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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Nov 13. 2023

이란 중동 전략의 핵심, 핵개발의 역사

이란의 핵개발과 문명의 충돌

https://youtu.be/VxZ3ZxF5ov4?si=UTirIRnL9vOH95vt

이란의 핵개발이 공식적으로 구체화된 것은 2002년 반체제 단체의 폭로 때문이었다. 그 이후 이란은 NPT 당사국으로서 IAEA의 사찰을 피할 수 없었고 미국과 국제사회는 그것을 근거로 경제 제재를 강화하였다. 그러다가 오바마 행정부에 이르어 이란과 미국은 핵 협상을 타결하기도 하였지만 이내 트럼프가 집권하고 백지화 시키면서 사실상 결렬되었고 2020년 솔레이마니 암살 사건은 중동 정세를 한 때 극도의 긴장 상태로 만들어 놓기도 하였다. 현재는 바이든 이후 잠시나마 개선되는 듯 했으나 이란이 러시아와 밀착하고 2023년 가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까지 터지며 팔레스타인 지역의 문제를 넘어서 미국-이란 관계 악화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는 상황이 지금까지 이어져오는 중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런 상황이 하루이틀이 아니다 보니 툭하면 미국-이란 전쟁 떡밥은 나돌게 되는데 물론 현실적으로 이란은 아프가니스탄, 걸프전 이후의 이라크처럼 폭망한 허접국가가 아니라 엄연한 중동의 지역강국이기에 실제로 전쟁이 나긴 힘들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란에게 미국이라는 위협은 1979년 신정 혁명 이래 실제적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었고 주변에서 도움 받기에는 이란의 주변국들은 죄다 시아파에 적대적인 수니파 국가들이다. 특히 최근에야 사우디와 이란 관계가 좀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이란-이라크 전쟁 이래 걸프만 왕정 국가들과 이란 신정 체제 간의 사이는 불과 얼마 전까지 극도로 안좋았으면 안좋았지, 조금이라도 좋다고 볼 부분조차 없었다. 즉 반미 시아파 신정 체제인 이란이 가진 지정학적 환경이란 출발 시점부터 악조건이 꽤 있었던 셈.


그렇게 해서 이란은 정치적, 안보적인 동기로 핵개발을 추진하게 되었다. 사실 신정 체제 이전인 팔레비 왕조 시절부터 핵 프로그램은 시작되었었는데 당시에 팔레비 왕은 혁명 직전인 1979년 초까지 총 12기의 원자력 발전소 건설 목표 중에서 6기의 원자로 건설에 대한 계약을 완료했다. 이때까지 이란은 이라크와의 경쟁이나 중동 지역에서의 지역강국 패권 부상을 위해 핵 프로그램을 실시했을 확률이 높은데 그야 당시 이란과 미국, 이스라엘 관계는 지금과는 정 반대로 양호한 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이나 이스라엘한테서 이란은 특별히 안보적인 위협을 느낄 이유가 전혀 없었고 굳이 이스라엘을 견제한다는 이유가 설사 있었다고 한들 그건 부수적인 요소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란-콘트라 사건 당시 자금의 흐름. 이 사건은 미국 CIA가 적성국인 이란에 무기를 수출한 대금으로 니카라과 콘트라 반군을 지원하다가 1986년에 발각된 해프닝이었다.

그러나 신정 혁명 이후 이란에 대한 미국의 대외정책은 매우 적대적이었으며 1991년 걸프전과 2003년 이라크 전쟁은 이란의 입장에서는 미국의 선제타격에 대한 공포를 불러오기 너무 좋은 사례였다. 결국 그렇다 보니 이란에게 핵 개발이란 미국의 군사개입 혹은 내정간섭에 대한 가능성을 원천봉쇄하기 위한 수단으로 적합하게 느껴졌을 것이고 그렇게 이란의 핵개발은 정치적 동기에 안보적 동기가 추가된 것이었다. 또 개방경제 지향 여부에 따라 핵무기 추구 성향이 달라진다고 솔리젠(Solingen)이라는 학자는 지적한 적이 있었는데 먼저 개방경제 지향 체제의 경우에는 국제사회와의 통합을 위해 핵확산 비용을 우려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대표적으로 한국, 대만은 핵무기 추구 시 드는 정치적, 경제적 비용 때문에 개발이 막힌 케이스다. 그러나 반대로 이란 같은 케이스의 경우에는 폐쇄경제를 지향하기에 국제시장에서의 의존도가 낮아 경제 변환 안하고 핵무기 프로그램 해도 타격이 상대적으로 덜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이란은 핵개발에 나설 수 있었다.


