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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Nov 27. 2023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 이야기

운게른은 과연 쓰레기 같은 미친 남작이었는가?

https://youtu.be/hB89XOb__XQ?si=qFemQ6CSTVFjQse5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보통은 "미친 남작", "정신나간 종교 이상주의자"라는 말이 생각날 것이고 한국 독립운동사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독립운동가인 이태준을 죽인 사람 정도라는 것도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운게른에 대한 인식은 사실상 부정적인 것을 넘어서 인지 자체가 매우 부족한 실정인데 아마 이는 적백내전, 몽골 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저조한 탓도 있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한국인 중에서 복드칸, 허를러깅 처이발상은 커녕 콜차크나 세묘노프 정도조차도 인지도가 거의 없기도 하고. 그리고 인식이 있는 사람들조차도 운게른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데 그렇다면 과연 몽골의 "미친 남작"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세간의 인식대로 중요성이 1도 없는 미치광이 싸이코패스라 볼 수 있는가?


먼저 동시대의 사람들이 운게른을 어떻게 인식했는지부터 보자. <서구의 몰락> 저자로 유명한 오스발트 슈펭글러는 운게른슈테른베르크가 죽은지 3년 후 그에 대해 "1920년 빠른 시간에 등장해 150,000명의 군대를 모을 정도로 성장했었던 운게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볼셰비키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지만 만약 그가 성공했다면 우리는 아시아에서 어떤 사건이 벌어졌을지, 오늘날 세계 지도가 어떻게 재편됐을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라는 표현을 남긴 바 있었다. 전쟁에서 패장이 되어 사이코패스라는 흑색 선전이 대대적으로 퍼지는 바람에 사실상 악마로 취급바던 사람치고는 의외로 슈펭글러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은 셈인데 이는 운게른이 단순히 잔인한 군벌 독재자가 아니라 나름대로의 사상적 지향점이 존재했었다는 걸 의미한다. 실제로 운게른은 자신에게 사형을 선고한 재판소를 불법적으로 차르 체제를 끌어내린 볼셰비키의 하수인으로 지칭하며 인정하기를 거부했고 딱히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었다.


운게른은 죽음에 초연할 정도로 용맹한 자였다. 1차세계대전 때부터 위험한 임무에 스스로 자원하던 그는 자신이 본보기가 되어 그들을 이끌곤 했으뫼 병사들과 함께 싸우고 음식을 나눠먹고 같은 지붕 아래에서 다 같이 잠을 청했다. 또한 세묘노프 같은 다른 백군 지휘관들과는 달리 운게른은 술 같은 사치품에도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 병사들과의 관계도 보자면 남작의 엄한 태도때문에 그는 병사들에게서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이었지고 실제로 실수를 저지르면 매우 가혹한 형벌을 받았지만 그와 같이 보상받았기에 믿고 충성하는 대상이었다. 따라서 수적으로나 장비 측면으로나 열세였던 상황에서도 운게른의 부대는 외몽골 지역의 중국군을 몰아낼 수 있었다.

운게른하면 따오르는 잔학 행위도 이미 절반 이상은 과장된 것이라는게 밝혀졌다. 물론 운게른 시기에 공포를 조성하는 방식으로 통치를 한 것이야 사실이긴 하지만 그의 통치기 동안 거리 청소와 위생 사업 실시, 수도 종교 생활 및 관용 장려, 국가 화폐 도입, 몽골 경제 시스템 개혁 등 나름 현대화 시도가 있었다. 또 운게른의 부대가 죽인 사람 수도 약 800명 가량인데 현대 기준에서는 학살자겠지만 적백내전 시기 다른 장성들에 비하면 이 정도는 양반이다. 볼셰비키만 해도 사회혁명당 같은 비볼셰비키 계열 좌익들이 파업하면 노동자일지라도 닥치는대로 죽였으며 약탈에서는 다른 백군 장성들인 세묘노프와 데니킨 등이 더 악명이 높았었고 콜차크마저도 학살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던게 현실이다. 즉 운게른이 동시대의 다른 지휘관들에 비해 유독 더 잔인했었던 사람은 아니었으며 물론 어쨌든 손에 피를 묻힌 건 사실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다른 군벌과 구별되는 또 다른 특징이 있었다.


