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해방 직후 북한 지역에서도 남한이 그랬던 것처럼 군대 설립 준비를 목적으로 각종 준군사단체들이 난립하였다. 조만식 등의 민족주의 계열에서는 자위대가 대표적인 사례였고(그 일본 JSDF 아님)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은 이에 대항해 치안대를 설립했다. 또 빨치산파 세력들은 적위대를 밀었고 중국 공산당 계열인 소수의 연안파도 소군정 시대에 존재했지만 문제는 그들의 기반이자 군사조직인 조선 의용군이 광복 후에 한동안 북한 지역에 입성하지 못했다가 이들이 1945년 11월 무장해제 작업이 완료된 후에야 들어오게 되었기에 따라서 군사적 기반을 세력화할 만큼의 여건이 되지 못했다.
소련 군정 당국은 여기서 적위대를 확고하게 지지했다. 먼저 현준혁 죽음을 계기로 치안대를 적위대에 흡수시킨 것을 시작으로 조선 의용군 4,000명이 중국으로부터 귀국하는 과정에서 무장해제 시키는 등 김일성이 전면에 나설 환경을 만드는 것에 크게 애썼다. 그런 흐름 속에서 김일성과 빨치산파가 실권을 잡고 이에 협조한 소련파, 연안파 인물들이 공조해 연립정권을 구성하는 방식이 나타난 것이었으며 그 중 무장력을 갖춘 것은 빨치산파 뿐이었다. 그렇게 소군정은 빨치산파를 앞세워서 자신들이 주도하는 군대를 단계적으로 조직해 나가고자 했다.
그들이 첫번째로 한 작업은 바로 군사간부의 양성이었다. 1946년 2월에 개교한 김일성종합대학의 전신인 평양학원은 민주기지론에 입각한 북한 지역의 남침기지화와 더불어 공산정권 수립에 필요한 정치 간부 양성을 목적으로 하였고 또 다른 목적은 이렇게 키운 간부들을 바탕으로 훗날 세워질 인민군에서의 김일성 세력의 장악력을 키우는 것이었다. 따라서 평양학원은 김일성 개인에 대한 충성심을 바탕으로 동북항일연군 직계 인사들이 주도하였고 교육 실무진만 소련군 출신 한인들이 담당하였다. 이 평양학원은 비록 미소공동위원회 합의로 대놓고 군 간부 양성 기관을 표방하진 못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정치군사학교로서의 기능을 맡았고 북한군 창설의 주축이 된다.
특히 북한군은 간부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기에 다양한 각 조직의 간부들을 써먹으며 공산주의 이념을 주입할 통일된 군사교육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각 군 출신들이 입북하면 바로 평양학원에 입학시키도록 하였으며 단기간의 정치사상 교육으로 간부를 양성하려 하였다. 이들은 군대 뿐만 아니라 보안간부나 임시인민위원회, 각종 교육기관으로도 파견 나갔으며 또 학원 출신자 대부분의 북한군 창설 당시의 핵심 간부가 되어 남침 계획을 주도하는 인사들이 되었다. 평양학원은 사격술, 신체단련, 소련군 군사교리 교육도 중요한 업무였지만 동시에 당, 군, 정 실무업무에 대한 교육이나 정치사상 교육이 더 비중이 컸다. 그리고 1946년 6월에는 초급 간부 양성기관인 중앙보안간부학교가 설립되었고 이는 1948년쯤 가면 제1, 2군관학교의 창설로도 이어졌다.
1945년 10월 21일 소련군은 제25군 사령관이자 군정 사령관이었던 이반 치스차코프의 명령서에 의거해 보안대를 창설하고 노동자와 농민들을 중심으로 공산주의 사상이 투철한 2,000명의 인원을 선발했다. 당시 인원이 제한적이었던 것은 보안대가 치안 조직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김일성이 확고하게 군 세력을 장악하게 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이어서 11월에 북한군의 모체라 할 수 있는 보안대가 창설되었으며 1946년 1월에는 평양에 본부를 둔 각 도별의 철도보안대가 창설되었다. 7월에는 점차 병력과 기구의 규모가 비대해지니까 각 도의 철도보안대가 통합되어 북조선철도경비대로 개편되었다. 북조선 철도경비대는 13개 철도경비중대를 편성하였고 김일성은 소련 군정 사령부와 협의하여 8월 15일 보안간부훈련대대부를 창설했다.