아무튼 이란의 핵개발은 1980년부터 1988년까지 이어졌던 이란-이라크 전쟁 속에서 제대로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당시 이라크군은 1983년부터 쿠르드족과 이란군에 대해 화학무기를 사용하고 있었고 이란도 이에 맞서 1985년부터 대량살상무기 개발에 나선 것이 시초였다. 1987년 이란은 파키스탄의 압둘 카디르 칸 박사의 네트워크를 활용해 우라늄 농축기술 도입을 시작했다. 당시 이란은 파키스탄에 천만 달러를 지불하고 제1세대 P-1형 원심분리기를 수입하며 또 1989년에는 비밀 군사협정을 체결해 10년치 국방예산에 대한 대가로 파키스탄으로부터 핵 기술을 받아오는 것에 성공하였다. 이는 파키스탄 정부, 군부, 그리고 핵 기술자인 칸 박사가 적극적으로 도와줬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이란은 파키스탄으로부터 도입한 기초 장비와 기술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핵연료주기 완성에 필요한 기술이 부족했는데 1990년대에 가서 제공받을 파트너로 중국을 구했다. 중국은 플루토늄 생산시설, 우라늄 전환시설, 가압중수형 원자로 등의 수입이나 기술이전을 전제로 협의를 진행했지만 문제는 미국의 압력으로 교섭이 성사되지 못했다. 중국은 이란에 대한 핵기술 제공이나 원조가 핵확산방지조약에 규정된 평화적 목적을 위한 것이라 해명했지만 결국 1997년 장쩌민 주석의 방미를 계기로 대부분의 협력 사업은 취소되었다.

파키스탄 핵개발의 아버지 압둘 카디르 칸. 그는 리비아의 카다피, 북한의 김정일, 그리고 이란 신정체제의 핵개발 시도의 매우 중요한 조력자였다.

그 후로도 핵연료주기 기술을 받아올 다른 파트너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독일, 아르헨티나는 당연히 실패했고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에 이란 측에 건설업계나 일부 군수품을 지원해줬던 한국과의 협상도 미국의 반대로 실패했다. 다만 그 상황에서도 러시아와는 제한적인 핵 개발 협력과 기술이전 사업을 이어갔는데 그 성과가 1992년 원자력협력협정과 1995년 후속협정이었다. 덕분에 이란은 부쉐르 원자로 완성 외에 시험용 원자로나 핵연료 가공시설의 제공에 합의받으며 드디어 핵개발에 시동이 걸리나 했으나 문제는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옐친 러시아 대통령에 압력을 가해서 부쉐르 원자로 건설 이후 공식적인 협력이 중단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래도 이란은 포기하지 않은 채 비공식적인 루트로 러시아 과학자, 기관들을 섭외해 핵 프로그램을 이어갔고 파키스탄으로부터는 제2세대 P-2형 원심분리기를 제공받는 등 차근차근 기초를 다져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2002년 8월 이란 반체제 그룹의 기자회견에서 핵개발의 실체가 드러나게 된다. 그 전까지는 정황상의 증거만 있어서 대놓고 공식적으로 나서기가 애매했었는데 이 기자회견에서 이란이 아라크 지방, 나탄즈 지방에 중수 제조시설과 핵연료 시설을 건설하고 있다는 게 폭로되섰고 그해 12월에 의심되는 두 곳의 시설의 위성 사진이 공개되면서 사실상 기정사실화 되었다. 이란 정부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목적으로 건설되었다고 주장했지만 2003년 9월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우라늄 농축, 핵연료 재처리 활동을 한달 내로 동결하고 사찰받으라는 결의를 채탁하며 압박하기 시작했고 이란은 결국 10월 21일 영국, 프랑스, 독일과 우라늄 농축활동 중단 및 IAEA와의 추가의정서 체결에 합의하는 테헤란 선언을 발표했다.


