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이후 서방 세계와 자유주의 진영은 침공의 주체인 러시아를 향해 역대급 대규모 경제제재를 가했다. 스위프트에서 러시아를 퇴출시킨 것은 물론이고 가즈프롬 등 러시아 산업의 돈줄 역할을 하는 기업들의 자금줄을 차단하려 한 것이었다. 당시 미국 정부는 1년 만에 러시아 경제를 반토막 내서 전쟁 수행 능력 자체를 박살낼 수 있다고 호언장담까지 했었다. 그러나 역대급 강경한 봉쇄 조치와 러시아의 국제사회에서의 고립화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끝나기는 커녕 러시아의 경제 기반조차도 무너뜨리지 못했다. 이 부분에서 서방 세계가 1년이 넘는 기간에도 러시아를 굴복시키는 것에 실패했음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러시아라는 나라가 자원 부국이라 자급자족이 어느정도는 가능한 탓도 있겠지만 더 큰 이유는 애초에 미국 주도의 경제 제재에 동참하지 않는 나라들이 더 많기 때문일 것이다. 대표적인 나라만 해도 중국과 인도가 있는데 이 두 나라가 전 세계 시장에서 차지하는 규모를 보면 미국, 서방세계만으로 러시아의 경제를 초토화 시킨다는 것은 원래 불가능한 전제였음을 알 수 있다. 인도는 러시아산 원유의 가격이 크게 하락한 틈을 노려 굉장히 싼 값에 대량으로 사들이고 있는 중이고 이렇게 국내에 수입한 석유를 한번 정유해 되팔아서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 중국은 어떠한가? 중국 역시 러시아산 원유와 가스 수입을 큰 폭으로 늘리며 경제 협력 강화를 더욱 강화시켰다. 덕분에 경제제재로 세계 시장에서 고립되었다는 러시아는 에너지 수출에 의한 수입금이 아이러니하게도 유가의 인상으로 인해 늘었고 이것이 러시아의 전쟁 경비를 지탱해주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삼성 전자가 빠진 러시아 시장은 다 중국 기업들이 먹어버렸다. 삼성제 스마트폰이 전쟁 발발 및 대러 제재에 대한 한국 정부의 참여로 인해 러시아에서 철수하게 되자 그 빈자리는 중국 IT 기업들이 들어와서 장악해버렸고 한국 기업 뿐만 아니라 미국계 기업 빈자리 역시 차이나 머니가 전부 독식 중이다. 유럽 국가들의 경우에는 겉으로는 대러 제재에 참여하고 있는 실정이지만 정작 뒷구멍으로는 러시아산 에너지를 끊지 못한 채 우회적으로 수입하고 있으며 대러 제재를 주도하는 미국도 이를 함부로 제어하지 못하고 있다. 아프리카 국가들 역시 러시아산 곡물들을 계속 수입하고 있는 상황이며 이쯤되면 사실상 대러 제재는 서방과 러시아 간의 경제 루트"만" 끊었을 뿐 근본적으로 중요한 제3세계와의 관계 및 에너지 자원에 대한 자금줄을 자르지 못했다는 걸 알 수 있다.
러시아 원유 수입국 그래프와 러시아에 대한 각국의 입장 통계
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과연 전 세계적으로 혐러 감정을 불러왔는지도 의문인 게 일단 대다수의 제3세계 국가들은 러시아를 둘러싼 국제사회의 분쟁에 대해 중립을 지키고 있는 중이다. 특히 이코노미스트의 분석에 따르면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서방 세계 국가들이 주도하는 러시아에 대한 봉쇄 정책을 지지하는 나라들의 인구는 전체 지구 인구의 36.4%로 소수에 속한다. 그러니까 서방 세계의 부국들만이 대러 제재에 참여하고 지탱하고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전쟁이 시작된 지 1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현재 남미, 아프리카, 동남아시아의 개발도상국들은 러시아에 관한 문제에 대해 중립 혹은 친러적인 입장 기조를 보이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 제3세계는 "자원민족주의" 흐름으로 변화하는 중이다. 그들은 자국이 가진 자원을 전략적으로 활용하고 지역별로 경제 블록화를 시도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데 이 흐름의 대표 주자가 룰라가 주도하는 남미 연합과 중동 지역의 사우디 빈 살만 왕세자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빈 살만 왕세자는 그동안 전통적인 서방 세계의 에너지 공급망 기조를 유지시켜 왔던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에서 이탈하면서 러시아, 중국하고 손을 잡고 있는 중이다. 미국의 확장 재정 기조와 통화량이 증발하면서 전세계 경제는 물가 상승의 고통에 빠져있는데 이는 유가 안정 실패와도 연관이 있다. 유가가 안정되야 물가가 잡히고 금리를 내려 경기를 활성화시킬 수 있지만 문제는 유가가 내려갈 때마다 사우디 중심의 OPEC과 러시아가 공조하며 원유 생산량을 계속 감축시키고 있다는 것.