그러한 운게른만의 정신은 대표적으로 군주제에 대한 집착을 꼽을 수 있겠다. 그는 1차세계대전기 러시아 차르에 충성을 맹세한 이래 군주제가 유럽에서 쇠퇴하는 상황에서도 군주제에 대한 집착을 놓지 않았으며 이런 생각은 전제군주제로의 회귀에는 다소 부정적이고 그 대안으로 국가두마를 통해 복고 여부를 결정하자거나 아니면 의회 중심의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던 다른 백군 세력 지휘관들과 충돌하게 될 정도였다. 그럼에도 운게른슈테른베르크 남작은 군주제가 모든 국민을 위한 유일한 합법적인 정부 형태라고 생각하는 고집을 로마노프 왕조의 붕괴, 청나라의 멸망 등의 상황에도 끝까지 유지했으며 이는 몽골 지역의 종교 지도자였던 복드 칸의 정치적 이상과 결합해 일본 전근대 시절에 비유하자면 운게른은 쇼군, 복드 칸은 천황과 같은 관계를 유지했다.


또 다른 운게른의 철학적 특징으로는 바로 그가 불교를 비롯한 동방 종교에 상당한 호감 혹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있다. 10대 때부터 티베트 불교와 힌두교 철학에 관심이 있었다는 설도 있고 어떤 추측으로는 가문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에 불교도가 되었다는 말도 있다. 사실 언제부터 불교 사상에 심취했는지는 제대로 확정된 사실이 드러나진 않았으나 그럼에도 운게른이 불교에 오랜 시간 매료되었던 것만큼은 사실로 보인다. 그는 1차세계대전 이전부터 몽골인들과 어울리며 살아왔었고 그 시절 몽골어에 유창하며 몽골 전통 의상도 입어왔었으며 더 나아가 떠난 후에도 현지 인사들과 연락망을 유지했다고 한다. 그런 맥락에서 훗날 운게른이 복드 칸의 부탁으로 적백내전 기간 중 중국의 외몽골 재점령 시도를 좌절시키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들어온 것도 복드 칸이 운게른이 요청을 보내면 받아들일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이탈리아의 전통주의 철학자 율리우스 에볼라는 운게른 남작이 동양으로 눈을 돌린 이유에 대해 "동방인은 자신의 영적 전통에 충실했고 현대 세계에 반항하는 자들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는데 실제로 운게른은 서구에서 허무주의를 경험하고 반대급부로 동방에서 깨달음을 얻게 된 쪽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니체는 서구에서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고 하이데거는 이에 동의했다. 따라서 신의 부재는 곧 인류가 더 이상 신을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이며 인간과 사물을 결집할 것 또한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은 점점 근본을 잃어가고 있다고 보던 하이데거의 에세이 "시란 무엇인가?"에서 말해주듯 신성함이라는 것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서구에 한정해서 보면 운게른 슈테른베르크같은 사람은 신이 사라진 이 세상에 홀로 쓸쓸히 남아있어야 했을 것이다.


볼셰비키 혁명은 그가 사랑하던 러시아를 분열시켰고 혁명으로 인한 공산주의의 확산이 그토록 혐오했던 영적 타락의 공포가 전반적으로 두드러진다고 느꼈었다. 페르디난드 오센도프스키도 볼셰비키 혁명과 러시아에서의 그 여파를 목격한 사람이었고 그의 저서 '우울한 동쪽의 그림자'에서 그는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광기와 살인이 어떻게 지옥의 문을 활짝 열었는지 설명하고 있다. 거기다 운게른 남작의 일대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는 발트해에서 외몽골로, 러시아 정교에서 몽골 불교로, 일개 병사에서 전장의 지휘관으로 점점 변해간다. 그에 따라 운게른의 종교관 또한 추상적인 신적 개념을 가진 루터교에서 성인을 기리는 정교회, 마지막에 가서는 수행을 통해 신적인 존재에 필적할 수 있는 불교로 신앙심이 옮겨갔다. 이는 즉 동방으로 향할 수록 그가 신적인 존재를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혁명은 문화를 말살하고 도덕을 말살하며 모든 인민을 파괴하는 전염병이고 반면에 종교는 인류를 더 높은 이상을 향해 인도한다"는 식으로 인식한 운게른슈테른베르크 남작은 분명히 종교와 혁명, 영성과 물질주의의 이분법을 믿었다. 후자는 인간을 "신성과 영적인 것"에서 더 멀리 떼어 놓는데 그의 관점에서 볼 때, 러시아 혁명은 기독교와 불교의 성서에서 모두 언급되는 하나의 중대한 대격변이었다. 운게른은 그것이 나타나서 진보의 수레바퀴를 되돌리고 신성으로 가는 길을 막았다고 했는데 그 말은 즉 이제 신의 심판의 날이 불가피할 것이기 때문에 러시아와 유럽 전체가 임박한 위험에 처해있다고 생각한 것이나 다름 없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운게른은 묵시론자였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여기서 자신이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고 이미 세상의 종말을 목격하고 있으며 궁극적인 파멸에서 인류를 구하는 것은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생각에 동기를 부여받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요한계시록으로 대표되는 워낙에 유명한 기독교의 종말론 뿐만 아니라 불교에서도 종말론도 은근 보이는데 부처님이 자신이 세상을 떠난 후 5천년 후에 자신의 가르침이 사라질 것이라고 직접 예언했기 때문이다. 그때 인류는 탐욕, 정욕, 폭력, 불경건, 성적 타락, 신체적 약점이 모두 극에 달하는 시대에 이르게 될 것이고 이에 종말의 시대 속 구원자인 미륵불이 출현하여 충실한 사람들을 어둠에서 새로운 새벽의 빛으로 인도할 것이라는 것이라는게 불교의 종말론이다. 그 점에서 운게른은 종말의 시대에 나타나는 메시아적인 인물 개념에 대해 의외로 인지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실제로 그는 티베트 오지에 존재한다는 유토피아인 샴발라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었다.


