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전염병 상황 속 다양한 인간들의 군상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

by 제이슨

올해 6월 쯤에 카뮈의 <페스트>에 대해 썼던 적이 있다. 그때 몸이 많이 안좋은 상태라 좀 대충 쓰고 넘어간 감이 있었기에 지금 한번 정리해보고자 글을 다시 쓰게 되었다. 어쨌거나 서론으로 돌아와서 리뷰를 쓰기 위해 카뮈의 페스트를 다시 한번 읽어봤다. 읽어보니 그때와는 다르게 느껴졌던 것도 있었고 또 같게 느껴진 것도 있었다.


카뮈의 페스트가 쓰여지는데에는 두가지 사건이 영향이 컸다고 본다. 첫번째는 스페인 독감이다. 1차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전선에서 돌아오는 군인들로부터 시작된 스페인 독감은 곧 유럽과 미국 전체에 퍼졌고 결국 2,500만에서 5,000만에 달하는 인구의 목숨을 빼앗아 간, 어쩌면 지금 우리 사회에 있는 코로나 19보다 훨씬 더 무서운 질병이었다.


두번째는 양차세계대전이다. 이 양차 세계대전으로 카뮈의 조국 프랑스는 짓밟혔다. 이때 프랑스는 꽤나 참혹한 광경이었는데 아마 이게 <페스트> 속 도시 분위기에 영향을 줬다고 보여진다. <페스트> 속에서는 전염병으로 인해 도시가 황폐화 되고 더 나아가 폐쇄되기까지에 이르는데 이 모습을 보며 나는 2차세계대전 속 유럽 도시들의 모습을 보았다.


그렇기에 페스트는 스페인 독감 혹은 프랑스를 침략한 국가, 즉 나치 독일을 상징한다. 두 개 모두 프랑스를 쑥대밭으로 만든 주범으로 아이러니 하게도 카뮈는 둘 다 모두 직접 눈으로 목격한 사람이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등장인물들은 저항하는 자, 순응하는 자, 그리고 이걸 기회로 이득을 챙기는 자로 나눠 스페인 독감과 나치 독일 치하 속 프랑스의 모습을 잘 나타냈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에서 시민들은 전염병 때문에 도시가 폐쇄되어 외부로 나갈 수 없는 부조리한 상황에 놓여있다. 헤어진 사람을 만날 수도 없으며 자기와 같은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며 자기 차례를 기다릴 수 밖에 없다. 다른 사람에게 균을 퍼트릴 수 있다는 의미에서 모든 사람들은 페스트이며 가해자인 셈이다.


리유는 전염병에 맞서 싸우는 의사를 상징한다. 폐쇄되어 나갈 수 없는 도시 속에서 전염병을 어떻게든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 과정에서 여러 인물들과 반목하기도 하고 도움을 받기도 한다. 이러한 리유의 모습을 보며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코로나 19의 종식을 위해 열심히 최전선에서 부조리한 상황에 싸우고 있는 의사들이 겹쳐보였다.


신부는 관념적인 사고관을 가진 자다.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도 신의 섭리이기 때문에 순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신부는 작중 인물들에게 그런 부조리한 세상이라면 바꿔야 하지 않겠냐면서 반론을 듣는다. 반대로 타루는 실존주의적인 사고관으로서 질병에 맞서 싸우자고 강하게 주장하는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신부와 타루 모두 전염병으로 죽는 것을 보아 카뮈는 순응하는 사람 뿐만 아니라 저항하는 자도 그다지 좋게 안보는 듯하다.


타루의 죽음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바로 카뮈의 레지스탕스들에 대한 인식이다. 전후에 레지스탕스들은 자신이 프랑스의 해방자인 마냥 설치고 다니며 부역자들을 색출한답시고 인민재판을 하고 다녔다. 그래서 카뮈는 레지스탕스들을 좋지 않게 생각했는데 이 점이 반영되어 레지스탕스를 상징하는 타루가 좋지 않게 끝난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코로나 19 속 우리는 다양한 군상을 볼 수 있다. 이는 마치 <페스트> 속 사람들을 보는 듯하다. 작가는 우리에게 거대한 부조리에 맞서 싸우는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시사하고 싶었는 듯 하다. 우리 사회의 평범한 소시민들이야말로 코로나에 싸우는 저항가들이 아닌가 생각이 들게 하는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였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