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역사는 누구나 가지고 살아간다. 내 경험을 말하자면 나는 학창 시절 자체가 흑역사이자 트라우마 였고 그 후에도 괜한 중2병에 빠져 선민의식에 찌들어있었던 적도 있었고 애니를 보고 캐릭터에 자신을 이입하는 씹덕스럽고 찐따스러운 짓도 해봤다. 이처럼 흑역사는 모두가 다 가지고 산다.
<역시 내 청춘 러브 코메디는 잘못됐다>(이하 내청코)의 주인공 히키가야 하치만도 흑역사를 가지고 살고 있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놀림감이었는데 중학교에 들어서는 여학생의 호의를 좋아해서 그런다고 착각해서 고백 박는 짓도 해봤고 오타쿠 짓도 하고 다니는 등 고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의 인생은 온통 흑역사 투성이였다.
그런 하치만은 우연한 계기로 봉사부에 들어가 활동하게 된다. 그 곳에는 유키노시타 유키노와 유이가하마 유이라는 여학생 두 명이 있었다. 이들과 함께 하는 봉사부 활동은 어느 학생에게 의뢰를 받으면 고민을 해결해주는 이른바 '해결사' 같은 활동이었다. 하치만도 자신의 흑역사를 극복하고자 여기에 참여한다.
하치만이 흑역사를 통해 오늘날 본인이 습득한 게 있다면 바로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자신이 희생하여 해결하자는 방법이다. 1기 12화 문화제 에피소드 편에서 이게 잘 드러나는데 하치만은 해야 되는 일로부터 도피한 사가미 문화제 위원장에게 일부러 독설을 내뱉어 나가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그는 전교에서 안좋은 쪽으로 소문나지만 하치만은 이를 두고 '봐라. 아무도 상처받지 않는 멋진 세계 아니냐'며 자신의 희생을 정당화한다.
한편 유키노시타 유키노는 하치만의 방식에 동의하지 못한다. 2기에서 자신이 대신 고백해서 거절 답을 들어 차이게 되어 인간관계가 틀어지는 것을 방지한 하치만에게 너의 방식은 동의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 후로도 갈등은 이어져 '자신을 희생해서 갈등을 해결하는 것은 옳은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게끔 한다.
하치만은 자신만의 방식대로 혼자 희생하려 한다. 그래서 잇시키 이로하가 다른 학교와 함께 크리스마스 행사를 개최하는 것을 봉사부 단체 참여가 아닌 혼자서 도우며 일을 해결하고자 한다. 하지만 인간은 공동체주의적 본성이 있기 때문에 혼자만으로는 해결하기가 벅찰 때가 있고 하치만도 이 위기를 맞이 한다.
하치만은 결국 봉사부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진짜 관계를 원한다는 본심을 드러낸다. 이는 하치만이 과거의 트라우마로 인해 진실된 인간관계는 없다고 믿으며 모든 대인관계를 거부해왔지만 결국 본심은 그도 진실된 관계가 고파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듯 사람 때문에 상처받아왔던 사람도 사람을 이해해가며 치유해갈 수 밖에 없다.
내청코는 단순히 재미도 있었지만 중간중간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에피소드가 있어서 좋았다. 특히 2기 크리스마스 행사 편에서 봉사부 내 갈등이 극에 달하고 풀리는 과정을 보며 많은 생각이 교차하였다. 진실된 인간 관계는 무엇인가? 또 모두 자기 만족을 위해 살아가지는 않는가? 그리고 사람으로 상처받은 사람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사람이 필요하지 않을까?
나 역시 하치만이 그랬듯이 인간관계에 있어서 안좋은 경험이 많았다. 학창시절 내내 왕따였고 괴롭힘을 겪어봤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대인관계에 있어서 극도로 방어적이며 최대한 관계를 맺지 않고자 한다. 하지만 내청코를 보며 그런 나조차도 마음 속 어딘가에선 진실된 관계를 갈망하고 있을지 한번 깊게 생각해볼 수 있었다.
우리가 진정으로 애니를 즐기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히키가야 하치만을 통해, 단순히 캐릭터에 자신을 대입하면서 멋있는 척 하는게 아닌 그의 고뇌를 보며 내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어떤게 있는지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