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프리카부자언니 Aug 30. 2022

둘째날. 생리통에 대하여.

똑똑한 몸이 보내는 게으름에 대한 면죄부

밤 새 눈이 내려 마당에 소복이 쌓였다. 난 이제 곧 6학년이 된다. 


"어른이 되는 것을 축하해."


엄마와 아빠와 웃으셨지만, 나는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날 아침 내가 느꼈던 기분 나쁜 서늘함과 

파란 속옷과 선명히 대조되는  붉은 이미지는 아직도 내 기억 언저리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 후 꽤 오랫동안 생리쯤 찾아오는 고통에 시달려왔다. 

병원과 한의원을 가 보기도 했지만, 어차피 현대 의학은 풀 수 없는 문제 아닌가.  


배를 콕콕 찌르는 유쾌하지 않은 통증은 어느 날은 눈물이 날 정도도 심했다.  

겨울이 아닌데도 무릎이 알싸하게 시리는 묘하게 기분 나쁜 느낌.  

푹푹 찌는 한 여름에도 담요를 배에 칭칭 두르고 땀을 질질 흘렸던 기억들 

혹여라도 겨울이면 고통은 갑절로 늘었다.  


그렇게 십여 년을 살던 어느 날 사랑스러운 아이가 태어난 후에는 

정말 신기하게도 아주 미약한 통증만을 남겨두고 대 부분 사라졌다.  


마치, 

"아이를 낳은 너는 이제 완연한 여자란다. 축하한다" 

라는 신의 메시지인 듯 말이다.



그러다가 최근 생리통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정신을 까무룩 잃을 정도로 깊이 잠이 들거나, 

생리할 때 즈음 되면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져서 주변 사람을 잡아먹을 듯이 화를 내고 

다음 날은 언제 그랬냐는 듯 친절 모드로 돌아가 아프리카부자언니표 지킬 앤 하이드 연극을 한 달에 한 번씩 찍는 다든가, 

허리나 무릎이 통증이 신경을 거스를 만큼 심하게 느껴진다거나. 


오늘이 딱 그랬다. 

눈을 뜨니 9시 40분이다. 

아이가 잠깐 침대로 와서 엄마를 불렀을 때 시계를 보니 6시 40분이었는데. 

다시 살짝 눈을 감았다가 뜨니 남편은 보이지 않고 집에는 고요한 정적만 감돈다. 


6시에 남편과 함께 일어나 아이들 도시락과 간식 챙기기 

7시 아이들 학교에 데려다 주기 

8시 친구들과 5km 걷기


오늘은 아침 일정을 아주 씨원하게 모두 제껴 버렸다. 


샤워를 하다가 문득 생각한다. 


왜 갑자기 사라졌던 생리통이 다시 시작이 된 것일까? 



얼마 전 지인과 했던 대화가 떠 오른다. 

우리 몸은 너무나 똑똑해서 환경에 금방 적응하고 혹은 느슨해지면 게을러진다고. 


회사를 다니며 바쁘게 정신없이 살 때에도 나는 생리를 했고, 

한국에 있을 때 부동산에 미쳐 여기저기를 돌아다닐 때도 생리를 했고, 

심지어 방학 때 아이들과 말레이시아를 여행하는 중에도 생리를 했고, 

여유가 넘치는 지금도 생리를 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느끼는 아픔의 정도가 매우 다르다. 


뭔가 긴장이 느껴지던 상황에서는 아픔은 느끼지만 참을만하고 내가 감당할 수준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을 일상으로 받아들였다. 

내가 전날 무엇을 했든 정해진 시간에 출근을 하고, 정해진 일을 하고 

그렇지 않으면 감당 못 할 일들이 발생하니 늘 긴장했다. 


얼마 전 한 달 여 동안 아이들과 여행을 하는 중 에는 잠시라도 긴장의 끈을 놓칠 수 없었다. 

나의 자연스러운 생리 현상보다도 나의 아이들의 안전은 우선순위였다.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오래간만에 여유를 즐기고 있으니, 

내 똑똑한 몸이라는 녀석은 늘 오는 신호를 너그러이 받아 주고 있는 중이었다.   


바로 <게을러도 되는 면죄부>였다.  


나 생리 중인데 배가 조금 아프고 피곤하네?

방학 동안 아이들 데리고 여행하느라, 

다녀와서 2주간 아이들 새 학기 준비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니. 

나 좀 이제 쉬어도 되지 않니. 

오늘 하루 학교 안 데려 준다고 큰일 나는 거 아니잖아.

이제 애들 적응 좀 되지 않았니.  

어차피 남편이 하루 애들 학교 보내면 되지 뭐. 조금 더 자도 돼.  

나 없이도 잘하는 애들인데 뭘. 

매일 하는 운동 하루쯤 제끼면 어때. 나 지금 몸이 별로 안 좋은 상황이잖아. 

나 무릎이 좀 아픈 것 같은데 쉬어 주는 게 낫지 않겠어? 

내 주변 친구들을 보면 생리 전후로 기분 조절이 안되어 아이들이나 남편에게 소리 지르던데

나 감정 조절 좀 잘 못하면 어때. 나만 그런 것도 아닌데 뭐. 


아... 이제 알았네. 


내 똑똑한 몸아. 

미안해서 어쩌니. 

이제 너 딱 걸렸다. 


오늘까지만 쉬어. 

모르고는 넘어가도, 알고는 못 봐주는 내 성격 너도 알잖니 ㅎㅎㅎ 


귀여운 녀석. 




#책과강연 #백백7기 #아프리카부자언니 #최지영작가 #생리통





작가의 이전글 100일 후 만날 내가 너무 기대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