또한 운게른 남작은 오센도프스키에게 "러시아에 불교도 군단 조직"을 설립하여 인류를 수호하고 파괴적인 혁명에 대항하길 원했다는 언급을 남긴 적이 있었다. 그는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금욕의 조건, 여성에 대한 완전한 부정, 삶의 안락함, 사치에 대한 완전한 작별 또한 선언했다. 운게른을 보면 전투적인 불교와 결합하여 유럽의 성스러운 기사 시스템의 이상을 모방하고 싶어했다는 것이 눈에 보이는데 이는 그가 서구의 계몽을 질식시키는 영적 어둠을 추방하려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극도의 광신주의에 비추어 보면 완벽히 이해된다.

이에 대해 혹자는 인간이 고통받는 것에 익숙한 동시대 사람들에게조차 그의 잔혹함은 충격적으로 다가왔지만, 그럼에도 이것은 너무나도 인간적인 나약함과 오류를 떨쳐내기 위한 카타르시스적인 통과의례이지 않겠으며, 정신적 고양에 다가가고자 한다면 인간성도 포기할줄 알아야 하지 않느냐면서 운게른의 독특한 철학과 그가 이끌던 부대의 잔혹성을 연관짓기도 한다. 그 부분에서 운게른은 일방적으로 미친 놈이라기보단 다른 백군 지휘관들보다도 더 심오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던게 아닐까 생각한다.


오늘날에도 "미친 남작"의 유산은 이어지고 있다. 비록 백군 세력이었지만 운게른의 개입 덕분에 몽골은 중국을 몰아내고 아이러니하게도 독립 국가로 가는 첫걸음을 할 수 있었으며 몽골 제국의 부활은 실패했지만 진심으로 동방 문화에 관심을 가지던 그의 구상은 유라시아 통합에 조금이나마 거름이 되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러시아식 군주제를 복원시키려는 어리석은 시도도 하긴 했지만 어쨌든 운게른이 중국군을 몰아낸 덕분에 외몽골 지역은 중화권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그 후에 몽골 인민 공화국을 세우는 공산주의자들이 나올 수 있었던 배경이 있다. 마지막으로 운게른은 죽기 전 "나의 이름은 지독한 증오와 공포에 둘러싸여 그중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무엇이 역사이고 무엇이 신화인지 그 누구도 분간하지 못하리라"라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그 말이 사후에 악마화되어 다른 백군 지휘관에게서 찾아볼 수 없던 확고한 철학 등은 묻히고 그저 "미친 남작"으로 평가되는 걸 보면 자기실현적 예언이 된 셈이다.


참고 문헌:


https://de.m.wikipedia.org/wiki/Roman_von_Ungern-Sternberg

https://youtu.be/Vk6qJvAcO9w?si=mOebEOiuHyyCFzb0

https://www.quora.com/What-do-modern-Mongolians-think-of-the-Mad-Baron-Roman-von-Ungern-Sternberg-He-seemed-to-have-had-a-peculiar-fascination-with-Mongolia

https://weltenfeind.info/2023/02/02/the-white-god-of-war-baron-roman-von-ungern-sternberg-1886-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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