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질문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고민이다. 나이와 경험이 쌓이면서 삶의 무게와 의미에 대한 고민 또한 더욱 깊어지기 마련이다. 최근 북클럽 모임에서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의 책들을 다시 읽으며 20대 때와는 확연히 다른 관점으로 그의 철학을 이해하게 된 것은 내게는 매우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내가 20대에는 이 세상이 논리적이지 않고, 부조리하다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노력만 하면 모두 성공하는 줄 알았다. 세상의 훌륭한 어른들이 질서를 잘 만들어 놓은 줄 알았다.
살다 보니 삶이란 예측할 수도 없고 비합리적인 사건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삶이 주는 의미를 나름대로 열심히 찾고자 하였으나, 누구도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았다. 코로나 등 무서운 재해재난 사태를 직간접으로 체험하고서야, 죽음의 불가피성도 실감하게 되었다. 세상에는 이성(理性)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 즐비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치열한 사회생활을 통해 타인과의 갈등을 겪고서야 인간의 내면적 고독을 이해하게 되고, 홀로 버텨내어야 하는 이 세상이 온통 부조리로 덮여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젊었을 때는 사물과 현상을 직시하는 사유의 힘이 부족했다. 오래도록 관찰하는 집중력도 아쉬웠다. 준열하게 살고픈 욕심으로 나름 여기저기에서 지혜를 찾아보려 하였으나, 갈증으로 계속 목만 탔다. 이런 부조리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낼지. 더불어 타인과 함께 살아내야 하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지켜낼 수 있을지. 답답하기만 했다.
당시에는 '이치에 맞지 아니하거나 도리에 어긋나거나' 또는 '부정행위를 완곡하게 이르는 말'이라는 사전적 해석의 '부조리'라는 단어에 추가하여 '인간과 세계, 인생의 의의와 현대생활과의 불합리한 관계를 나타내는' 실존주의자 카뮈의 철학 개념도 선뜻 와닿지 않았다. 이제야 선명하게 다가오는 것은, 경험과 성찰이 그때보다는 좀 더 깊어졌기 때문일까.
카뮈는 20~30대에 이미 통찰하고 있었다.
세상의 본질적 부조리를 외면하거나 회피하는 대신, 이를 직시하고 수용하라고.
부조리한 세상을 향해 반항하고 자유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라고 한다.
『이방인』(1942)에서 뫼르소의 삶과 행동을 통해 개인의 고립과 무관심이 불러오는 부조리한 인간 존재를 탐구하였고,
『시지프 신화』(1942)에서 무거운 바위를 지고 끝없이 반복되는 고통 속에서도 현재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도록 했다.
『페스트』(1947)에서 타인과의 연대를 통해 이 부조리한 세상과 맞서자고 했다.
이런 삶의 태도를 통해 진정한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지킬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카뮈의 작품들은 인간 존재의 부조리와 반항, 구원을 중심으로 한 3부작 형식으로 구성되었다. 비록 그의 마지막 작품은 완성되지 못했지만, 그의 철학적 사유는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삶의 부조리를 직시하고 그 속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카뮈의 작품을 통해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지키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젊은 시절에 카뮈의 작품을 통해 인간의 본질과 삶의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철학적 고민을 시작하는 것은 좋은 경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처럼 그때는 제대로 삶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이들이라도 뒤늦었지만, 격렬하게 삶의 현장을 지나온 지금은 나를 돌아보고 앞으로의 삶을 들여다보는 안목쯤은 쪼금 생긴 것 같다.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이런 까칠한 질문에 정답을 비록 바로 제시할 수는 없을지라도, 어떤 시련도 회피하지 않고 나의 자유와 가치를 이해하면서 버텨낼 수 있다는 긍정적 내공은 생겼기에. 그리고, 삶의 본질적 부조리에 대한 철학적 고민만 계속 고민하고 있기에는 남은 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것쯤은 이제 분명히 알고 있다.
부조리한 인간 존재의 실체를 직시하면서 현재 이 순간의 소중함을 알고 타인과의 연대를 통해 삶을 의미 있게 살아내는 것.
예전에는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던 사실들이 하나둘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나도 나이를 먹긴 먹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