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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Dec 17. 2023

3당 합당: 대한민국 정치 구조 기틀의 탄생

한국 의회민주정 타락, 목적을 상실한 이합집산 정치의 원흉

https://youtu.be/dfCA4MgnpuM?si=J6Z-xiZJjghGMS_k

3당 합당은 1990년도 당시의 사건으로 거의 30년도 더 이전에 있었던 사건이었다. 당대에는 엄청난 충격을 선사했었던 대형 사건이었지만 워낙 한참 전에 있었던 일이고 나 역시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라 접점이라고 할 만한 것도 1도 없다. 그러나 3당 합당은 87년 민주화만큼이나 우리 정당 정치사에서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사건인데 이 사건을 계기로 여당과 야당간의 정파적 갈등이 다수당의 경우 수의 논리로, 소수당은 완력의 논리로 자신의 입장을 관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3당 합당을 시작으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국 정당 정치는 선거철만 되면 정당끼리 이합집산, 합종연횡을 빈번히 반복하면서 권력 획득에 몰입한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으며 결국 이는 정당에 대한 불신이 높아지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게다가 3당 합당 이전 13대 국회의 여소야대 정국은 의외의 사실이지만 혼란 요소가 많았음에도 정당정치, 특히 다당제 발전의 싹이 자라나게 할 만한 조짐이 많았었다. 그러나 민주화 초기 시점에서 3당의 이해관계에 따른 돌발적인 합당의 결과 그 이후 한국 정당정치는 3당 합당이 만들어놓은 경로를 따라 양당제 구도, 권력 획득 중심 정치 구조로 이어지게 되었다. 물론 20대 국회에서는 잠시 국민의당, 바른정당, 정의당 같은 제3지대가 힘을 얻기도 했지만 정작 얼마 지나지 않아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양자구도로 다시 원상복구되어 버렸다. 거기다가 지금 다시 나오는 이준석, 이낙연, 금태섭, 류호정, 비명계(원칙과 상식) 중심의 제3지대론 또한 말이 좋아 다당제 지향이지 실질적으로는 파편화된 양당 구도를 노리는 이합집산적인 성격이 더 강하기에 솔직히 이들이 다당제를 안착하게 한 것이라고 기대하는 여론은 별로 없다.


따라서 이 글은 총선이 다가오고 각종 제3지대 정당들이 다시 정계개편을 위해 나오는 김에 오늘난 한국 정치 구도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6공 초기 여소야대 정국을 대체하며 등장한 3당 합당이 어떻게 민주화 이후 정당정치 전개의 분기점이 되었는지 분석해볼 것이다. 또한 3당 합당의 주역인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이 어떤 이유로, 어떤 이해관계로 합당을 결정하게 되었는지도 살펴볼 것이며 3당 합당과 그 이후에 전개된 여러 가지 정치적 사건들이 오늘날 한국 정당정치의 양상에 어떻게 연결되었는지도 알아보도록 할 것이다.


아, 그리고 혹시나 헷갈릴 사람을 위해 미리 몇 번 나오게 될 용어의 약칭까지 적어놓겠다.


