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소련이 붕괴되었을 때 이제 세계는 평화의 시대를 맞이 할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우세했었다. 어떻게 보면 이런 발상이 아예 이해가 안 가진 않는게 확실히 소련이 붕괴되어 미국의 일극체제가 된 마당에 여기에 군사적으로 도전할 만한 세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소련 붕괴 직후는 국제정치학 관점에서 현실주의보다 자유주의가 우세했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소련이 붕괴되었건만 오히려 세계는 갈등으로 빠졌다. 구 소련에서 분리된 몰도바와 트란스니스트리아, 그리고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이 전쟁에 휩싸이게 되었고 동시에 체첸에서도 대규모 유혈 사태가 벌어졌다. 그 뿐이었나. 동유럽의 또 다른 공산국가 유고슬라비아는 세르비아,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등으로 쪼개져 내전을 치렀다. 21세기에 들어서는 9.11 테러로 이슬람 극단주의 문제가 대두되었다. 이처럼 세계는 냉전이 끝났음에도 평화는 찾아오지 않았다.
새무엘 헌팅턴의 책 <문명의 충돌>은 이러한 냉전 이후 국제정세를 예언한 책이다. 그는 앞으로의 시대는 문명으로 나뉠 것이며 문명과 문명 사이의 경계는 분쟁 지대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헌팅턴은 국가 간 무력 충돌이 발생하는 것은 이념의 차이가 아니라 전통, 문화, 종교적 차이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렇다면 과연 실제로 그러한가? 현재 국제정세는 그가 예상한대로 돌아가고 있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분쟁도 따지고 보면 결국 속한 '문명'이 달라서이고 이슬람주의자들이 서구 대적하는 것도 문화와 종교적 차이 때문이다. 애초에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그나마 남은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이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마당에 이념은 아무 소용 없을 것이다.
그의 예측은 실제 사례를 맞추기도 하였다. 발칸 분쟁은 민족 문제도 있지만 사실 같은 남슬라브권이라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종교 문제였다. 세르비아는 정교회, 크로아티아는 가톨릭, 보스니아는 이슬람 등 발칸은 종교가 다양했고 다양한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각국에 다 뒤섞여있던게 분쟁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었다.
또 정확한 것은 이슬람주의자들이 서구에 위협이 될 것을 예측한 것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냉전 당시 공산주의의 위협에 맞서 이슬람주의자들과 서구는 동맹 관계였다. 실제로 아프간에 싸우는 이슬람 의용군 무자헤딘을 미국이 후원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공산주의라는 위협이 없어지자 그동안 부각되지 않던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역사 깊은 악연이 다시 부활한 것이다.
또한 헌팅턴은 문명을 결정짓는 핵심 변수로 종교를 선택했다. 서구에서 발생했던 대규모 종교적 분열과 종교 전쟁을 예로 들며, 서구 내부의 충돌이 정치적인 사건으로 보이지만 결국엔 종교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인종, 집단 정치 등 전 세계의 다양한 이념 사이의 충돌이 문명 간의 갈등으로 비춰지지만 결국엔 종교 간 충돌의 양상을 보이고 있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이건 아까 언급한 발칸 반도가 대표적 사례다,
이 책은 수많은 예측들이 적중하여 주목받았지만 동시에 비판도 많이 받았다. 노엄 촘스키 같은 좌파 학자들이 많이 비판했는데 그 이유는 지나친 서양 중심주의 때문이다. 서양의 기독교 문화를 문명에 바탕에 둔 국제 질서라고 하는데 이는 서방이 저질러온 악행을 무시하는 것과 다름 없다. 또 이슬람이 위협이 되는 이유를 열심히 제기하면서도 정작 그들의 적대 의식이 서구의 지배와 일방적인 이스라엘 편들기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침묵한다.
그래도 이 책은 오늘날 국제정치를 예견했기에 한계가 있어도 한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오늘날 세계가 폭력이 끊이지 않고 발생하는 이유를 집중적으로 파고 싶다면 이 책은 최고의 선택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