이 보안간부훈련대대부라는 곳이 중요한 이유가 있는데 그건 바로 실질적으로 북한군 최고 참모부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주요 간부진들 또한 북한 내 군사 경험이 있는 실력자들로 구성되었으며 이처럼 단일 지휘 체제를 구축하면서 사실상 군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물론 이게 미소공동위원회 규정 위반이었던 것은 함정이지만. 아무튼 보안간부훈련대대부는 예하에 교도중대, 위생소대와 3개 대대를 두었고 1개 대대는 다시 4개 중대로 편성되었다. 또 3개 광역지역으로 분할하여 훈련소를 설치했는데 이 중대들을 모체로 하여 부대를 하나씩 확장해 얼마 후에는 지역별 여단 및 사단으로 키워나갔다. 특히 보안간부훈련대대부는 소련군으로부터 최신 장비를 제공받은 것 뿐만 아니라 일본군이 남기고 간 것들까지 그대로 써먹었으며 소련 군사고문단 지휘 하에 제식 훈련, 각개 훈련, 부대 단위별 전투 훈련, 전술학까지 전수받아 조선 국방경비대로 시작한 국군보다 훨씬 우위에서 시작할 수 있었다.
1947년 5월 기존 무장조직들은 북조선 인민집단군사령부로 개편되었으며 3개 훈련소는 사단과 여단으로 개편되었다. 이때부터 계급이 세분화 되었으며 개편한 지 약 9개월 만인 1948년 2월 4일에 드디어 오늘날 북한군인 조선 인민군이 창설된다. 창군 시 조선인민군은 보병 1사단과 보병 2사단, 제3혼성여단으로 구성되었으며 비행대대도 보유하고 있었다. 한편 해군의 경우 1945년 10월 수상보안대가 창설되었다가 동년 12월 해안경비대로 개편되었고 1947년 7월부터는 해안경비대간부학교를 설립했다. 이 학교에서는 함정의 기관 설비, 함상포, 해안포 등 전문 기술을 교육했고 후에 인민해군군관학교의 모체가 되었다. 해안경비대는 북한군이 아닌 내무성 관할 아래에 존재하다가 1949년에 가서야 민족보위성 예하로 편입되면서 조선 인민군 해군으로 발족했다.
공군은 1945년 9월 민간에 의해 조직된 신의주 항공대가 기원이다. 신의주 항공대는 원래 소련 군정이랑은 상관 없이 일본 나고야 항공학교 출신 이활을 중심으로 항공계 종사자들이 모여서 형성된 민간 단체였다 그런데 신의주 항공대가 점점 커가자 소련 군정과 조선 공산당 북조선 분국이 정치적으로 개입해 소련군 장교를 고문으로 취임시켰고 그렇게 요원들을 흡수했다. 이들은 1947년 북조선인민집단군 사령부 소속 비행대가 되었고 조선인민군이 창설하면서 비행대대가 되었는데 1949년 3월 김일성의 소련 방문 당시에 정찰기 20대, 전투기 100대, 폭격기 30대 등 총 150여 대의 항공기를 제공받아 6.25 전쟁 발발 전까지 공군 전력을 대대적으로 확충해왔다.
북한 정권 수립 이후인 1949년 후반에 가서는 북한군의 지상병력이 제1, 2, 3사단 등 3개 사단과 더불어 새로 편입된 국공내전 경험자들로 구성된 조선 의용군 출신 사단을 합쳐 5개로 키웠다. 전쟁 직전까지 새로 증편된 제4, 5, 6, 10, 12, 13, 15사단 등 7개 사단들은 각기 예하에 3개 보병연대와 1개 포병연대를 보유한 완편 사단이었으며 소련제 82mm, 122mm 박격포와 76.2mm, 120mm 야포, 45mm 대전차포와 SU-76 자주포 등으로 무장하여 상당히 강력한 공격력을 갖추게 되었다. 보병 외에도 북한군은 소련군으로부터 전차를 지원받아서 독립전차연대를 추가로 편성, 자체 기갑 전력을 1개 여단 증강하게 되어서 총 242대의 전차를 보유하는 수준까지 올랐다.
북한군의 편제도 알아보자면 비록 낙동강 전선 당시로 가면 소총사단은 병력이 3,000~5,000명으로 크게 급감했지만 적어도 전쟁 초기까지 완전 편제 소총사단은 병력이 1만 1,000~1만 2,000명이었다. 여기에는 대전차대대(14.5mm 대전차총 12정과 45mm 대전차포 4문 정비)와 대공포 대대(14.5mm 기관총 12정 정비), 공병대대, 통신대대, 정보 및 훈련대대, 의무대대의 대대급 부대와 정찰중대, 수송중대를 비롯해 중대 규모의 보급대, 수의부대가 포함되어 있었다. 포병연대는 76mm 포를 장비한 2개 경포대대와 122mm 곡사포를 장비한 1개 중포대대로 구성되었다. 각 포병대대는 각기 4문의 포를 가진 3개 포대로 구성되었다. 일부 사단은 76.2mm 포를 정비한 SU-76 자주포 36~45대를 장비한 대대가 있었다.
