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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네스 Sep 11. 2022

아이와 생쥐

두려움과 호기심

작은 소녀와 생쥐 (la petite fille et la souris)      

“작은 소녀와 생쥐” 는 프랑스 작가 크리스틴 노만 빌맹(Christine Naumann-Villemin)과 마리안 바실롱(Marianne Bacilon)이 2012년에 에꼴데로와지르 출판사를 통해 공동으로 발행한 그림책이다. 두 작가는 각각 텍스트와 이미지로 자기 서사를 가지고 있는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아이와 생쥐, 전혀 다른 두 존재가 만난다. 외려 마주친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다. 아이는 어둠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 생쥐는 한 줌의 빛을 향한 ‘호기심’을 가지고 배관을 타고 올라와 서로 마주치기 때문이다. 그 둘의 우연한 ‘만남’은 각자 자신만의 고유한 서사를 만드는 모티브가 되고, 둘은 전혀 다른 관점의 이야기를 펼친다. 뿐만 아니라 둘의 ‘만남’은 편견과 위계의 관계를 흔드는 ‘사건’이 되는데, 작가들은 '페이지 레이아웃'을 통해 그 변화를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으며, 그것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무척 흥미롭다. 

‘페이지 레이아웃’ (page layout 프랑스어로 미정빠쥬, mise en page)은 위키백과에 따르면, 여백, 색상, 크기 등의 구성요소들을 고려하여 타이포그래피, 사진, 일러스트 등 여러 종류의 그래픽들을 배열하는 것인데, 특히 이 그림책에서 페이지 레이아웃을 따라가며 작가의 메시지를 읽는 것이 그림책을 읽는 즐거움을 두배로 끌어올리고 있다.   

   

한 집에 두 가족이 살고 있다. 윗 층, 아이들이 엄마에게 엄마 어렸을 때의 이야기를 해달라고 한다. 엄마는 아이들에게 자신이 어렸을 적 두려움에 떨었던 첫 경험을 이야기한다. 같은 시간, 아래 층의 생쥐들이 그들의 엄마에게서 ‘옛날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생쥐들의 엄마는 아이들에게 그들의 할머니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할머니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험을 했던 이야기이다. 

엄마는 어렸을 적, 흉물스럽고 끔찍하게 여긴 생쥐와 마주친다. 더욱이 어둠에 대한 두려움으로 밤마다 불을 켜고 자야 하는 상황에서 말이다. 몰아내고 물리쳐야만 할 존재에 대한 인식은 이면에 늘 ‘두려움’을 동반한다. 어렸을 적 엄마는 생쥐를 내치려고 갖은 애를 쓰지만, 그런 와중에 기존의 인식과 전혀 다른 생쥐의 모습을 발견하는 경험을 한다. 반면, 생쥐들의 할머니는 낯선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그의 인생에 가장 경이롭고 아름다운 만남을 경험한다. 두려움에 떨었던 경험과 아름다운 만남에 대한 경험이 같은 장소에서 같은 순간에 일어난 이야기라고 짐작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림책 마지막 겉표지에서 작가가 밝혔듯이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관점’이다. 같은 상황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도 이야기는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둘은 ‘우연한 만남’이 계기가 되어 각자 자신들의 관점으로 만든 이야기 속에서의 특별한 주인공이 된다. 또 그들은 삶의 주체가 되어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인생을 건설하고 꽃을 피우는 ‘사건’을 만든다.      

한 가지 지나치기 쉬울 수 있는 부분에서 역시 작가의 섬세함이 드러난다. 사람과 생쥐의 평균수명의 차이를 각각의 이야기의 주인공인 아이들의 엄마와 생쥐들의 할머니로 맞춘 것이 그것이다.   


먼저, 그림책의 본문으로 들어가면, 두 페이지 각각에 같은 집이 그려져 있다. 왼쪽 페이지의 집, 불이 켜진 창을 통해 한 가족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두 번째 페이지로 눈을 돌리니 같은 집인 듯 하나 다르다. 한 가족이 보였던 창문의 불이 꺼져 있고, 집 아래층에 불이 밝다. 생쥐 가족이다. 한 집에 두 가족이 살고 있었던 거다. 뿐만 아니라, 생쥐 네에 불이 밝혀있고 위층 창문엔 불이 꺼져 있음에도 여전히 사람들의 실루엣이 보인다. 사람들은 자신들 이외에는 그들 주변에 있는 어떤 존재에도 관심이 없으나 생쥐들은 그들 주변에 누가 있는지, 늘 눈여겨보고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방증하고 있다.   

