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는 논어의 위정 편에서 나이 서른을 이립(而立)이라고 했다.
열다섯에 배움에 뜻을 두고(十有五而志干學, 십유오이지간학), 서른에 자립했다(三十 而立, 삼십이립)는 데서 나온 말이다.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다는 불혹(不惑)의 마흔 나이도 지나고 하늘의 명을 깨닫는 나이라는 지천명(知天命)도 이미 훅 지나버린 나는 벌써 귀가 순해진다는 이순(耳順)의 예순조차 지났다.
2024년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84.3세로 2023년에 비해서 약 8개월이 증가했고 1970년 62.3세와 비교하면 약 22년 정도 늘어났다. 과거 조선시대 왕의 평균 수명은 47세이고 평민들은 30대 정도로 추정하는데, 지금 우리는 기대수명이 84.5년인 일본과 스위스 다음인 3위의 장수국가다. 2026년에는 65세 이상 고령 인구가 20% 이상인 초고령사회가 된다. 이 통계 추세대로면 지금 이순(耳順)을 넘긴 나는 대략 90세 정도는 살 것 같다. 그렇다면 앞으로 30대인 우리 아이들과 만날 수 있는 시간도 대략 지금까지 함께 살아온 30년 정도는 될 수 있다. 물론 내가 치매나 파킨슨, 알츠하이머 등 몹쓸 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결국 내 인생 여정은 결혼 전 30년과 자녀들과 함께한 30년 세월 그리고 앞으로 남은 30여 년의 시간으로 구분되는 듯하다. 흔히 말하는 30년 배우고, 30년 일하고, 30년을 버틴다는 인생살이 논리가 대충 맞는 듯하다.
어머니도 파킨슨병으로 돌아가셨다. 파킨슨병은 뇌 속에서 운동에 필요한 도파민이라는 신경세포의 소실(消失)로 발생한다. 처음에는 동작이 느리다가 손발이 떨리고 꾸부정한 자세가 되면서 결국 치매로 연결되는 흔한 노인성 질환이다. 나도 그렇게 되기 싫어서 평소에 운동을 습관처럼 하려 한다. 오래 살고 싶다기보다는 건강하게 살아서 자녀들에게 짐이 되기 싫은 것도 이유 가운데 하나다.
퇴직하여 한결 여유가 생겼을 때 처음에는 아들딸들과 그동안 바빠서 함께 누리지 못했던 알콩달콩한 시간도 맘껏 갖고 싶고, 즐거운 여행도 함께 하고 싶었다. 그런데, 나는 이제야 시간이 나고 여유가 철철 넘쳐서 이제야 아빠 노릇 한번 해보려는데, 이제는 아들딸들이 먹고살기 바쁘다. 이립(而立)의 나이도 생각보다 바쁘다.
내게 남은 30년(불확실하지만). 소중한 시간. 내가 잘 사용해야겠다. 시간은 마음먹기에 따라 하루도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기도 하고 여삼추(如三秋) 같을 수 있다. 지나온 시간보다 남아있는 시간이 더 길다고 느껴진다. 조직 생활의 통제 속에서 불필요하게 낭비되는 시간이 사라져 버린 상태에서는 몇 배나 길 수 있다. 마음먹기에 따라 충분히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또한 내게는 아직 성장할 시간임과 동시에 베풂의 시간이 남아있다.
나도 재취업으로 다시 여유로운 시간은 잠시 줄었지만, 이순(耳順)의 나는 이립(而立)의 아이들에게 내가 살아오면서 경험했던 여러 가지 이야기를 최대한 많이 들려주고 싶다. 우선 적어도 이 세상은 살만한 곳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구체적으로 삶에 대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를 알려주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적어도 내가 이립(而立) 시절에 이순(耳順) 어른들로부터 받았던 것보다는 소소한 어떤 것이라도 더 많이 알려주고 베풀고 떠나고 싶다.
서로 바빠서 소통할 여유조차 부족하다면 책으로라도 남겨서 그들이 어느 날 문득 내가 그리울 때 읽어보면 좋겠다. (그래서 책을 남기고 싶은지 모르겠다. 그들도 언젠가는 독서의 필요성을 느끼리라 생각하면서)
이립(而立)과 이순(耳順). 한세대(30년)의 격차다. 어울릴 듯 어울리기가 쉽지 않은.
그럼에도, 서로 존중해야 하는 사이.
이립(而立)의 젊은이가 이순(耳順)의 어른 말에 무조건 따르고 존중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강요한다면 그것도 일종의 나이 갑질이다. 이립(而立) 나이를 지나온 이순(耳順)의 어른은, 조건 없는 배려와 포용으로 그들을 보듬어야 한다. 먼저 살아보았다고, 먼저 경험했다고 다 옳고 잘 산 것은 아니지 않은가. 훈계나 습관적인 잔소리쯤이야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당연함은 더더욱 안된다.
이제는 아들딸들이 가끔 나의 실수를 지적할 때면 반발하지 않고 즉시 인정하고 받아들이려 한다. 세상은 젊은이 중심으로 흘러가야 한다. 진정한 어른은 젊은이들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옆에서 지켜보며 격려하고 도와주어야 한다. 어쩌면 공자가 말한 나이라는 개념에는 어른은 더 어른다워야 한다는 지혜가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언젠가는 이립(而立)의 젊은이들도 나처럼 늙어갈 것이다. 부모님이 안계서야 비로소 그 빈자리가 얼마나 큰지 느껴지는 법. 살아생전 서로 다른 경험과 사고의 격차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 어른들이 안 계실 때가 오더라도 이럴 때는 어떻게 하셨을까. 하며 돌아보게 된다.
적어도 그 정도의 관계라도 되려면, 이립(而立)의 젊은이들에게 어떤 이유에서라도 현실 세계에서 부담을 주는 어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쉽지 않은 문제다. 나이 들어 본의 아니게 아프게 되면 가족의 힘을 빌어야 할 때도 있고,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평민들의 기대수명(30년)을 따져보면, 자녀들이 이립(而立) 나이 정도면 부모 세대는 이미 이 세상에 없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당시 젊은이들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일찌감치 홀로서기를 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결혼은 지금보다 일찍 했을 테지만, 우리는 당시 평민에 비하자면 오히려 3번의 삶을 사는 셈이다. 당시의 잣대와는 분명 다르겠지만(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공부에 전념하는 시스템이다. 배우는 시간이 30여 년이라니!), 그 당시와 비교하자면 지금의 자녀들은 매우 불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여튼, 남은 30여 년을 제대로 잘 지내려면 적어도 부모와 자식 간에는 서로 스트레스를 주지 않는 관계를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
이립(而立)의 사랑하는 아들과 딸들아.
우리 서로 자주 연락하면서 싸우지 말고 끝까지 잘 지내자. 알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