- 민주정의당(총재 노태우, 정부여당)=민정당

- 평화민주당(총재 김대중, 제1야당)=평민당

- 통일민주당(총재 김영삼, 제2야당)=민주당

- 신민주공화당(총재 김종필, 제3야당)=공화당

- 민주자유당(3당 합당으로 탄생한 거대여당)=민자당

- 김대중=DJ

- 김영삼=YS

- 김종필=JP

13대 총선이 만든 여소야대 정국


1988년 13대 총선은 기존 권위주의 체제 하에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여소야대 정국을 만들어냈다. 선거 직전까지 여당인 민정당은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노태우 정부의 실세였던 박철언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이었던 최병렬은 총선에서 전체 224석의 지역구 중에서 53%인 119개 지역구에서 당선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보고하였다고 하는데 문제는 결과가 전혀 예상 밖이었다. 물론 민정당은 원내 1당 자리는 지켰지만 전체 299석 중 과반수에 크게 못 미치는 125석(지역구 87석+전국구 38석) 밖에 못얻었다. 반면 야3당은 평민당 70석(지역구 54석+전국구 16석), 민주당 59석(지역구 46석+전국구 13석), 공화당 35석(지역구 27석+전국구 8석)이라는 주도적 위치를 노려볼 만한 결과를 얻어 모두 합쳐 164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여소야대 구조는 여야 정치인들 모두에게 생소했다. 과거 군사정권 시절에는 여당이 국회 과반수 의석을 차지했기 때문에 여야 사이의 타협보다는 수의 논리로 밀어붙이는 일이 잦았고 반대로 야당은 독재에 대한 저항을 명분 삼아 국회 안에서의 투쟁보다는 비제도적이고 비합법적인 수단을 사용하여 여당에 저항해왔다. 그러나 13대 국회의 여소야대 정국은 과거의 정당정치 패턴이 더 이상 적용될 수 없게 만들었는데 왜냐면 야당이 야3당의 공조만 만든다면 의정활동의 주도권을 쥐고 비제도적, 비합법적인 수단 없이 자신들의 의견을 의사결정에 반영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말은 즉 날치기, 밀어붙이기, 농성, 투쟁, 공작 같은 기존 정당정치의 관행을 이어가기 힘들고 대신 정책적 경쟁이나 타협이 핵심이 되었다는 것이다.


참고로 이에 대해서는 여야 정치인들 뿐만 아니라 노태우 대통령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13대 국회 개원 연설에서 노태우 대통령은 "수적 우위에 의한 집권당의 독주가 허용되던 시대도, 소수당의 무조건 반대와 투쟁의 정치가 정당화되던 시대도 지났다"고 말했으며 이 같은 말에는 야3당인 평민당의 김대중, 민주당의 김영삼, 공화당의 김종필 모두 동의하며 대화와 타협에 의한 정치를 강조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래서 1988년부터 1990년 3당 합당 이전까지 약 2년의 기간 동안 국회는 4개 정당의 타협에 의해 운영되었다. 일례로 1989년 노태우 대통령 중간평가 실시 여부 논란 당시에 민주당의 김영삼은 강력하게 중간평가 실시를 제기하였으나 반대로 평민당의 김대중은 노태우와의 회담을 통해 대통령에 대한 중간평가를 헌법 위배로 규정하며 정부여당을 지원했다. 이처럼 여소야대 정국은 야 3당 사이의 의견 차이도 존재했고 특정 야당을 배제한 상황에서도 나머지 야당과 여당의 소통이 얼마든지 가능했었다. 그래서 이때가 군사정권에서 민주화로 넘어가는 과도기였음에도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정치사에서 가장 여야가 의사결정규칙을 잘 지키고 물리적 충돌보다 대화를 통해 각자 얻을 수 있는 최선의 것을 얻어가던 시기였다.


노태우 정부 동안의 5공 청산 문제도 표면적으로는 여당인 민정당을 배제한 채 야 3당이 밀어붙이기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 원내 정당들 간의 타협의 산물이었다. 노태우 정권은 알다시피 12.12 사태의 가담자가 대통령이었기에 5공 청산은 민감한 문제였고 따라서 덮는 게 최선의 선택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5공 청산에 대한 국민적 열망이 높았고 노태우 본인 스스로도 5공 문제는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 정리하고 가야 할 문제였기 때문에 그대로 덮어둘 수만은 없다. 이 상황에서 야 3당이 주도적으로 5공 청산 정국을 형성하자 노태우는 이를 수용하는 대신 그 대안으로 수위를 적절하게 낮추는 것을 골랐다. 그리하여 1989년 12월 15일 노태우 대통령과 야 3당 총재간의 영수회담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의 국회 증언이 합의되었다.


