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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네스 Jun 13. 2022

죽음 앞에서 우리는...

모네트 할머니가 돌아가셨어요

모네트 할머니, 안녕 (Adieu tante Monette)      

“모네트 할머니, 안녕” 는 무스 시리즈의 하나로 디안느 바르바르(Diane Barbara)가 글을 쓰고 알리스 샤르뱅(Alice Charbin)이 그림을 그려 르 소르비에(Le Sorbier)에서 2003년 출판한 프랑스 어린이 그림책이다.      

태어나고 살아가는 것만큼 죽음 역시 피할 수 없는 우리 삶의 일부이다. 가까운 사람과의 헤어짐은 즐거운 일이 결코 아니다. 게다가 다시는 볼 수 없다는 단절이 따르기에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렵다. 어른도 , 어린이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고 피할 수 없다. 무스의 이모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무스가 처음 직면한 죽음, 무척 슬프고 궁금한 게 많다. 무스는 할머니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자기 삶에 어떻게 새겨 넣을까...  

     

무엇을 기억할까     

무스는 여름 방학이 되면, 프랑스 북쪽 브르타뉴 지방에 있는 모네트 이모할머니 집에서 보낸다. 무스와 모네트 할머니가 여름방학 동안 그들의 일상을 함께 만들어갔다. 무스가 엄마 아빠와도 그리고 친구들과도 일상을 함께 만들어가듯이 말이다. 무스는 할머니와 같이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기도 하고 카드놀이도 했다. 우리는 함께 했던 일들을 기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보다 함께 했던 사람들과 나누었던 감정들을 더 많이 기억한다. 기쁨, 설렘, 놀라움 등등. 그래서 무스는 모네트 할머니를 좋아한다.      

어느 날 집으로 걸려온 한 통의 전화에 무스는 무척 혼란스럽다. 모네트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다. 할머니가 왜 죽어요? 그래서 할머니는 어디에 계세요? 할머니를 땅에 묻는 게 뭐예요? 엄마와 아빠가 할머니의 죽음으로 슬퍼하고 우는 것만으로도 뭔가 심상치 않은 일임엔 틀림없다. 그래서 더 궁금한 것들이 많다. 엄마 아빠는 슬프지만 침착하게 무스의 궁금증에 하나씩 대답을 한다. 모네트 할머니는 연세가 많으시고 약해진 심장이 정지한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죽음에 대해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장례를 치르기 위해 친척들이 다 모인다는 이야기에 무스는 잠시 기뻐하지만 모네트 할머니를 볼 수 없다는 사실에 다시 깊은 슬픔 속에 잠긴다. 친척들이 다 모이는 일은 축제와도 같다. 그런 축제의 날에 당연히 만날 수 있었던 할머니를 만날 수 없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그리곤 할머니를 땅에 묻는 게 뭔지, 할머니가 어떻게 작은 상자 안에서 숨을 쉴런 지 걱정이 앞선다. 할머니가 영원한 삶에 이를 수 있게 기도하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다. 무스의 질문마다 엄마와 아빠는 눈물을 닦으며 더도 덜도 아닌 있는 그대로 설명한다. 관이라고 하는 커다란 상자 안에 할머니를 눕히고 땅에 그 관을 묻는다고 말이다. 그리고 사람이 죽으면 더 이상 숨을 쉴 필요가 없다고도 덧붙인다. 죽음에 관련된 말 한마디 한마다에, 단어 하나하나에 송곳에 찔리는 듯한 아픔이 숨어있다.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섬찟하다. 더욱이 아이들에게 그 말을 피하고 싶다. 말을 하지 않거나 다른 말로 대체하거나 포장해서 말하고 싶은 이유이다. 그래서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아이들에게 언제부터인지 금기어가 되어있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에게 생명이 살아 숨 쉬는 말만 하고 싶은 것은 부모로서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닌데도 말이다. 더욱이 아이도 죽은 이와 이별을 잘해야 하지 않을까? 


어떻게 이별할까? 

무스를 중심으로 주변 사람들이 모네트 할머니의 죽음을 무스와 같이 받아들이는 모습이 무척 따뜻하다. 무스의 할머니는 무스에게 눈물을 흘리며 그의 슬픔을 전한다. “무스 네가 옆에 있어서 참 좋다”라고 말이다. 할아버지는 “무스 너도 알다시피 모네트 할머니는 너를 많이 사랑했단다”라고 말한다. 죽음 앞에서 죽은 이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그림책을 보면서 가장 따뜻한 장면이다. 서로 섣부른 위로를 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슬픔을 전한다. 자기가 기억하는 것을 전한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한다는 조언 따위도 하지 않는다. 세자르 할아버지는 집에서 모네트 할머니의 죽음을 맞아 찾아온 친척들과 친구들을 따뜻한 수프로 대접한다. “모네트가 가장 맛있게 요리한 음식 중의 하나”라는 말을 놓치지 않는다. 모네트의 할머니 집엔 할머니의 사진이 예전처럼 놓여있다. 무스에게 커다란 슬픔이 몰려왔다.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슬픔, 그것은 슬픔을 지나 두려움인 것이다. 자기가 알고 있는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사실만큼 큰 두려움은 없을 것이다. 당장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절망감이 밀려온다. 무스는 엄마와 아빠 그리고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을 수도 있는지에 대한 두려움에 앞선다. 아빠는 무스에게 침착하게 설명한다. “우리 모두는 언제가 죽지만 당장은 아니다. 우리는 함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시간들이 있다”라고 말이다. 모네트 할머니와 함께 했던 순간들에서 만났던 행복감을 다른 사람들과 충분히 나눌 수 있다는 말이다. 

