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똑같이 생긴 사람은 있어도 성격까지 똑같은 사람은 없다. 대량으로 생산되는 복제 인간이 아닌 이상, 세계 81억여 명 사람 모두 성격이 서로 다르다. 당연히 MBTI에서 분류하는 16가지 유형의 성격 그 이상이다. 그야말로 별의별 성격들이 다 있다. 나도 별의별 성격 가운데 한 명이다.
심지어 한 엄마의 뱃속에서 똑같이 먹고 자란 쌍둥이조차 닮은 듯하지만 다르더라. 적어도 나의 쌍둥이 아들들은 그러했다. 1분 차이로 세상에 나온 이들은 지금도 가끔 누가 형인지 동생인지 겉모습으로는 착각한다. 갓난아기 때 모유가 부족하여 분유를 먹일 때는 헷갈려서 먹은 놈만 계속 먹이는 실수를 했던 적도 있다. 처음에는 신기하기도 하고, 어떻게 이렇게 비슷하게 행동할까 했지만, 점점 커가면서 보니 한 놈은 문과생, 한 놈은 이과생 그리고 한 놈은 친가, 한 놈은 외가를 닮았다.
우리는 마침내 내 영혼의 반쪽이라는 짝꿍을 만나 자식을 낳고 가족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서로 지지고 볶으면서 사회화 과정을 거쳐 또 다른 가족의 울타리로 다름의 영역을 확대해 나간다. 누구보다 비슷한 생각과 생활방식 등을 함께 공유하는 구성원이 가족이다. 똑같은 환경에서 지내는 가족은 참으로 가까운 사이지만, 우습게도 쉽게 멀어질 수도 있는 관계다. 너무 친하다 보니 사소한 것에도 쉽게 마음이 틀어질 수 있다. 타인도 이 정도 해주는데 왜 가족이 이래? 가족이라고 소홀히 하면 안 된다. 가족끼리는 누구보다 서로 다름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100년 전에 나온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의 가족은 결국 변심하고 만다. 지금껏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해오던 아들 그레고리 잠자가 더 경제적 도움을 주지 못하고 벌레로 변해버리자, 결국 그의 가족은 아들을 부정하고 외면한다. 마치 괴물을 보듯 했다. 경제적 쓸모가 없어진 부모를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 보내는 오늘의 현실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물며, 우리는 오늘도 가족보다 더 낯선 이들과 어울려 이 전쟁터 같은 사회 속에서 먹고살기 위해, 때로는 상대를 이해하고 존중하기보다는 유유상종(類類相從). 코드가 맞는 이들끼리만 단합하고,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기치 아래 각자 치열하게 삶의 여정을 보내고 있다. 직장에서도 쓸모가 없으면 가차 없이 내보낸다.
우리 사회는 그 자체로 풍요로운 다양성의 집합체이다. 사람마다 성격, 에너지, 문화, 가치관, 그리고 경험 모두 다 다르다. 누군가에게는 작은 고통이라도 누군가에겐 치명적일 수 있다. 획일적인 흑백논리에 멍드는 사회가 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과 모든 관계도 완벽할 수는 없다. 이러한 다름은 때로는 갈등을 초래하지만, 때로는 조화와 이해의 기회도 제공한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은 우리가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필수적인 요소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단순히 다름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서로 다른 가치관과 의견을 가진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우선 열린 마음과 행동이 필요하다. 상대방의 의견을 무조건 받아들이거나 동의할 필요는 없지만, 그들의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부모나 자식 간에도 그동안 살아온 그리고 살아가는 방식과 가치관이 서로 다름을 인정한다면, 각자 삶의 영역을 존중해 주고 지나치게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머리(마음)로는 서로 다름을 이해하고 인정한다는데 행동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늘 문제가 생기곤 한다. 고민과 해결방식을 일방적 잣대로 재단하는 것은 서로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대화를 통해 생각을 나누고, 이견이 있더라도 존중하며 해결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가족도 아닌 사람들끼리 만나 서로 사랑하고 우정을 깊이 오랫동안 나누는 것은 삶에서 참 아름다운 시간이다. 우리는 늘 관계 속에서 성장하고 존재한다. 이 세상에서 서로 연결되지 않는 것이 없다고 믿는 이들은 인연 또한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연이든 필연이든 서로 고유성을 인정하고 존중한다고 모두 친구가 되고 애인이 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첫눈에 호감을 느끼고 가까워지는 사이도 있지만, 이런저런 우여곡절과 일희일비하는 지난한 시간이 있었기에 가능한지 모른다. 얼마나 대단한가.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에서 웬만하면 “안 하는 편을 선택하겠습니다! (I would prefer not to..)”라며 저항하는 바틀비처럼, 세상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소통이 정말 어려운 이들이 의외로 많은데 말이다. 그 많은 사람 가운데서 우리가 만나다니!
또한, 안타깝게도 참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기적 같이 어렵게 만나 애틋하게 이어온 사랑과 우정도 때로 너무 쉽게 깨져서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이별한다는 것이. 심지어 오늘의 전우가 내일은 적이 되는. 한때 행복했던 순간들을 쉽게 망각의 바다로 보내고, 허망한 욕심과 쓸데없는 허세와 비뚤어진 이기주의, 가당치 않은 배신의 오류에 빠져 또 다른 배신의 우(憂)를 범하는. 서로 다름을 받아들이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그 과정은 똑같으면서 말이다.
나는 적어도 그런 실수만은 하지 않고 오늘을 살아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