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쓰는 100편의 편지 -11: 인연(2)

파리에서 만난 인연

by 영국 아빠

홍이 삼촌과 그의 아내와 엄마와 엄마 품에 안겨있던 올리비아와 아빠는 그렇게 우리 집의 작은 정원에서 밤이 가는 소리를 들으며 아름답고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단다.


사랑하는 올리비아,

세상의 인연이라는 것이 참으로 신기에 얽히고 그런 인연들은 바람처럼 흩어지고 다시 계절이 다가오듯 오기도 하다마는, 내 손위에 사뿐히 앉은 꽃잎과도 같은 인연들이 있단다.


그런 인연으로 만난 홍이가 진짜 영국에 온 이유를 털어놓았단다.


물론 주된 목적으로 유럽에 오게 된 것은 신혼여행이지만, 다음 목적지인 스웨덴에,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누나’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두 세계를 잇는 다리


“형 누나는 한국말을 못 하고, 나는 영어를 못 해.... 몇 번 통화를 시도해 봤지만, 도무지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가 없더라고. 만나서도 아무 말 못 하게 될까 봐 그게 너무 걱정돼.”


홍이는 간절한 눈빛으로 아빠를 바라봤어.


“형, 영어 할 줄 알잖아. 형 대신 전화를 좀 해 줄 수 있어? 내가 언제 도착하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만나게 되어서 정말 기쁘다는 이야기와 그리고 몇몇 전할 소식들을 간단하게나마 형이 좀 해석을 해줘....”


아빠는 그날 밤 런던의 차가운 밤공기를 맞으며 스웨덴에 사는 낯선 홍이의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단다. 크리시(Chrissy)라는 이름의 그녀는 전화를 받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커다란 한숨부터 내 쉬며. 나의 존재를 물어보았고, 나는 상세하게 우리가 어떻게 홍이를 만났으며 왜 전화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잠시만요. 홍이에게 전해줄 말이 있어요.

우리가 만나기 전에 그가 꼭 알았으면 하는 이야기들이요.

제발 통역 좀 해주세요.”


자정이 다 된 시간, 정원에 서서 아빠는 한 여인의 기구한 생애를 한 문장 한 문장 홍이에게 옮겨주었단다.

크리시와 홍이는 같은 어머니를 둔.. 하지만 아빠가 다른 남매였어. 하지만 1970년대 후반 한국에서 홀몸으로 아이를 키운다는 건 감당하기 힘든 시련이었지. 결국 크리시는 태어난 지 11개월 만에 스웨덴으로 입양을 가게 되었단다.


아빠가 이 말을 홍이에게 전하자 그 큰 등치의 홍이는 고개를 떨구고 소리 없이 울더구나.


“어머니가 홍이가 유럽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 둘이 만나보라고 하셨을 때, 난 이게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덧붙였어.


아빠는 눈물범벅이 된 홍이를, 그리고 곁에서 모든 걸 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엄마를 바라보았어.


그리고 아빠도

“네, 그럼 우리도 스웨덴으로 같이 갈게요.”


스웨덴 – 마음의 언어

이틀 뒤, 우리는 정말 스웨덴으로 향했단다. 스톡홀름이라는 도시는 태어나 처음으로 밟는 땅이었다. 말로만 듣던 노벨상이 수여되는 스톡홀름은 런던과는 또 다른 분위기의 도시였다. 물론 홍이 덕에 그곳에 갈 수 있었던 것이지.


저녁 식사 자리에는 우리 여덟 명의 모여 앉았단다. 아미 올리비아는 너무 어려 기억에는 나지 않겠지만 사진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홍이 부부와 크리시 가족, 그리고 우리 가족까지.


식사 후 크리시는 낡은 상자 하나를 들고 나왔어. 그 안에는 수십 년 동안 어머니와 몰래 주고받은 편지들이 가득했지. 찻잔 자국이 남고, 수백 번 접었다 펴서 너덜너덜해진 종이들, 그리고 말라붙은 눈물 자국들….


편지를 읽기 위해 스스로 한글 공부를 했던 크리시…

하지만 그때까지도 정확한 뜻을 모르는 단어들이 꽤 있었고 나는 그 편지 중 몇몇 편지를 그녀에게 읽어 주었다.

아빠가 그 편지들을 영어로 읽어 주는 동안, 우리는 모두 울었단다. 엄마는 크리시의 등을 다독이고, 나는 홍이의 손을 꽉 잡았어. 다음 날 아빠는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함께 웃고 있는 홍이와 크리시를 보았단다. 그건 누가 봐도 영락없는 남매의 모습이었어.


작고 소중한 결정들이 만든 기적.


우리는 떠나기 마지막 날까지 3일 내내 파티를 하고 저녁을 같이 먹고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홍이 부부와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단다.

더욱이 크리시의 남편은 스웨덴 남자인데 얼마나 자상하고 가정적인지.. 음악을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하는 그런 사람이었지.

그의 아들이 너와 함께 손을 잡고 그네와 미끄럼틀을 타고 노는 것을 보며 아빠의 볼에도 커다란 웃음꽃이 피었었단다.


참으로 한참 전 일이 되었구나.

올리비아야. 아빠는 네가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 참 행복하다. 영국에서 기차를 타고, 파리에서 낯선 이를 만나고, 결국 스웨덴에서 타인의 아픔과 기쁨을 내 것처럼 나누었던 그 순간은 아빠 인생의 커다란 축복이었어.


며칠 뒤 우리 모두는 서로 각자의 위치로 돌아왔지


아빠는 지금도 가끔 홍이와 연락을 주고받는단다. 홍이는 한국에서, 우리는 여기서 주어진 삶을 살고 있지만 늘 서로의 안녕을 빌어주지.


홍이는 전화를 할 때면 항상 이렇게 시작해.

“사랑하는 형”, “고마운 형”.

아빠는 친동생이 없단다. 하지만 곰처럼 듬직한 체구에 세상에서 가장 여린 마음을 가진 홍이가 아빠를 “형”이라고 부를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뭉클해지곤 해.


올리비아야, 어쩜 인생은 작은 만남과 용감한 결정들이 모든 걸 바꾸는 것 같구나. 파리에서 다른 민박집에 갔더라면, 홍이의 전화를 거절했더라면, 혹은 스웨덴행 비행기를 타지 않았더라면 이 소중한 인연은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을 거야.


사랑하는 아빠의 딸,

올리비아도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과 헤어짐에 늘 행복 이 가득하기를 바란다


사랑을 담아, 치체스터에서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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