모네트 할머니와 삶의 일부를 함께 만들면서 나누었던 감정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 감정들은 무스가 다른 사람과 또 다른 삶을 조각할 때 반석이 될 것이니 말이다. 무스는 할아버지와 헤어지면서, 자신의 목에 둘렀던 목도리를 할아버지 목에 두른다. “할아버지가 슬프거나 추울 때 자기가 늘 옆에 있을 거”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 가까운 이의 죽음 앞에서 깊은 슬픔에 온 몸이 녹을 거 같아도 슬퍼하는 아이의 궁금함에 덜하거나 꾸미지 않고 설명을 하며 감정을 나누는 무스의 엄마 아빠, 자신의 동생을 잃은 깊은 슬픔을 아이에게 표현할 수 있는 할머니, 그리고 아내가 잘했던 요리로 가까운 사람들에게 수프를 대접하며 아내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을 나누는 세자르 할아버지, 이러한 모습들이 죽음을 맞이한 사랑하는 사람을 허망하게 떠나보내지 않고 그들과 함께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이 아닐까.  

    

판단, 위로와 조언은 그 누구에게도 필요하지 않다. 

엄마를 잃는 슬픔은 내게 두려움이었다. 아주 오래전 어렸을 때, 엄마 손을 놓친 적이 있다. 시장에서 함지박 한가득 떡을 맞춰 찾아오는 날이었다. 명절을 앞둔 날이었던 것 같다. 엄마와 함께 방앗간에 갔다. 엄마는 떡이 담긴 함지박을 머리에 무겁게 이며 한 손으로 그것을 받치고 다른 한 손은 내 손을 잡았다. 그런데 어쩌다 엄마 손과 내 손에 틈이 생겼던 것 같다. 엄마가 옆에 없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한 발짝도 움직일 수도, 눈을 돌려 엄마를 찾을 수도, 아니 엄마를 찾아야겠다는 다급함 조차도 없었다. 울지도 못했다. 세상이 그대로 멈췄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엄마가 보였다. 저 멀리서 힘겹게 뛰다시피 하며 다가왔다. 엄마는 지나 온 길을 거슬러 한 손엔 머리에 무거운 짐을 받친 채 다른 한 손은 마구 흔들면서 다가왔다. 엄마가 보이니 세상도 보였다.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때 울었다. 그때 다리가 움직여 뛸 수 있었다. 엄마는 내가 놀랐을 거라는 짐작에 이제 괜찮다는 말로 웃으며 품에 안아줬다. 한 번 내리면 다시 머리에 얹기 힘든 무거운 짐을 머리에 그대로 얹은 채 말이다. 그때 이후로 가끔씩 엄마가 없는 상상을 하며 두려움에 떨면서 지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리고 주변에 어른들이 하나 둘 눈을 감을 때도 난 그들과 헤어지는 슬픔보다도 우리 엄마를 다시 보지 못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에 울며 두려움에 떨었다. 그런데 엄마가 결국 먼 길을 가셨다. 어렸을 때 엄마를 잃었던 기억이 다시 나를 짓눌렀다. 엄마가 없는 세상은 외려 내가 다른 세상에 와 있는 착각을 하게 했다. 정말 울 수도 없었다. 주변 사람들이 내게 ‘비난’과 ‘위로’를 서슴지 않았다. ‘엄마 임종도 안 지킨 나쁜 놈’, ‘얼른 잊어라’, ‘너무 슬퍼하지 말아라’, ‘그래도 오래 사셨잖아’, ‘산 사람은 살아야지’... 삼우제를 마치고 떠나오는 내게 ‘넌 외롭지도 않니? 지독하다, 그 먼 곳에서 혼자 지내고’... 그동안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그리고 들린 말이다.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이런 말을 끊임없이 하는 걸까? 

그러다... 울음이 터져 나왔다. 언니들과 엄마 이야기를 나누면 서다. 엄마를 기억하며 엄마의 따뜻했던 마음을 나누니 엄마가 다시금 보였다. 내 안에 엄마를 영원히 살아 숨 쉬게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엄만 말보다, 내가 울면 나와 같이 울고, 내가 아플 땐 나보다 더 아파했다. 내가 먹어야 엄마가 음식을 입에 넣었다. 엄만 어떤 판단도 조언도 위로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가오는 말들이, 공중에 떠다니는 말들이 하나같이 쓰레기다. 사람들은 왜 늘 판단하고, 평가하고, 위로를 하려고 하는 걸까. 무스와 무스의 가족들처럼 살고 싶다. 이 그림책이 다시 눈에 띄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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