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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a Dragon Jul 08. 2024

한갓진 오후의 발견

‘한갓지다’의 뜻은 ‘한가하고 조용하다’이다.      


이 단어가 내 마음 깊숙이 들어와 박힌 때가 있었다. 오랜 공직생활을 마치고 퇴직하여 한가로이 집에서 지낼 때였다. 날마다 울리던 핸드폰이 울리지 않는다. 그간 얄팍하게 가지고 있던 권력도, 어떠한 권리도 없어진 내게 이제는 아무도 전화하지 않는다. 가끔 오는 지인의 안부 전화도 내가 먼저 하지 않으면 오지 않는다. 세상은 냉정하다. 권력의 끈이 떨어진 냄새는 기막히게 잘 맡는다. 정해진 일정이 있는 아침이 아닌, 아무 책임도 없는 그저 조용한 아침을 느낄 때면 그냥 산책 나간다. 동네 호숫가 주변을 걷는다. 호수의 물결처럼 조용한 오후. 시끄러운 도심 속에서 나만의 작은 공간과 여유를 찾는다. 동네 도서관에도 가본다. 몇 시간이고 뭉개고 있어도 뭐라고 하지 않는 커피점도 발견했다. 그리고 좋아하는 목욕탕을 찾아 하루의 긴장을 푼다. 모처럼 한갓진 오후다.      


차 한잔의 시간, 책 한 권의 여유, 호젓이 영화 한 편을 감상하면서 새롭게 느끼게 되는 감성들. 다른 길을 걸었으면 어땠을까. 이 모든 것이 한갓진 오후에 어울리는 장면들이다. 오래된 짐을 일단 내려놓고 나만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느긋하게 숨을 고르는 순간들. 또 다른 안정감이다. 물론 앞으로도 감내해야 할 일도 많겠지만, 우선 퇴직은 무사히 했으니 기본 임무는 마쳤다는 안도감이 생긴다. 생각보다 더 한갓지다. 직위와 직급이 높았던 이들은 퇴직하면 그 외로움과 허전함은 더 클 것이다. 어디서나 주목받고 대접받는 문화와 환경에 적응되었다가 아무도 관심 가져주지 않고 추락하는 일상을 견디기 어려울 수도 있을 터. 현직에 있을 때 퇴직 이후 갈 자리를 미리 찾아두는 이유가 그런가 보다.      


퇴직할 당시까지 별다른 취업 준비를 하지 않았다. 취업하지 않으려는 것은 아니었으나, 하고 싶었던 일들이 있었다. 준비해 오던 박사학위부터 받았다. 퇴직한 이후에 받았으니 빠른 것은 아니나, 늦은 것도 아니었다. 늦은 나이에 돈만 낭비하는 학위가 무슨 의미가 있냐고 하는 이도 있지만, 옛날이야기다. 나이는 들어도 할 일이 너무 많다. 논문을 참고하여 「국가중요시설과 안티드론」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간했다. 정부 기관이나 산업체 등에 근무 중인 비상계획관들에게 드론 공격에 대응하는 안티드론 시스템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공유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경찰청 등 몇 군데 강의다. 어떤 논문과 책을 참고하여 정부 과제나 논문 쓰는데 도움받았다고 하니 만족스러웠다. 안티드론 시스템을 연구하면서 초경량비행장치 조종자 자격증(드론조종 자격)도 따게 되었다. 실기시험이 의외로 만만치가 않아서 실습장이 있는 이천까지 수차 왕복하면서 재수하여 간신히 합격하였다. 혹 관련 학계와 방산업체 등을 알아보고 취업을 해볼까도 하였으나, 그리 만만하지는 않았다.


골프 프로선수였던 딸이 마침내 프로 입문 11년 만에 정규 투어에서 우승한 것을 계기로 그동안 쓰고 싶었던 골프에 대한 나의 생각을 담은 「홀인원보다 행복한 어느 아빠의 이야기」 수필집도 출간했다. 골프 수준이 보기플레이인 내가 기술적인 조언을 할 정도의 실력이 아니기에 멘털을 중심으로 그간 딸의 프로 생활 간 느낀 내용을 담았다. 골프 관련 미디어에도 골프칼럼을 1년 이상 연재도 했다. 갤러리 갔을 때 책을 잘 읽었다고 말해주는 독자를 만났을 때, 딸을 골프선수로 키우고 싶은 어떤 부모가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말해주었을 때 작가로서 만족스러웠다. 한갓진 시간을 갖게 되어 그동안 제대로 다니지 못했던 딸을 응원하기 위한 골프 갤러리도 마음껏 다녔다. 지금 딸은 은퇴하여 캐디를 했던 동생과 함께 골프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다.      


