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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a Dragon Mar 31. 2023

가끔은 착각 속에 빠져 살고 싶다.

지인들과 즐거운 식사를 마치고 다른 장소로 이동해서 막 자리에 앉았을 때 갑자기 윗옷에 지갑이 없다는 걸 알았다. 그때부터 혼란스러웠다.      


분명 집에서 나올 때는 여느 때처럼 왼쪽 안주머니에 지갑을 넣고 오른쪽에는 휴대전화기를 넣었던 것 같다. 어디에서 없어진 것일까.

평일 한가한 시간대라 버스와 전철에서 누구와도 접촉한 적이 없었다.

더구나 그 지갑은 딸이 해외 골프 전지훈련을 다녀오면서 사준 선물이라 평소 매우 아끼던 거였다. 외출할 때는 늘 몸에 지니던 소지품이라 집에 두고 왔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생각했다.    

 

방금 다녀온 식당과 커피점에 다시 가서 확인했으나 없었다.

분실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난생처음 분실물 신고센터 로스트 112에 인터넷으로 바로 신고했다. 집으로 허겁지겁 한달음에 달려왔다. 잃어버렸으면 어떡하지. 전전긍긍. 헉. 지갑은 책상 위 한구석에 고스란히 잘 모셔져 있었다.

마치 나의 기억을 비웃듯이 반쯤 입을 헤~ 벌린 채.

그제야 착각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갑자기 그렇다면 평상시 나의 기억들은 정확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렇게 기억이 사라지는구나. 기억이 사라진 회로를 곰곰 따져보았다.

분명 아침에 윗옷을 입으면서 지갑을 잠시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왼쪽 안주머니에 넣었다고 생각했던 지갑 대신 무의식적으로 먼저 눈에 띈 휴대전화기를 집어 들었고 이를 왼쪽 안주머니에 넣은 모양이다.

평소 오른쪽 안주머니에 넣던 휴대전화기는 당연히 이미 넣은 거로 착각해 버린 채. 아! 이렇게 착각하는구나. 나이 들어감에 이런 증상도 은근히 신경 쓰인다.      


어느 노인이 수영장 탈의실에서 수영모를 쓰느라 낑낑거리며 고생하다가 바지를 입은 줄 착각한 채 그대로 맨몸으로 수영장으로 입장했다가 곤욕을 치렀다는 실수 경험담이 떠오른다. 여태껏 별로 이런 착각은 없었다.

착각이 없었다고 여기는 이런 기억도 착각인가? 갑자기 불안감이 급습한다.

혹시 그동안 나도 모르게 얼마나 많은 착각을 하며 살아왔을까?     


착각은 단순한 지각상의 실수라기보다는 부정확한 지각을 유발하여 감각에 주어진 자극이 어떤 환경 조건에 따라 변했을 때 생기는 것이다.


문득 돌아가신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 떠오른다.

어머니는 결국 인지능력이 떨어져서 자식도 제대로 몰라보는 착각 속에서 생을 마감하셨다. 거의 마지막에는 나를 쳐다보면서도 내가 당신의 아들이라고는 전혀 알지 못하고 시선을 바로 딴 방향으로 돌렸다. 당시에는 그냥 민망해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었다.     


기억을 잃어버리면 바로 착각이 찾아오기 쉽다. 늘 자기중심적인 사고에 젖어있는 우리는 내 사랑은 영원할 거라는 착각. 회사가 영원히 나를 책임져 줄 것이라는 착각, 영원히 살 것 같은 착각으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판단력을 잃어서 결혼하고, 자제력을 잃어서 이혼하고, 기억력을 잃어서 재혼한다.라는 아르망 사라클(프랑스 극작가)의 말도 생각난다.      


자신이 별처럼 빛나고 소중한 존재임에도,

낮은 자존감 때문에 하릴없이 자책하고 남들과 비교하여 형편없이 쓸모없는 놈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다. 우리는 얼토당토않은 품성과 비열한 능력을 갖춘 사람인데도 마치 이 시대의 영웅이요 난세를 헤쳐 나갈 구세주로 착각하여, 허망한 희망을 품고 허상의 정치 지도자를 믿고 바보처럼 열렬한 지지를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철석같이 믿었던 지갑에 대한 나의 착각이 나비효과처럼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나의 지질한 능력과 졸렬한 품성을 과도하게 포장하여 주변인들이 착각하게끔 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정말 미안하고 미안한 일이다.     


착각에는 커트라인이 없다고 했던가.

이왕 이런 착각을 계속하게 되면 앞으로는 좀 더 아름다운 착각도 하며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집안에서는 해와 같이 소중하다는 뜻을 품고 있는 안해(아내)가 세상에서 그래도 가장 아름다운 여인일지 모른다는 착각. 내 자녀들은 적어도 세상에서 부모를 가장 믿고 존경하리라는 착각, 비록 내가 언젠가 퇴직하여 어떠한 권력도 힘도 가진 게 없어도 동료나 친구 그리고 가족은 나를 평생 잊지 않고, 애완견보다는 그래도 서열을 높게 챙겨주리라는 착각 등등.     


이런 아름다운 착각들이 사실은 가끔 나를 위로해 주고 편하게 숨을 쉬게 해 주는 하나의 원동력이다. 나는 이런저런 행복한 착각 속에 빠져 하루를 기분 좋게 보내고 싶다. 단, 오늘도 지갑은 책상 위에 두고 외출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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