의 대상이 소프트 타깃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민간인을 무차별 살상하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으며 오늘날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마구잡이로 날뛰다가 러시아의 싹을 말리는 초토화 작전과 이에 대한 국제사회의 묵인을 불러왔었던 체첸 반군이 그러했듯이 최소한의 명분까지도 상실하여 모두에게 외면받는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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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옥, <체첸-러시아 갈등의 역사에 관한 연구>, 국제지역학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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