일각에서는 아직도 노태우 정부의 5공 청산이 미흡하다고 비판하지만 나는 그래도 의의가 크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서로 상반된 입장의 민정당과 야당들이 대화로 양 극단이 아닌 중간지점의 합의를 보았다는 것 때문이다. 4개 정당은 5공 청산 문제에서 과거 권위주의 체제에서 자주 발생한 폭력 사태를 지양하고 서로 간의 타협점을 모색해 100%로 만족하진 못해도 최선의 결과를 얻었다. 그래서 이 관점에서 노태우 정부의 5공 청산 작업은 긍정적으로 재평가가 가능하다고 본다. 이렇듯 13대 총선으로 탄생한 여소야대 정국은 오늘날의 의미 없이 싸우거나 누군가의 방탄으로만 소비하는 국회와는 상반된 모습을 보였고 만약 이대로 갔으면 다당제 구도에 타협에 의한 정당정치가 자리잡을 가능성도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가능성은 1990년 1월 22일 갑작스러운 3당 합당 선언으로 사실상 차단되어 버렸다.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은 왜 3당 합당을 결단했는가?


우선 김종필과 공화당부터 이야기해보자면 그들은13대 총선에서 총 35석을 얻었기에 4당 체제에서 가장 적은 의석을 보유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공화당과 김종필의 주요 지지기반인 충청도는 인구가 비교적으로 적고 지지 역시 민정당의 TK, 민주당의 PK, 평민당의 호남만큼 절대적이지 못했기에 소수당, 캐스팅보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노태우 측으로부터 김종필의 오랜 꿈인 내각제 개헌을 전제로 한 합당제안이 들어오니 김종필 입장에서는 나쁠 건 없었을 것이다. 대통령제 구도에서 김종필은 PK와 호남이 확고한 김영삼, 김대중에 비해 단독으로 집권할 가능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는지라 그에게 최선의 정국은 내각제가 되어서 당내 전략적 중재자가 되어 킹메이커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잘 될 경우에는 노태우 이후 총리직에 오를 수 있는 것은 덤이고.


노태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번째는 민정계라는 파벌의 지속성을 위해서였다. 13대 대선은 양김의 분열 덕분에 노태우의 승리로 끝났지만 13대 총선은 양김에 이어 또 다른 김인 "JP(김종필)"까지 정계에 화려하게 돌아오게 되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상황에서 차기 대통령은 김영삼 또는 김대중이 거의 기정사실이었고 그래서 노태우 입장에서는 YS나 DJ를 포섭하여 아군으로 만드는 방법 말고는 없었다. 그러나 단순히 연합만으로는 김영삼이나 김대중이 노태우를 배반할 가능성이 존재해서 완전히 안전하지는 않았는지라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내각제를 꺼내들 게 된다. 내각제를 꺼내들면 여당의 다수계파가 민정계가 되기에 김대중이나 김영삼이라고 해서 자신을 함부로 대할 수가 없을 것이고 특히 같은 내각제 지지파인 김종필의 공화계까지 가세하면 노태우의 안전 또한 보장받게 될 것이었다.


