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靑春)은 인생의 어떤 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을 뜻하나니
장밋빛 볼, 붉은 입술, 부드러운 무릎이 아니라
풍부한 상상력과 왕성한 감수성과 의지력
그리고 인생의 깊은 샘에서 솟아나는 신선함을 뜻한다...
청춘이란 두려움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함을 물리치는 모험심을 말하나니
때로는 스무 살 청년보다 예순 살 노인이 더 청춘일 수 있네....
머리를 높이 들고 희망의 물결을 붙잡는 한, 그대는 여든 살이어도 늘 푸른 청춘이네.
(사무엘 울만 ‘청춘’ 중에서)
죽을 때까지 꿈을 포기하지 않고 꿈을 실현하기 위해 계속 꿈을 꾸는 자는, 결코 늙지도 죽지도 않는다고 한다. 칭기즈칸이 정복한 땅이 777만 ㎢라고 했다. 알렉산더 대왕(348만), 나폴레옹(115만), 히틀러(219만) 세 정복자가 차지한 땅을 합한 것보다 크다. 누군가는 칭기즈칸의 어마어마한 성공비결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꿈’이라고 한다. 한 사람이 꿈을 꾸면 한낱 꿈으로 끝날지 모르지만, 만인이 꿈을 꾸도록 하면 현실로 변할 수 있다고 했다.
우리 대한민국 역사에서도 이처럼 만인이 꿈을 꾸도록 만든 영원한 청춘 두 분이 계시다. 바로 ‘난중일기’와 ‘백범일지’의 작가이신 충무공과 백범이다. 우리 국민이 가장 존경한다는 이 두 분의 일기(일지)를 통해 우리는 오늘도 꿈을 꾸고 있다. 나라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도 이를 극복해 나가는 청춘의 용기와 모험심을 배운다.
방사선형 도시인 진해에는 로터리가 3군데 있다. 그 하나인 북원로터리 앞에 충무공 동상이 서 있다. 그 인근 충무로 1번가에서 나는 태어났다. 근처에 충무공 시비(詩碑)도 있다. 거기에 충무공의 ‘誓海魚龍動(바다에 맹세하니 어룡이 움직이고) 盟山草木知(산에 다짐하니 초목이 알더라)’ 글귀가 적혀있다. 그 필체의 주인공이 그를 그토록 연모했던 백범이라는 사실과 백범이 어려울 때마다 이 시구를 애송하며 구국정신을 되새겼다는 것을 한참 철이 들고 나서야 알았다. 두 분이 비록 1545년과 1876년 출생으로 300년의 세월을 뛰어넘는 공간에서 활동하셨지만, 비슷한 역경의 삶을 지내왔음도 발견할 수 있었다.
평범(平凡)에서 비범(非凡)으로 나아간 영웅
충무공은 32세라는 늦은 나이에 비로소 평범하게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뛰어난 능력과 강직한 인품으로 중요 직책에 계속 발탁되어 이후 쓰러져 가던 나라를 목숨 바쳐 살리셨다. 백범은 상놈의 집안 내력이 있다. 오로지 한학이나 공부하던 평범한 집안의 젊은이였었다. 그런 그가 우리가 완전한 독립국이 되려면 조선의 백정(白丁) 범부(凡夫)라도 애국심이 내 정도는 되어야 하겠다는 바람으로 호를 백범(白凡)으로 고쳤다. 두 분 모두 비록 출발은 밋밋했으나 나중은 매우 창대한 삶을 사셨다.
탁월한 위기 대처 능력의 지도자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남아 있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다면 막을 수 있습니다….”라는 장궤를 올리고, 지형과 기상 그리고 첩보를 잘 활용하여 이길 수 있는 경우에만 나가 싸워 한 번도 패하지 않았던 충무공의 탁월한 위기 대처 능력처럼, 백범도 사형 집행 직전에 고종의 사형 정지명령으로 간신히 살아남아 감옥에서 대기하다가 일본을 위해 감옥에서 죽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여 과감하게 탈옥했다. 중국 망명 시절에는 거액의 현상금이 붙었음에도 일본의 감시에 한 번도 잡히지 않고 위기를 잘 넘겼다.