병력 2,500명을 보유한 3개 보병연대는 본부중대와 기관단총중대, 통신중대, 박격포 중대(120mm 박격포 6문), 포병중대(76.2mm 곡사포 4문) 대전차중대(14.5mm 대전차총 6정, 45mm 대전차포 4문) 증이 포함되어 있었다. 연대에는 총인원이 650명인 3개 소총대대가 있었다. 각 대대는 본부중대와 박격포 중대가 있었고 총인원이 150명인 소총중대가 있었다. 또한 각 소총중대는 총인원이 45명인 3개 소총소재로 구성되었으며 각 소대는 4개 분대가 있었는데 각 분대에는 경기관총을 1정씩 보유하고 있었다. 화기소대는 60mm 박격포 4문과 중기관총 4정을 보유했다. 인민군 소총여단은 보통 4개나 5개 소총대대와 1개 포병대대, 최소의 지원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인민군 육전대는 인민군 해군에 배속되어 기지경비대나 해안방어부대 임무를 수행했다. 그들은 공세적 상륙전을 수행하기 위한 부대가 아니었다. 다양한 경비부대는 최소한의 인원으로 작동시킬 수 있는 화기만을 보유한 경보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946년부터 꾸준히 빌드업을 해온 결과는 북한군이 개전 당시 시점에서 국군보다 확실한 우위에 서는 결과를 가져왔다. 북한군은 6.25 남침 개시 전까지 전투 준비가 완료된 총 10개 사단, 해군 3개 위수사령부, 공군 1개 비행사단을 주축하여 강력한 공격력을 갖춘 상황이었고 더 나아가 전체 병력 수도 국군의 10만 5,725명보다 두 배나 많은 무려 19만 8,380명이나 되었다. 전방 방어지역의 경우 국군 방어병력과 북한군 38도선 전개부대 병력을 비교한 피아병력 비율이 진짜 극악이었는데 주공 방향인 철원-의정부-서울 축선은 1 대 4.4였고 개성-문산-서울 축선 비율은 1 대 2.2였다. 조공 방향인 화천-춘천과 인제-홍천 축선은 1 대 4.1이었고 양양-강릉 축선은 1 대 2.25로 국군이 북한군에 비해 열세였다. 더욱이 개전 당시 국군 병력의 3분의 1이 외출했으니 실제 격차는 이보다 더 클 것이다.
장비 측면도 국군이 북한군보다 열세였는데 일단 북한군은 T-34 전차를 242대나 보유하고 있었지만 국군은 전차가 없었다. 또 이를 상대할 만한 대전차포도 부족했다. 그래서 개전 초기 개성-문산 전투에서 국군 제1사단은 105mm 야포로 곡사 형태로 포물선을 그어 포탄을 공중에 날려 적 전차를 공격한다거나 전차를 향해 수류탄을 들고 육탄 공격으로 파괴하는 시도도 꽤 많이 했을 정도로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었다. 당시 국군은 차량도 육군 8개 사단이 장비편제표의 52%만을 보유한 상태였고 이게 원할한 병력, 탄약 수송에 제한을 뒀다. 항공기는 말할 것도 없이 확실한 열세였고 북한군의 신형장비는 소련으로부터 예비 분량까지 받아놓았던 것에 비해 국군은 2차세계대전 때 미군이 쓰던 노후 장비를 인수받은 것을 그대로 썼고 그것마저 부족한지라 전쟁 초기까지 후방 부대나 학도병들은 M1 개런드가 아닌 일본제 99식 아리사카 소총을 주무기로 썼을 지경.
따라서 6.25 전쟁 발발 초기, 정확히 1950년 6월 25일 시점에서 북한군은 같은 사단이라 할지라도 전투력 면에서 국군 전투사단보다 확실한 우위에 있는 것은 당연하고 당장 실전 투입해도 문제가 없었을 정도라고 봐도 무방하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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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문, <6.25전쟁 공산진영의 전쟁지도와 전투수행>,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6
유용원 외, <북한군 시크릿 리포트>, 플래닛미디어,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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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호, <조선 인민군: 북한 무력형성과 유일체제의 기원>, 한양대학교 출판부,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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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도르 째르치즈스키, <북한과 소련: 잊혀진 인물과 에피소드>, 한울아카데미,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