이게 순식간에 합의를 봤던 이유는 당시 이란의 대통령이 개혁파인 모하마드 하타미였기 때문이었다. 하타미는 국가통제 완화, 민영화, 소득 분배 개선을 내세우며 "외국인 투자 유치 및 보호법"을 개정하고자 하였는데 이란 시아파 보수파로 구성된 헌법수호위원회가 외국자본 지배 우려를 앞세워 거부하기도 하다가 라프산자니 전 대통령이 개입한 후에야 절충하는 선에서 마무리 되기도 했을 정도였다. 위에서 개방경제를 지향하는 지도부가 정치적, 경제적 비용 때문에 핵무기 추구에 소극적일 수 밖에 없다고 지적하였는데 하타미를 이거에 대입해보면 설명하기 더 쉽다. 그런 요소의 일환으로 하타미는 대외관계의 악화와 고립을 우려해 서구 국가들과 협상한 것이었으며 그렇기에 상대적으나마 핵확산을 기피하려는 성향이 있던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이란에서 핵 문제 같은 대외전략의 실질적인 권한은 대통령이 아닌 성직자인 최고지도자 하메이니에게 있었고(지금도 그렇다) 그의 입장은 핵 문제에 대해 매우 강경했다. 또 동시에 미국은 이란에 대해 매우 강경한 태도로 접근했기에 대화가 쉽지 않았던 것은 덤이고. 따라서 훗날 이란의 대통령이 되는 하산 로하니는 당시에 이란측 대표로 나서서 서방세계와 협상을 했는데 우라늄 농축활동을 중지시키면서도 핵시설 유지와 핵능력 강화를 포기하지는 않도록 합의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이행과 해석을 모호하게 하는 파리 합의를 맺었다. 즉 하타미 입장에서도 국내외 상황을 모두 고려해야 했기에 이게 최선이었던 것이다.

혁명수비대 사령관 모함마디 자파리와 아흐마디네자드. 자파리가 아흐마디네자드의 개혁에 반발해 뺨을 때리는 하극상을 벌일 때 혁명수비대가 더 위인 구조 특성상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

이런 노력조차도 얼마 못가 무산되기 직전이 이르게 된 것은 2005년 대통령 선거에서 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가 당선된 사건이 발단이었다. 아흐마디네자드는 최초의 비성직자 출신 대통령으로 정부 보조금 및 무이자 대출 확대, 주택 2백만 호 건설 등의 공약을 앞세워 보수파와 빈곤층의 지지를 동시에 잡아 집권하였는데 그는 사우디 등 다른 중동국가에는 관계 개선의 여지를 뒀지만 미국과 이스라엘은 초강경 모드로 일관하는 지도자였다. 실제로 아흐마디네자드가 집권하자 바로 첫번째로 한 일이 국가안보최고위원회 위원장 겸 서구와의 소통 채널 담당이던 개혁파 로하니를 보수파 알리 라리자니로 교체한 것이었다. 재미있는 건 아흐마디네자드는 홀로코스트 부정이나 9.11 음모론도 제기한 적이 있었다는 것인데 사실 서구 정치인이 그랬다면 바로 매장감이지만 다른 곳도 아니고 이란이었기에 국제적으로만 문제가 되었을 뿐, 국내에서는 별 다른 후폭풍이 없었다.


아흐마디네자드는 "핵 주권론"을 앞세웠다. 2006년 나탄즈 농축시설의 봉인을 해제하고 우라늄 농축을 다시 재개했으며 결국 이는 그해 2월에 IAEA 이사회에서 이란의 핵개발 문제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회부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이란은 농축활동을 중단하지 않았고 유엔은 12월에 이란에 경제 제재를 가하는 결의 1737호를 채택하여 국제사회를 통해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이란은 2009년 9월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포르도 우라늄 농축 시설 건설을 IAEA에 통보하기도 하였는데 이때 IAEA는 농축한 우라늄을 핵무기용 연료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보고하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의 이란 성인 1,002명을 대상으로 한 미국 랜드 국방연구소의 여론조사에서는 98%가 이란의 핵에너지 개발이 주권 문제라고 인식하면서도 대부분이 평화적 용도의 핵개발로 생각하고 있음이 드러나 아흐마디네자드의 핵주권론에 대한 이란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음이 확실해졌다.