必生卽死 必死卽生
필사즉생(必生卽死)의 자세로 전쟁터에 임했던 충무공처럼, 백범도 내 한목숨 연연하면서 구차하게 살려고 하지 않았다. 민비시해사건으로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의거(義擧)했을 때도 당당하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집에서 순사가 체포하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후일 신문을 받는 장소에서도 오히려 일본 순사를 꾸짖는 당당함이 있었다. 백범은『나의 소원』에서도 밝혔듯이 우리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했거니와 그것은 독립국만 되면 우리나라의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라고 했다. 대의를 위해서는 자신은 아무런 조건 없이 가장 낮아져도 좋다는 것은 충무공이 백의종군으로 구국의 대열에 미련 없이 동참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혁신적인 新사고의 진정한 지도자
충무공은 전라도 정읍 현감에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승진하게 되었다. 육군에서 해군으로 신분이 전환된 것이다. 충무공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부터 전쟁에 대비하여 거북선을 만들고 판옥선에 화포를 장착하여 장사정 화력을 보유했다. 당시에 보편적이었던 단거리 활을 쏘는 것이 아니라 화약을 이용한 새로운 개념의 장거리용 타격체계를 구비했다. 백범도 평생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다. 동학에 입문하여 시대의 변혁을 꿈꾸었고, 의병의 국제연대를 위해 청나라를 방문하는가 하면 을사늑약 반대 투쟁과 투옥 생활, 근대적 교육에 누구 보다 앞장섰다. 일제의 탄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국민계몽 교육이라고 부르짖었다. 심지어 환등기를 가지고 고향에 내려가 인근에 있는 양반과 상놈들을 다 모아 놓고 절규하며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라고 외쳐 댔다. 구태의연한 기존의 방식으로는 난세를 극복하지 못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인식한 개혁 마인드의 리더들이었다.
글쓰기를 통해 어려운 시기를 견디다
이 두 분은 각기 다른 그 어려운 현실을 어떻게 버텼을까. 충무공은 힘 가진 부하를 두려워하고, 변덕이 심하며 우유부단하기까지 한 선조를 받들면서 얼마나 외롭게 관직 생활을 하였을까. 백범은 희망 없이 살아가고 있는 국민에게, 쫓기는 망명지에서도 희망을 주기 위해 그 얼마나 암흑의 긴긴밤을 외롭게 보내셨을까.
지금이야 우리에게 남긴 난중일기와 백범일지라는 소중한 선물이지만, 당시에 가슴 시리고 피눈물 나는 당신들의 궤적을 글로써 한 자 한 자 남기실 때 과연 어떤 심정이었을까. 글쓰기를 통해 꺼져가는 희망의 촛불을 밝히려 매일매일 두려움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함을 물리치는 모험심으로 평생을 보냈다고 생각하니 이분들은 분명 영원한 청춘의 삶을 사신 것이 맞기는 하다. 혹여 글쓰기를 통해 당시 마음속 깊게 파이고 곪아 터진 상처들이 조금씩 치유되면서 스스로 위안이 되지 않으셨을까? 나도 졸저인 자전적 에세이를 한번 출판해 보니, 평범했던 지난 삶의 소소한 경험들조차 일단은 정리가 되는 듯하고, 무엇보다 이 과정을 통해 나 스스로가 우선 큰 위안을 받고 응원이 되었다.
나는 이분들의 헌신 덕분으로 다시 회복된 이 땅에서 너무나 잘살고 있다. 더욱이 의학 기술의 발전으로 50세를 넘기지 못했던 충무공과 80세를 넘기지 못했던 백범보다는 더 오래 살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100세를 살아간들 사무엘 울만이 읊었듯이, 머리를 높이 들어 희망을 꿈꾸지 않고, 하루하루 의미 없는 삶을 살아간다면 단순히 육체의 수명만 연장하는 부질없는 짓이리라.
영원한 청춘 두 분을 다시 한번 떠올려보며 현재의 나를 반추해 본다. 하릴없이 나이 듦에 한숨만 쉬지 말고, 인생의 깊은 샘에서 솟아나는 늘 푸른 청춘의 신선함이 내게도 남아있는지 수시로 살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