노태우 입장에서 3당 합당의 두번째 이유는 국정운영의  주도권 문제였다. 여소야대 정국은 타협에 의한 정당정치가 진행되었지만 정작 민정당은 주도력이 약했고 대신 민주당과 평민당이 이끌어나가는 것에 공화당이 끼어드는 상황이었다. 노태우도 그렇지만 민정당 세력 입장에서는 여당의 권한이 막강한 5공 시절부터 정권을 잡아온 경험이 있었기에 야 3당에게 밀려나 수세적인 입장에서 "물태우" 소리나 듣는 상황은 결코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더구나 5공 청산 문제에서 노태우는 전두환의 반발을 무릎쓰고 야당에 타협적인 자세를 보였던 것과 김영삼, 김대중 같은 야권 정치인들을 영수회담에 불러 조언을 듣고 따르고 있는 모습은 5공 핵심 인사들에게는 불만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노동계와 운동권의 투쟁이 지속되고 경제 동력이 둔화되자 노태우 정부는 다시 치고 나가기 위해 국정운영의 효율성을 제고해야만 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은 여소야대 정국을 부수고 자신과 민정당에 익숙한 여대야소 정국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3당 합당의 주체가 민정당, 민주당, 공화당만으로 한정되었냐는 것에 의문이 들 것이었다. 전술했듯이 노태우와 민정당은 내각제를 추진하려 했고 이를 위해 개헌에 필요한 3분의 2의 의석수를 얻어야 했는데 그래서 나온 정계개편 시나리오가 민정당-민주당-공화당, 민정당-평민당-공화당, 민정당-평민당-민주당-공화당 총 4가지였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채택된 것은 이 중 평민당을 배제한 채 민정당-민주당-공화당이었다. 일단 평민당이 아니라 민주당으로 선택된 것은 이념적으로 YS가 DJ보다 오른쪽이었던 것도 있었으며 지역적으로도 경상남도-경상북도의 연합이 경상북도-전라도의 연합보다 덜 이질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민정당이 처음부터 평민당을 배제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던 게, 당장 노태우가 첫번째로 합당 대상으로 협상을 시도한 것은 김영삼이나 김종필이 아닌 바로 김대중이었다. 당시까지 김대중과 평민당은 김영삼의 민주당에 비해 더 정부여당에 우호적인 스탠스로 나왔었으며 국가보안법 개정 문제 스탠스도 민정당이나 평민당이 별 차이가 없었다. 그래서 노태우는 내심 김대중에게 기대를 했는지 청와대 영수회담 초청 때 얘기를 꺼내기도 하였으나 김대중 본인이 민주주의 후퇴는 수용 불가라며 거부했다. 사실 김대중 입장에서는 5공의 핵심 인사였던 노태우와 손잡기에 호남인들을 설득할 명분이 없긴 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김대중의 거절로 노태우는 결국 김영삼, 김종필하고만 손 잡게 되었다. 즉 원래 의도 자체는 호남을 고립시킬 생각은 아니었으나 이래저래 꼬이면서 결과적으로 영남+충청도가 호남을 포위하는 방향으로 가게 되었다는 것인데 그래도 훗날 김종필과 김대중의 DJP 연합 과정에서 박철언 포함 민정계 일부가 김대중과 협력하며 민정계와 동교동계의 동맹 구도도 아예 불가능하진 않음이 증명되었다.


한편 김영삼에게는 3당 합당 참여 이유가 노태우, 김종필보다 훨씬 노골적인 이유였는데 바로 대권을 잡기 위한 권력욕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김영삼은 13대 총선에서 라이벌 김대중의 평민당에 밀려 제1야당 지위를 상실한 상태였고 중간평가 논란 때는 오히려 김대중이 노태우와 손 잡고 김영삼을 정치적 협상에서 배제 시켜버렸다. 게다가 서석재를 비롯한 측근들이 비리 문제로 검찰에 출석하는 일이 잦아지고 1989년 8월 재보선에서 자당 후보가 평민당에까지 밀려 3등으로 낙선해버리는 등 당 안팎에서 김영삼은 상당히 골치아픈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게다가 자기 당인 민주당 내에서도 상도동계의 핵심 측근인 최형우의 주도로 평민당의 야권통합이 논의되기까지 했다. 김영삼에게 야권통합은 절대 수용 불가였는데 왜냐면 만약 평민당과 합당 시 김대중에게 차기 대권을 빼앗길 게 워낙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김영삼은 때마침 노태우에게 합당 제안이 오니 고민 끝에 승부수를 던지게 되었다. 김영삼은 과거 민주화 운동가였던 자신의 적, 민정당과 손을 잡으면서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는 말을 남겼는데 이는 3당 합당이 이뤄진다고 해도 김대중을 잡을 만한 인물이 자기 밖에 없어서 노태우도 대권을 잡는 걸 용납할 수밖에 없는 계산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특히 민정계와 민주계(+상도동계)의 연합은 지역주의를 부추켜 선거구도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판을 짜내게 하기에 매우 좋은 방안이었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점이 합당을 위한 내각제의 수용이었는데 김영삼은 겉으로는 수긍하는 척 했지만 본심은 달랐다. 그 이유는 자신 외에 김대중에 대적할 대안이 없는 관계로 번복이 가능했기 때문이고 실제로도 노태우도 여기에 굴복하여 김영삼을 차기 대권주자로 밀어줬다. 결국 김영삼은 3당 합당을 통해 수세에 몰린 자신의 입장을 역전해 대권을 차지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3당 합당의 결과: 오늘날 대한민국 정치 지형의 시초


