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처럼 이렇게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이면,
나의 보로메 섬으로 떠난다.
그 섬에는 아무도 없다. 섬에 발을 내딛는 순간, 오직 햇빛과 바람과 파도의 속삭임만 들려온다. 섬은 나에게 자신을 바라보는 시간을 돌려주고, 내 안에 숨어 있던 생각들이 천천히 드러나게 해준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마주한 숱한 선택들, 그 선택이 남긴 흔적들. 섬을 탐험하면서 나는 잊고 있었던 추억들도 만난다. 어린 시절의 꿈, 사랑했던 이들의 기억 그리고 잃어버린 열정...
한동안 매년 1~2회 정도는 제주도를 홀연히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냥 멀리서 한라산의 자태만 바라보아도 마음이 푸근했었다. 쉽게 다녀올 수 있는 한라산 영실코스를 특히 좋아했다. 마음이 메마를 때는 집 가까이 강화도의 마니산도 후딱 다녀왔다. 백령도와 연평도, 울릉도와 독도도 가보았지만, 하루에 다녀오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고 북한과 가까운 접경지역이라 마음도 심란해져서 쉽게 다가가기 어려웠다.
내게 섬이란, 고독하지만 그 늪에서 빠져나오면 늘 든든한 힘이 되어 주고, 자아 발견을 하게 해주는 그런 존재. 바다 냄새와 갈매기 울음소리가 가까운 곳에서 태어난 나는 멀리 조그마한 무인도를 바라볼 때면, 무언가를 늘 그리워하고 그곳에 왠지 늘 가보고 싶었던. 그런 곳이다.
어쩌면 우리 인생도 하나의 섬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눈에는 더없이 넓은 이 지구도 우주라는 광활한 차원에서 보면 한 점의 섬에 불과할지도, 우리가 보내는 하루라는 삶의 궤적도 회사, 집, 또 어떤 장소로 이어지는 하나의 섬과 같은 모양. 기동이 불편한 노인이나 환자에게는 그들이 지내는 거주지가 곧 그들의 섬이다. 어떤 이는 평생 마음속에조차 섬 하나를 품고 지내는 이도 있다.
우리가 섬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섬이 신비롭기도 하지만, 외로운 우리 인간을 너무 닮아 고독하게 보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여튼 인간은 그 고독 속에서도 서로 연결되어 있고, 그 연결이 결국 삶의 의미를 새롭게 만든다는 사실도 뒤늦게 깨닫고 있다.
알베르 카뮈의 고등학교 철학 스승이었던『섬』의 저자 장 그리니에는 “여행해서 무엇하겠는가? 산을 넘으면 또 산이요 들을 지나면 또 들이요 사막을 건너면 또 사막이다. 결국 절대로 끝이 없을 테고 나는 끝내 나의 둘시네아를 찾지 못할 것이니 그저 영광스러운 대용품들이나 찾을 수밖에 없다. 태양과 바다와 꽃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나에게는 보로메의 섬들이 될 것 같다.”라고 했다.
나도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나만의 보로메 섬으로 훌쩍 떠날 것이다. 세상이 꼭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과 고독은 이제 더 방황과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나를 더 성장하게 해준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즐겨 찾는 집 앞 호수공원이든, 뒷산의 작은 언덕이든, 은은한 커피 향이 퍼지는 동네 커피점이든 내 마음을 잔잔하게 해주는 섬 같은 분위기가 나는 곳이면 다 좋다. 그곳이 나의 보로메 섬이다.
나의 보르메 섬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내 마음의 거울이다. 밤이 찾아오고 별들이 하늘을 수놓을 때면 그 신비로움에 다시 감탄한다. 이젠 더 붙잡을 수 없는 악수, 정답던 시선과 미소, 삶이 무거워 시(詩)가 사라져버린 표정들. 삶의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별이 여전히 빛나고 있다는 것은 내겐 언제나 희망이고 위로다.
별이 보이는 그 섬에서 나는 바다 냄새를 맡고, 햇살을 쪼이면서, 새들의 지저귐을 들으며 숱한 아쉬움을 뒤로 하고 새로운 시(詩)를 발견하는 재미와 뒤늦게 알아차린 이 놀랍고 행복한 고독을 오래오래 즐기며 더 사랑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