동시에 이때부터 이스라엘과의 외교적 충돌이 극심해지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은 베긴 독트린을 비롯한 예방적 자위권을 앞세우는 국가이기에 이라크와 시리아의 원자로에 공습을 가해 오시라크, 알 키바르 원자로를 모두 파괴한 전적이 있었다. 이로인해 이라크와 시리아는 핵무장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지만 문제는 이란은 이 두 국가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이란은 처음부터 외부의 무력공격에 대한 방어태세를 철저하게 갖추고 있으며 핵물질 생산시설을 여러 곳에 건설하고 지하에 배치시켜 왔었다. 그렇기에 공습이 성공할 가능성 많이 낮을 수 밖에 없었고 더구나 이란은 시아파 멩주로서 중동 패권을 두고 싸우는 지역 강국이다. 그러니 이스라엘에 제대로 반격도 못한 이라크나 시리아와는 동일선상에서 비교하기가 힘들기에 군사적 옵션은 불가능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사회에서 알빠노 식으로 나오는 이란의 핵개발은 자국에도 악영향이 매우 컸다. 이란에 대한 경제제재는 점점 포괄적인 범위로 넓어져만 갔으며 이는 이란과 정상적인 거래를 하는 제3국의 기업이나 금융기관도 틀어막어버려서 돈줄 자체를 끊어버릴 작정으로 한 것이었다. 왜냐면 이번 이란 제재는 미국 뿐만 아니라 유럽연합과 유엔이 모두 동참하는 것이었고 그 결과 원유수출을 비롯한 교역이 급속도로 봉쇄당해 이란은 외화 부족과 물가 폭등으로 심각한 경제난을 겪게 되었다. 특히 아흐마디네자드 정권 초기까지는 고유가 덕분에 경제가 성장세였기에 이란 국민들의 생활 수준이 떨어지는 속도는 급격했다. 이 뿐만이 아니라 당시 이란은 원유 정제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자국의 석유 소비량의 절반을 수입해야 했을 정도니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아흐마디네자드 정권은 핵개발의 주체인 혁명수비대에 제재로 입은 손실을 석유, 가스 분야를 통해 정부 차원에서 배상해주는 등 자신의 대통령 당선에 큰 기여를 한 혁명수비대와 철저한 이권 카르텔 관계를 유지시켜 갔다. 애초에 대통령인 아흐마디네자드보다 더 위에서 군림하는 존재가 혁명수비대였으니 당연한 것이었지만.

이란 핵협상을 이끈 하산 로하니 대통령. 그는 개혁파였지만 국내적으로는 혁명수비대에게, 외부에서는 트럼프의 압박으로 양쪽에 끼어 레임덕에 빠져버렸다.

2013년 6월, 온건 개혁파인 하산 로하니의 집권으로 아흐마디네자드 주도의 강경 일변도 정책은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저 당시 이란의 경제 상황은 매우 심각하였는데 로하니 취임 당시 리알화의 가치는 급락 상태였고 실업률은 16%, 물가상승률은 42.3%까지 상승할 정도로 꼴이 개판이었다. 하타미 정권 당시 핵 협상을 이끌어낸 적이 있었던 로하니는 공기업 민영화, 외국인 투자 유치만이 경제 회복의 발판일 것이라 판단했고 따라서 핵 협상을 타결해 활로를 모색하고자 하였다. 이란은 2013년부터 포괄적 공동행동계획(JCPOA) 내용에 대한 미중러, 유럽연합 3개국과 개략적인 합의를 하였고 서서히 차근차근 한 단계씩 조치를 확대해가더니 2015년 4월에 가서는 오바마 대통령과 로하니 대통령은 역사적인 핵 협상 타결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미국의 입장은 180도 전환되어 버렸다. 취임 전부터 이란의 핵 폐기 의사를 신뢰하지 못했던 트럼프는 2018년 5월 JCPOA로부터 탈퇴를 선언했고 오늘날 2023년까지도 핵 협상은 성과를 보이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2019년에 미국은 이란의 핵 관련 과학자와 정부 관료들을 제재 대상으로 지정하였고 핵 개발 주체였던 혁명수비대를 테러조직에 지정하였다. 2017년 재선 당시까지도 로하니 대통령의 최대 치적으로 꼽히던 것은 JCPOA 타결과 경제 제재 해제였는데 미국의 입장 전환은 로하니라는 이란 내부의 온건 개혁파의 입지를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렸다. 결정적으로 2022년 바그다드에서 쿠드스군 사령관 솔레이마니 장군을 드론으로 암살한 사건은 이란의 강경파들, 특히 혁명수비대의 권력을 더욱 키웠고 이는 라이시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훨씬 더 호전적으로 나오게 될 확률이 높아졌다.