3당 합당은 워낙에 갑작스럽게 이뤄진 것이었고 평민당 혼자만 제외하고 나머지끼리 뭉친 것이기에 당시 사회에서 굉장한 충격이었다. 특히 3당 합당의 소식을 듣고 김영삼의 최측근인 최형우조차도 자신은 따를 수 없다며 강하게 항의할 정도였고 노무현, 김정길, 김상현 같은 민주당 소장파 의원들은 격하게 반발해 꼬마민주당을 창당하여 떨어져 나갔다. 다만 김영삼의 완곡한 설득 끝에 웬만한 상도동계 인사들과 민주당 의원의 대부분은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자당(민주자유당)에 합류하면서 김영삼 쪽의 이탈은 실질적으로 크진 않게 마무리되었다. 이로써 여소야대 정국은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되었으며 거대 여당 민자당은 수의 논리를, 소수 야당 평민당은 극단적인 저항 중심의 투쟁 정치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상황이 무려 김영삼이 대통령이 된 이후인 1996년 노동법 날치기 시점까지도 이어지게 되었다.


이 사건에서 철저히 고립된 김대중의 평민당은 이때까지 노태우 정부에 유화적으로 나오던 기조를 버리고 초강경 노선으로 전환하였다. 3당 합당 선언 직후 김대중은 3당 합당을 민주주의에 대한 쿠데타로 규정하고 이에 강력한 대응을 선언하였다. 김대중이 이때 취한 노선은 과거 박정희, 전두환 시절의 야당과 비슷한 수준의 과격한 방식으로 수에 밀어붙이는 여당에 맞서 비제도적인 수단을 동원해 극단적으로 저항했다. 실제로 이 시기 평민당은 국회 해산 및 조기총선 실시 주장부터 상임위원회 회의장을 점거하여 농성을 벌인다거나, 의사 진행을 물리적인 힘으로 방해한다거나, 더 나아가 단식투쟁을 벌이는 등 권위주의 체제 하의 야당으로 완전히 회귀해버렸다. 물론 여당 민자당도 이에 대응해 평민당의 의사를 완전히 무시한채 국회 내 3분의 2 이상의 의석을 앞세워 법안들을 단독으로 통과시켰으며 이는 노태우 이후 김영삼이 취임한 후에도 한참 동안 국회 내 극한의 대립 관계는 지속되었다.


결국 3당 합당 정국을 통한 정당정치의 양식은 극단적인 정파 갈등으로 이어졌으며 민자당과 평민당의 이러한 행태는 지지층들 사이에서는 나름대로의 논리로 정당화되었다. 민자당의 입장에서 볼 때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의사결정방식은 다수결제도이며 타협이 불가능할 때에는 표결로 다수가 찬성한 방향으로 이끌어나가는게 당연했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다수에 입각한 결정을 무시하고 비제도적 수단까지 동원해 떼를 쓰는 평민당이야말로 소수라는 입장을 앞세워 약자 코스프레를 하고 횡포를 부리는 자들이었다. 반면 평민당 입장에서는 여당의 압도적인 의석 수는 국민의 총선이 아닌 야합으로 결정된 것이기에 비민주적일 뿐이었고 이를 막기 위해 강경 투쟁을 벌이는 것은 민주주의를 위해 용인 가능한 범위였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데 어쩌다 보니 적대적 공생으로 변해버려 지금에 와서는 한국 민주주의의 실상을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지는 실정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또 3당 합당은 정당정치가 권력쟁취를 위한 수단으로 변하는 것에 일조했는데 이 중심에 있는 인물이 바로 김영삼이다. 3당 합당은 당사자들의 선언에 따르면 보수세력의 대연정으로서 정책 중심의 정당정치를 구현하기 위한 것인데 그래서 안 그래도 명분이 부족한 민자당이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것은 내각제의 모델인 영국 보수당처럼 이념적 지향섬을 분명히 하거나 보수 빅텐트인 일본 자민당처럼 파벌들마다 차별화되는 정책 중심의 의제를 이끌어 나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3당 합당은 이를 위한 내각제 개헌을 합의하며 이뤄진 것으로써 민정계는 유보적인 입장이던 김영삼에게 확답을 받아내기 위해 민자당 전당대회 직전 합의각서를 만들어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 3인의 서명을 받아냈다. 그러나 이게 유출되어 1990년 10월 25일 중앙일보에 의해 보도되었고 여기서 김영삼 특유의 정치질과 언론 플레이가 노골적으로 나타난다.