왼쪽의 집엔 아이의 가족만 살고 있고, 오른쪽의 집엔 아이의 가족과 생쥐네 가족 즉, 한 집에 두 가족이 살고 있다. 한 집에 누가 사는가 역시 관점에 따라 다르다. 


두 번째, 집 내부로 들어가면 그림책의 방향을 90도로 돌려서 봐야 한다. 위쪽 페이지는 아이의 방이다. 커다란 침대 위 아이가 누워있다. 아래쪽 페이지에는 벽돌로 된 벽 오른쪽에 배관이 있고 바닥엔 작은 성냥갑이 놓여있다. 그 작은 상자 안에 생쥐가 있다. 무척 대조가 되는 장면이다. 생쥐에 비해 여자 아이는 어마어마한 거인이다. 사람과 생쥐는 크기의 차이로 봐서는 거의 만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그 둘의 어마어마한 크기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이어주는 게 있다. 한 줄기 불빛에 대한 생쥐의 ‘호기심’이 그것이다. 

생쥐의 한줄기 불빛에 대한 호기심과 열린 마음은 '우연한 만남'을 위계의 관계를 흔드는 '사건'으로 만든다. 


세 번째, 생쥐의 호기심에 의한 아이와의 우연한 만남 이후, 왼쪽 페이지엔 아이의 관점이 담긴 아이의 이야기, 오른쪽 페이지엔 생쥐의 관점이 담긴 생쥐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여기에서 페이지 레이아웃이 단연 돋보인다. 페이지 레이아웃을 통해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잠재된 메시지를 읽을 수 있는데, 무척 흥미롭다. 텍스트의 위치를 보면 여자아이의 관점이 담긴 텍스트는 상단에, 생쥐의 관점이 담긴 텍스트는 하단에 그것도 상대적으로 여자아이의 관점보다 글자가 적고 글자 크기마저 작다. 여기 두 관계에서 계급적인 서열이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존재에 대한 위계이다. 우리 사회에서 사람과 짐승 사이의 위계, 어른과 아이 사이의 위계, 아이와 작은 짐승 사이의 위계가 존재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아이와 생쥐는 인간과 짐승의 관계를 대변하며, 나아가 편견으로 가득 찬 어른과 낯선 세상에 대해 늘 호기심을 가지고 열려있는 어린이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다음은 감정의 위계이다. 아이는 두려움이 가득하다. 두려움이란 감정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자연스러운 감정이지만, 늘 크게 부각된다. 자신의 두려움이 너무 커서 상대를 보지 못한다. 어둠에 대해 두려움을 가진 아이, 생쥐에 대해 두려움을 가진 아이의 크기가 더 크고 아이의 행동에 과장이 섞여 있는 것이 그것이다. 반면 생쥐가 느끼는 경이로움에 대한 감정의 크기 역시 크기로 부각되고 있다. 그러나 두려움과 호기심에서 비롯한 경이로움이 다른 감정에 비해 크게 부각되는 위계를 가지고 있지만, 특이할 만한 것은 '두려움'은 나 자신을 부각시키는데, '경이로움'은 상대방을 돋보이게 한다. 두 감정은 모티브가 같다. 서로 거울로 비칠 수 있다. 두려움은 경이로움으로, 경이로움은 두려움으로 상환될 수 있는 감정인 것이다. 둘 다 낯선 세계에 대해 알 수 없는 것에서 비롯한 감정이다. 그러나 그 감정이 생쥐에겐 ‘호기심’으로 발현된 반면 아이에겐 ‘두려움’으로 발현된 것은 ‘편견’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아이는 스펀지와 같아서 부모가 하는 말, 행동 등을 자연스럽게 흡수한다. 부모의 말 한마디, 얼굴 표정, 행동 하나하나를 아이는 눈여겨본다. 부모를 통해서 사회를 인식한다. 부모가 속한 사회에서 흐르는 고정관념과 편견을 받아들인다. 예를 들면, 왜 우리는 쥐를 흉물스럽고 더럽고 잔인하고 소름 돋는다고 생각할까? 처음 보는데도 말이다. 일상에서 익히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것이 일차적인 편견이다. 때문에 아이에겐 아이만의 경험이 필요하다. 아이는 자신도 모르게 들어와 있던 생쥐에 대한 편견으로, 생쥐를 처음 봤을 때 팔짝팔짝 뛰고 생쥐를 쫓아내려고 했다.    