올해 초 이란의 우라늄 농축 84% 의혹에 관련된 블룸버그의 보도

현재 이란은 제조 직전의 농도 83.7%에 이르는 고농축 우라늄의 입자를 보유하고 있는 상황인데 핵무기 개발 속도를 끌어올린 결과 이란이 마음만 먹으면 2주 만에 핵폭탄 1기 분량의 핵분열성 물질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에 도달했다는 IAEA의 진단까지 있을 정도이다. 참고로 실제 핵무기 제조에 사용되는 우라늄 농도가 90%인 점을 보면 거의 무기급 수준까지 오른 것이다. 이에 AP통신은 농축도가 84%에 달하는 우라늄은 이란이 마음만 먹으면 핵폭탄 하나를 곧 생산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물론 아직까지는 북한 정도의 보유 단계에 도달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고 이란 정부도 고의로 농축된 게 아니라 의도치 않게 변동되었을 가능성도 있다며 선을 긋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벌어진 이래 이 흐름의 배후에 이란이 있다는 의혹들이 터져나오는 것도 모자라 중동 전체로의 확전 우려까지 나오고 미국과의 대화가 잘 풀릴 가능성이 점점 낮아지고 있는 상황이라 이란은 앞으로 더 강경 반서방화에 박차를 가할 것 같다.


호메이니를 이어 두 번째 최고지도자가 된 알리 하메네이는 "국제사회에서 이란의 친구는 없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는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미국, 소련, 걸프 왕정 국가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국가들이 이라크를 지원하며 이란을 국제적으로 왕따로 만들었던 일이 원인이 되었을 것이고 이란이 핵무장에 집착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지금 중동은 뇌관을 누르면 언제 폭발할 지 모르는 세계 최악의 화약고가 되었다. 그리고 헤즈볼라, 하마스, 인민동원군으로 이어지는 이란 및 시아파 중동 전략의 핵심에는 핵 개발과 그것의 주체였던 혁명수비대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참고 문헌:


김태우, <이란 핵문제의 국제정치적 함의>, 한국국방연구원, 국방정책연구 21(1), 2005

양주희 외, <이란의 정부에 따른 핵 개발 기조 변화>, 지중해지역연구원, 지중해지역연구 25(2), 2023

김재희 외, <북한과 이란의 핵전략 비교연구: 비핀 나랭의 핵전략 이론을 중심으로>, 한국세계지역학회, 세계지역연구논총 36(4), 2018

이주희, <미국의 對이란 비핵화 전략>,  한국정치사회연구소, 한국과 국제사회 6(5), 2022

김은비, <이란 핵협정 복원과 관련국의 국내 정치>, 부산외국어대학교 지중해지역원, 지중해지역연구 23(4), 2021

김은비. <이란의 정권 안보: IRGC를 통한 군사화를 중심으로>, 명지대학교 중동문제연구소, 중동문제연구 20(2), 2021

이창위, <이란 핵개발 문제에 대한 국제법적 검토와 북한의 비핵화>, 서울시립대학교 법학연구소, 서울법학 26(4), 2019

이창위, <북핵 앞에 선 우리의 선택>, 궁리, 2019

다카하시 가즈오, <이란과 미국: 이란 핵 위기와 중동 국제정치의 최전선>, 한울아카데미, 2014

https://diverseasia.snu.ac.kr/?p=5559

https://apnews.com/article/iran-politics-international-atomic-energy-agency-israel-government-benjamin-netanyahu-45b623742bb6bd4c7314de7df6c3f1e9


이란 중동 전략 시리즈:


https://brunch.co.kr/@a346abd5a67a4ed/585

https://brunch.co.kr/@a346abd5a67a4ed/591

https://brunch.co.kr/@a346abd5a67a4ed/595

https://brunch.co.kr/@a346abd5a67a4ed/596

https://brunch.co.kr/@a346abd5a67a4ed/598

https://brunch.co.kr/@a346abd5a67a4ed/613


p.s. 사실 혁명수비대 편까지 쓰고 끝내려 했는데 생각나는게 있어서 2개 더 쓰고 마무리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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