최근에 브릭스에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이란, 이집트, 에티오피아, 아르헨티나 등 6개국이 가입하게 되었다. 원래는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의 국가들이 주도하던 국제기구였는데 이제는 추가로 6개국이 들어와서 11개국이 가입된, 마치 제3세계의 G7로 발전된 형국이 되었다. 게다가 아직 가입되지 않은 40개 국가들까지 브릭스라는 기구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상황이다. 이번 확대로 브릭스는 세계 GDP의 37%, 원유 생산의 43%, 세계 수출의 25%, 또 세계 인구 측면에서는 46%까지 성장하게 되었는데 이로써 세계 시장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특히 브릭스에 새롭게 가입한 회원국들의 대부분이 친미 성향이 아닌 국가들로 미국과 틀어진 사이이거나 혹은 반미 성향까지도 가지고 있는 쪽에 더 가까운 상황이다.
보통 원유는 통상 달러화로 결제가 이뤄지는데 그 때문인지 국제유가와 달러화는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그렇기에 사우디아라비아나 이번에 가입한 중동 산유국들이 자국 통화나 위안화, 루블화 같은 브릭스 회원국의 통화를 사용한다면 전세계 금융시장에서 달러화의 가치에 변동이 생길 확률이 크다. 이미 브릭스 회원국들이 자국 통화 기반 결제 수단 및 플랫폼의 출시를 검토 중이라는 얘기도 있고 지난 1년간 러시아, 중국, 브라질이 무역 거래에서 비달러화 및 탈달러화 정책을 확대해왔었기도 하다. 그러니 이 속에서 브릭스는 세계 경제 성장, 무역 및 자본 투자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높은 편이고 무엇보다 전 세계 석유 생산량의 12.9%를 차지하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중국과 100억 달러의 투자 계약까지 맺는 등 자본 투자라는 측면에서도 블루 오션으로 여겨질 부분이 많다.
브릭스 통화 결제 시스템 구축과 미국의 반도체 지원법
덕분에 러시아, 중국 뿐만 아니라 서방 세계까지도 자유무역 기조를 버리고 보호무역주의로 돌아서고 있다.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 반도체 지원법이 대표적인 사례일텐데 이는 세계경제 자체가 금본위제를 버린 후로 실업률과 인플레이션을 도저히 잡을 수가 없는 지경으로 달려갔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미국 정부의 산업 정책의 기조는 내수 기업에 대한 보조금 지급과 해외 생산 제품에 대한 차별이 바탕이 되어 있는데 결국 이건 자유무역 체제 하에서 반도체 공급망은 중국, 대만, 한국, 일본 등이 미국과 협업해왔던 그동안의 체제를 갈아엎으려는 의도도 엿 보인다. 이러한 일련의 보호무역주의, 각자도생의 시대 흐름은 최악의 경우 우리나라가 그동안 취해왔었던 수출 주도 성장 기조에 매우 치명적인 악영향을 가져다 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국의 경제 구조는 타국보다는 수출에 의존하는 경향이 매우 크다. 이는 이때까지 경제성장을 이어오는 과정에서 자유무역주의, 세계화 흐름에 가장 큰 수혜를 입었던 나라 중 하나가 한국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2023년 오늘날 우리는 세계 정세가 각자도생의 시대로 변화하면서 이때까지 성장해왔던 방향성에 대한 중대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더 이상 기존의 방식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다면 미래가 어두워질 게 뻔해졌다는 얘기다. 이건 어떤 면에서는 다른 나라보다 수출, 무역에 대부분의 돈줄이 집중되어 있던 한국에게는 특히나 더더욱 치명적인 악조건인 셈이기도 하고.