아이와 생쥐의 텍스트의 위치가 대조적이다. 또 두려움과 경이로움의 감정은 실제보다 늘 크게 부각되는데, 두려움은 상대를 보지 못하지만 경이로움은 상대를 발견할 수 있다.


네 번째, 아이와 생쥐의 관계가 눈에 띄게 변하는 장면이 있는데, 여기에서 페이지 레이아웃이 단연 돋보인다. 바로 아이가 생쥐의 눈물을 보는 순간이다. 아이와 생쥐가 각자 한 페이지를 채우면서 마주 보고 있다. 생쥐의 관점이 담긴 텍스트 역시 상단으로 올라와 있다. 이 장면에 주목하는 이유는 아이의 ‘깨달음’이다. 그림책의 앞쪽 내지로 다시 돌아가면, 새장이 보이고 하나 둘, 셋 새들이 새장을 나오는 듯한 이미지를 볼 수 있다. 이 이미지가 이 그림책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새장은 바로 사회가 만들어 놓은 틀이며 편견이다. 아이 그리고 우리는 어떤 세상에서 살고 싶은가. 부모 그리고 사회가 만든 편향된 인식을 받아들이며 새장과 같은 틀 속에 갇혀 살 것인가, 아니면 자기 삶의 주체가 되어 스스로 인생을 건설하며 살 것인가. 

아이는 처음에 생쥐를 거부했다. 생쥐를 피하기 위해 폴짝폴짝 뛰거나 생쥐를 물리치기 위해 급한 대로 코에 향수를 뿌렸지만, 생쥐의 눈물이 아이의 눈에 보였고 그 눈물에 아이는 자기가 생쥐를 두려움의 대상으로 혐오스럽게 생각한 부분에 대한 성찰이 이어진다. 생쥐가 해로운 대상이 아니라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나한테 해로운 존재가 아닌데, 누군가 성찰 없이 던진 편견으로 인해 막연한 두려움으로 상대를 공격하는 것, 그것이 상대를 나와 다른 차이로 안 보고 차별로 보는 편견의 시선이다. 아이는 자신이 처음 겪은 경험으로 자신도 모르게 들어와 있던 편견이 깨지는 순간을 맛본다. 두려운 상황에서 ‘도망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쥐에 대한 편견이 깨지고 생쥐를 재발견하는 아이 자신의 고유한 경험을 한다. 반면, 상대적으로 생쥐는 호기심과 경이로움으로 세상을 만난다. 어떤 편견도 없다. 그림책 내지에 있는 제목 아래에 생쥐가 예쁜 드레스를 입고 미소 짓는 모습에서 아무런 편견 없는 생쥐의 한계 없는 상상력을 엿볼 수 있다.       

아이의 편견이 깨지면서 둘 사이의 위계가 흔들린다. 아이와 생쥐는 각각 한 페이지를 차지하며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생쥐의 텍스트 역시 아이의 택스트에 맞춰 상단으로 올라와 있다.


결국, 사람과 짐승, 어른과 아이, 아이와 짐승 그리고 알게 모르게 사람들 사이의 모든 관계에서 눈에 보이지 않게 흐르고 있는 위계는 생쥐와 같은 열린 마음, 낯선 세계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아이와 같은 상대를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마음 등으로 인해 힘을 잃게 됨을 살펴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젠 더 이상 생쥐를 무서워하지 않느냐는 아이들의 질문에 엄마는 여전히 조금... 이라며 말을 흐린다. 그러나 아이들이 쥐가 아직도 구멍에 있는지 물어봤을 때 엄마는 ‘같이 한 번 볼까?’라고 한다. 엄마는 아이들의 호기심을 차단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세상으로 한 발짝 나갈 수 있도록 말이다.     

우리는 어떤 세상에서 살고 싶은가.



아이는 부모가 가진 관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아이의 호기심이 차단당하지 않고, 아이가 스스로 만나는 세상에 대한 경험이 쌓이면서 부모에게서 흡수된 편견의 색깔들이 하나씩 옅어질 수 있다. 그때 부모의 판박이로서가 아닌 아이가 자기 고유의 인생의 길을 찾고 자기 삶을 건설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이 그림책이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출판된 것은 무척 반길 일이나, 제목이 “생쥐야, 착각은 자유야!”이다. 이런 제목으로 왜곡시킬 작품은 아니다. 많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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