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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하면서도 짜릿함을 느낄 수 있는 영화

by 제이슨

빌런을 주인공으로 다루는 작품들이 맞딱뜨리는 문제가 있다. 바로 악역 미화다. 빌런의 시점으로 스토리가 전개되는 만큼 악역의 감정에 보는 사람이 몰입될 수도 있으며 자칫 하다간 학살 같은 반 인륜적인 행위들을 옹호하게 된다. 그래서 빌런을 다루는 작품은 잘 없고 나타나기 힘든 이유다. 그런데 그 법칙을 잘 지킨 완성 높은 빌런물이 있다. 바로 영화 <조커>다.

주인공 아서 플렉은 가난하다. 또 웃음을 멈출 수 없는 장애까지 있으며 수입은 불균형적이다. 그럼에도 그는 어머니를 데리고 성실하게 살고자 하는 시민이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다. 지나가는 사람 중 그를 괴롭히는 사람도 있으며 직장 내 실수로 짤리기까지 하는 등 괴로운 일들도 겪었다.

그렇게 괴로운 일들을 겪고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 양아치들에게 걸려서 또 괴롭힘을 당했다. 아서는 자신의 병명 카드를 보여줌으로써 장애가 있어서 웃는거지 재밌어서 웃는 것임이 아님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하지만 꺼내기도 전에 폭력이 이뤄졌고, 아서는 살기 위해 권총을 꺼내 죽였다.

아서의 인생은 비극이다. 자신은 어머니는 어릴 때 아버지가 아동학대를 하는 것을 방관했으며 어머니 또한 아서처럼 정신이상자였다. 연인이라고 생각했던 여자는 자기가 생각하던 망상일 뿐이었다. 이러한 장치들은 작품을 보는 우리로 하여금 아서 플렉의 처지에 공감하고 또 몰입하게 해준다.

그렇지만 이 작품은 마냥 아서를 옹호하지만은 않는다. 우선 웨인은 악역처럼 그려지지만 사실은 악역이라고 보기 어렵다. 아서가 자기를 친아버지라고 생각하고 달라붙고 아들한테까지 다가가서 위협하는데도 좋게 좋게 말로 해결할라고 하다가 계속 신경을 자극하니 주먹 한대 때린 것이다. 분명 웨인처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면 더 효과적으로 조질 수 있었는데 말이다.

머레이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아서를 자극한다는 점에서 악역처럼 보이지만 머레이는 그저 약자에게 무관심한 일반인일 뿐이다. 머레이가 아서의 영상을 조롱한 것은 인신공격이 아니라 풍자에 가까웠고 아서가 자신이 지하철에서 양아치들 죽인 범인이라고 밝혔을 때 아서를 자극하며 한 말은 지극히 상식적인 발언들이었다. 단지 아서에게 몰입한 우리가 보기에는 거북하게 들렸을 수도 있다.

마지막에 폭동 장면도 이 영화가 결코 악역 미화 작품이 아님을 보여주는 장치라고 생각한다. 만약 이 작품이 악역을 미화할 생각이었으면 폭력을 휘두르는 약자들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약자들이 연쇄살인마에 환호하고 경찰차를 부수고 폭동을 일으키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약자는 과연 선한가, 라는 의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이처럼 영화 '조커'는 다방면의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게 만든 작품으로 결코 악역 미화랑은 거리가 멀다. 그런데 이 영화가 나왔을 때 평론가들의 반응은 가관이었다. 정치적 올바름에 물든 평론가들은 아서 플렉이 백인 남성이라는 이유를 들어 이 영화가 인셀들과 대안우파를 미화했다고 한다. 또 폭력을 조장한다고 한다.

하지만 과연 이 영화가 대안우파 영화일까? 이 영화 속 기득권층은 약자에게 무관심하고 냉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건 오히려 좌파적이고 계급투쟁적인 관점에 가깝다. 또 앞서 말했듯이 아서 플렉은 절대 좋은 인물로 묘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 영화가 대안우파 영화라고 주장하는 것은 정치적 올바름의 폐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다양한 관점으로 선과 악, 그 경계를 고민해보고 싶은 사람에게 이 영화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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