중국은 세계 무역 시장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미국에게 철저하게 붙어서 대중 포위망의 최전선으로서 중국하고 물리적 충돌을 각오하면서까지 강경하게 나와야 한다고 하는데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물론 중국의 위협에는 다소 단호한 스탠스를 취할 필요가 있고 이에 대응하여 미국, 일본 등 서방 세계와의 안보적 공조는 필요하다. 그렇지만 과연 우리는 중국과 완전히 단절하고 영원히 안 볼 사이처럼 극한의 대립을 하면서 살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냉정히 말해 한국이 현재 가장 교역을 많이 하고 있는 상대는 중국이고 따라서 단순한 "착짱죽짱"식 반중 감정 때문에 전 세계 GDP의 18% 가량을 차지하는 중국과의 모든 관계를 끊는 것은 실익 관점에서 보면 감정적인 자해나 다름 없기때문이다. 즉 지난 정권이 무책임한 반일 외교로 무역분쟁을 일으킨 것이 부메랑으로 돌아온 것처럼 마찬가지로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는 경제를 정치적 이유 때문에 분리시키는 호전적인 반중 정책도 똑같거나 더한 결과만 가져올 것이다.
게다가 설령 친미 반중을 확고하게 취해서 100% 미국 편에 선다고 한들 미국이 과거 냉전 시대의 자유진영에 대한 지원 만큼 한국에 대해 수혜를 줄 지도 의문이다. 트럼프 재선의 문제는 둘째 치고 바이든의 기조나 미국의 상황만 봐도 훤히 보이는 게 미국의 이익과 한국의 경제적 이해가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실제로 순차적으로 아시아의 친서방 국가들은 미국으로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공장을 옮겨가고 있으며 심지어 삼성전자까지도 미 본토에 투자를 늘리겠다는 입장인 상황이다. 이렇게 되어 보호무역의 의도가 달성되었을 때 한국 기업이 미국에 진출하여 미 정부로부터 받은 보조금을 바탕으로 미국은 노하우와 기술력, 생산시설 접근권, 영업 기밀 등을 점차 확보한 뒤 그걸 바탕으로 미국의 생산력을 증대시킬 수 있게 된다. 당연히 브레튼 우즈 체제 하의 수혜자였던 한국 입장에서는 이득은 커녕 손해만 막심해지는 것이고.
각자도생의 시대의 기폭제가 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우리가 이렇게 세계가 다극 체제, 각자도생의 시대로 가고 있는 상황 속에서 할 수 있는 건 현실적으로 그저 조심스러운 외교 방식 말고는 없다. 외교 안보에서 기본적으로 당연히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와 보조를 맞출 수 밖에 없겠지만 그렇다고 중국, 러시아와의 관계도 최대한 척지지 않고 필요와 상황에 따라 북한에 대한 외교적 카드로 활용하는 정도로 하며 경제적 관계는 이어가는 게 나는 가장 그나마 현실적인 해법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우리는 서방 세계의 최전선에 있지만 중국과 경제적으로 매우 밀접한지라 지정학적으로 딜레마에 빠지기 쉬운 조건이기에 사드 배치, 한미 미사일 거리 지침 해제 수준의 꼭 필요한 안보적 조치가 아닌 이상 우리가 "먼저" 중국에게 안보적인 이유로 불필요한 도발을 해서 경제 분쟁으로 확전되는 일은 웬만해선 자제하는 게 맞다. 다 떠나서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의 성공 사례를 보거나김대중 정부가 당시에 햇볕정책을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의 기본 전제 조건이 미국, 러시아, 중국, 일본 4개국과 모두 원만한 외교 관계를 다졌다는 것만 생각해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 정작 정권에 따라 외교가 180도 바뀌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일례로 전임 정권 시절에는 지소미아를 일방적으로 파기하며 먼저 우방국을적으로 만들고무지성으로 동맹국보다 적국 혹은 적을 지원하는 국가를 먼저 편드는친북, 친중 외교에 몰두했다면 이제는 청개구리처럼 반대로 가겠답시고 중국, 러시아를 완전히 적으로 만들고 미국, 일본에 사대하는 수준으로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상태다. 한 마디로 운동권식 "우리 민족 끼리" 망상 외교에서 뉴라이트식 "일뽕" 사대 외교로 모양새만 바뀌었을 뿐이지, 사대주의나 진영논리에 입각한 망상이라는 측면은 전혀 변한 게 없다. 이 정도면 한국 정치에서 외교적 사안은 그냥 국내 지지층 만족시키는 용이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현재 세계 질서가 단극에서 다극 체제로 전환되며 각자도생의 시대가 되어가는 시점인데 우리는 도대체 조선 시대 예송논쟁이나 소중화주의에서 교훈을 얻긴 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