퇴직하고 얼마 후 ‘군장병 독서코칭강사’에 지원하여 2년간 활동한 적도 있다. 역사, 철학, 시, 소설, 과학, 자기 계발 등 분야별 6권의 선정된 책으로 지정해 주는 부대 장병들과 독서토론을 진행하는 프로그램이다. 미리 정독하고 파워포인터로 교재를 준비하였다. 아쉽게도 코로나 때문에 비대면으로 화상 수업을 진행했다. 권당 2시간이 설정되어 있는데 진행 과정에서 보초근무로 들락날락하는 장병도 있지만, 제대로 독서 탐구 열정이 뛰어난 장병을 보면서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를 보았다. 한갓진 가운데 보람찬 시간이었다. 이 과정에서 코칭강사를 제대로 잘해보고 싶어서 관공서에서 진행하는 독서 프로그램에 가입하여 어떻게 독서 코칭을 잘할 수 있는지 살펴보았다. 강사는 동네 책방주인이었다. 다독자이면서 자기가 읽어본 책만 판매하며 마음이 따뜻하고 젊은 사람이었다. 책을 사러 갔다가 한 달에 한 번 그가 운영하는 북클럽에도 나가게 되었다. 대부분 젊은 들이었고 내가 가장 연장자였다. 자유로운 그들이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후 책방 주인은 남편 따라 독일로 가버렸지만, 그 모임의 일부 인원들은 지금도 한 달에 1~2회 모이고 있다. 공통의 주제로 서로의 생각을 함께 나누며 토론을 해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시간이고 또 다른 즐거움이다.   

  

코로나가 아직 한창일 때 퇴직하였기에 여행도 마음대로 다닐 수 없었다. 퇴직과 동시에 3개월 헬스장에 등록하고 다녀보았으나, 코치가 무리하게 가르쳐주어서인지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야외 활동이 허용되는 테니스와 골프가 훨씬 재미있었다. 동네 테니스장 클럽에 등록하여 저녁이면 그들과 운동을 즐겼다.  흘리는 재미가 너무 좋다. 또 다른 테니스 모임은 주말에만 시간이 되면 나간다. 운동이 보약이다. 적당히 운동을 즐기다 보니 기분을 좋게 해주는 호르몬인 세로토닌, 도파민, 엔도르핀이 자연 방출되어서인지 퇴직 후 흔히 찾아온다는 우울증, 불안감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어느덧 퇴직 이후 찾아온 이 한갓진 시간도 다시 정비하게 되었다. 동기생의 추천으로 중소기업에 입사하였기 때문이다. 벌써 3년 차가 되어간다. 그렇게 바쁘고 힘든 업무는 아니다. 출퇴근으로 다시 목표와 계획이 있는 일정이다. 한갓진 시간에 가졌던 독서와 운동 그리고 글쓰기 등의 괜찮은 습관은 앞으로도 이어 나갈 생각이다.     


내게 미래가 또 어떻게 전개될지는 모르겠지만, 한갓진 인생의 오후라도 일은 계속하고 싶다. 70세까지? 80세까지? 나이를 굳이 따지고 싶지 않다. 노동이 주는 소중한 가치를 알기에. 능력이 닿을 때까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때까지. 지금 한갓지든 그러지 않든 이를 받아들이는 나의 태도가 중요한 것 같다. 한갓진 오후는 있을지라도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는 않다. 삶의 '무거움'과 죽음의 '가벼움'을 실감한다는 김훈 작가는 그의 최신작 「허송세월」에서 “혀가 빠지게 일했던 세월도 돌이켜보면 헛되어 보이는데, 햇볕을 쬐이면서 허송세월할 때 내 몸과 마음은 빛과 볕으로 가득 찬다. 나는 허송세월로 바쁘다...”라고 말한다. 틈틈이 여행도 좋고, 미처 그동안 못해본 일도 해보면서 나의 한갓진 오후조차 먼 훗날 돌아보면 허송세월에 불과할지라도, 후회하지 않고 지금처럼 의미와 가치 있는 시간이 되길 스스로 응원하고, 그러고 싶다. 언젠가는 편히 허송세월을 즐기고 싶다. 또 다른 한갓진 오후를 기다려본다. 더 많은 여유와 평온한 순간들을 만나기 위해. 인생 중반기, 동네 호수의 잔잔한 물결처럼 조용한 오후. 나만의 소소한 행복을 찾아가는 한갓진 순간은 늘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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