당시 자신이 직접 서명해놓고 이제와서 사실을 부인하는 김영삼에 대해 민정계와 공화계는 적극적으로 비판하였는데 이때 YS는 각서에 인정한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내각제 개헌은 안 한다고 못박으며 대표최고위원으로서의 당무를 거부하고 마산으로 내려가버렸다. 마산에 내려간 김영삼은 노골적으로 노태우와 민정계를 비난하며 과격하게 말해 "내 요구 안 들어주면 김대중한테 붙어서 정권 타도하겠다"는 식으로 협박 메세지를 보냈고 결국 기껏한 승부수인 3당 합당이 무위로 돌아가는 것만은 막고 싶던 노태우가 이에 굴복하여 내각제를 포기하고 차기 대권주자로 김영삼을 내세우기로 하였다. 그리고 이는 훗날 대통령이 된 김영삼이 김종필과 공화계, 민정계 일부를 당에서 내쫓고 노태우와 5공 세력을 감옥에 보내버리는 일로 이어졌다. 뭐 이러나 저러나 노태우 입장에서 달리 고를 선택지도 없었긴 하다만.


이렇게 내각제 합의각서 유출파동과 그 이후 정치권 전반에서 전개된 권력투쟁은 결국 내각제라는 3당 합당 당시 제시되었던 그럴 듯하고 그나마 써먹을 만했던 명분마저 퇴색시켜 버렸다. 특히 민주화의 핵심이던 김영삼이 단순히 권력 획득 한 가지 이유만을 위해 민자당에 들어간 이후 노골적으로 깽판치며 차기 대권만에 혈안이 된 행보를 이어간 것은 결국 지금까지 이어져오는 한국식 의회민주정 정치에서 정치인들이 제시한 명분 이면에는 정치인들의 권력욕이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민주화 초기부터 너무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례였다. 이후 한국 정치는 이념이나 정책에 기반을 두고 정당을 창당하거나 이끌어가기보다는 김영삼이 그랬듯이 권력획득이 중심이 되는 정치상황이 계속 지속되었는데 덕분에 선거철마다 기존 정당들이 이합집산하여 새로운 정당으로 탈바꿈하거나 이 당 저 당 옮겨가거나 하는 등의 참사가 지금까지도 보이게 되었다.


요약하자면 3당 합당과 그 이후 전개된 일련의 정치적 사건들은 정치인들의 권력욕이 정화되지 않은 채 그대로 보여지게 되는 이유가 되었고 더 나아가 정부의 거버넌스 능력을 현저하게 떨어뜨리는 기능을 하게 되었다. 또한 한국의 정당 구도를 타국보다 훨씬 유동적으로 만들게 된 원인으로도 작용하였으며 지금까지도 한국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의 시초는 바로 3당 합당으로 탄생된 한국의 정치 지형의 유산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참고 문헌:


강정인 외, <한국정치의 이념과 사상>, 후마니타스, 2009

노태우, <노태우 회고록 상: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 조선뉴스프레스, 2011

강준만, <한국현대사 산책>, 인물과 사상사, 2006

이동형, <영원한 라이벌 김대중 VS 김영삼>, 왕의서재, 2011

조갑제, <노태우 육성 회고록>, 조갑제닷컴, 2007

김대중, <김대중 자서전>, 삼인, 2010

강원택 편, <노태우 시대의 재인식: 전환기의 한국사회 >, 나남, 2012

이장규, <경제과 민주화를 만났을 때: 노태우 경제의 재조명>, 올림, 2011

김종필, <김종필 증언록 2: JP가 말하는 대한민국 현대사>, 와이즈베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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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runch.co.kr/@a346abd5a67a4ed/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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