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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네스 Nov 01. 2022

브런디바

'사람'을 봐야할 때이다 

 BRUNDIBAR 

     

그림책 “브런디바(brundibar)”는 토니 크슈네(Tony Kushner)가 글을 쓰고, 모리스 샌닥(Maurice Sendak)이 그림을 그려 2003년에 공동으로 펴냈다.  


브런디바의 이야기는 나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8년 아돌프 호프메이스테르(Adolf Hoffmeister)와 체코 독일계의 한스 크라사(Hans Krasa)에 의해 만들어진 어린이 오페라이다. 이 오페라는 나치시대 유대민족의 권력에 대한 저항과 연대를 다루고 있다. 오페라는 1942년 프라하에 있는 유대인 어린이 고아원에서 처음 비밀스럽게 무대에 올려졌고, 큰 호응을 얻었다. 폴란드계 유대인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모리스 샌닥은 그의 출신과는 특별히 관계없이 그의 생동감 있는 그림으로 특히 아이들의 권력에 맞선 저항과 연대의 모습에 촛점을 맞춰 그림책에 담고 있다.   

   

두 아이 아닝카와 페피첵은 아버지 없이 엄마와 산다. 엄마는 아프고 의사는 엄마가 신선한 우유를 먹어야 나아질 수 있다고 이른다. 아이들은 우유를 구하러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가는데 그곳엔 온통 상인들 뿐이다. 우유를 사야 하고 돈이 있어야 한다. 우유를 사기 위해 광장에서 노래를 하기로 한다. 그러나 그 광장엔 이미 손풍금을 가지고 노래를 해서 돈을 버는 ‘브런디바’가 있다. 아이들이 노래를 하려고 하자 브런디바는 아이들을 내쫓는다. 마을의 광장에서 노래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본인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노래를 잘하든 못하든 상관없다. 사람들은 듣기 거북한 브런디바의 노래에 돈을 선뜻 내어주고 아이들은 차가운 뒷골목으로 내쫓긴다. 그때 새 한 마리, 고양이 그리고 개 한 마리가 다가온다. 아니카와 페피첵은 새, 고양이 그리고 개에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새 고양이 개는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데 그때 삼백 여명의 아이들과 함께다. 삼백 명의 아이들은 아니카와 페피첵이 광장에서 노래를 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들은 엄마를 위해 우유를! 폭군에겐 맞서야 한다! 사람들은 늘 도움을 주고 싶어 한다. 도움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보다 어려운 것은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라는 피켓으로 그들의 연대를 보여준다. 그리고 직접 요구한다. 우리는 돈을 벌기 위해 노래를 하고 싶다고 말이다. 사람들은 삼백 명의 아이들의 요구에 동참한다. 광장에서 노래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브런디바의 억지를 무력화시킨다. 아닝카와 페피첵은 감동의 노래를 하고, 사람들은 아이들의 노래에 환호하며 돈을 건넨다. 그 와중에 브런디바는 아이들이 받은 돈을 가로채려 한다. 브런디바는 광장에 모인 사람들에 의해 쫓겨난다. 아이들은 다행히 우유를 사고 엄마는 그 우유를 먹고 회복이 된다. 아이들은 연이어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데, 브런디바가 사라진 곳에 그의 메시지 하나가 남아있다. “그들은 싸움에서 이겼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난 곧 돌아올 것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절대 없다. 독재자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독재자가 사라지면 다른 독재자가 나타난다. 우리는 곧 다시 만날 것이다. 난 떠난다. 그러나 멀리 가지 않는다.”      


그림책 ‘브런디바’는 나치시대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그림책을 읽다 보면 굳이 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없어진다. 현재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브런디바가 떠날 때 남긴 메시지에 눈길이 멈춰진다. 브런디바는 어떤 확신이 있었을까? 브런디바는 자신의 손풍금을 가지고 광장에서 노래를 하고 그로 인해 돈을 버는데, 그것을 독점하고 있다. 그의 노래 실력이 형편없음에도 말이다. 그의 권력이 어디에서 비롯한 것일까? 그림책을 보다 보면 쉽게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브런디바의 권력의 힘은 바로 대중에게서 비롯된다. 독재자의 권력은 저 혼자 만들어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브런디바의 노래가 형편없음에도 불구하고 돈을 준다. 노래하고 장소를 독점할 권력을 부여해준 것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동의하는 게 무엇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아이들은 우유가 필요해 사람들이 많은 곳을 찾는다. 그러나 그곳엔 물건을 파는 판매자들과 물건을 사는 구매자들만 있다. 그 이외의 관계는 찾아보기 어렵다. 아이들의 이야기가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다.  

일상에서 우리는 어려움을 자주 만난다. 어려움이라고 했을 때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은 거의 없다. 두 아이, 아닝카와 페피첵에겐 엄마가 아픈 게 그들의 첫 번째 어려움이고, 우유가 필요하고 이어 돈이 필요하다는 어려움이 줄줄이 따른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맞닥트린 어려움을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광장에서 노래를 하려고 하는데, 또 다른 어려움을 만난다. 그것은 이전의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 노래하는 것을 독점하고 노래할 수 있는 장소를 독점하고 있는 권력을 만난 것이다. 이런 독점력은 두 아이의 노력만으로 사실상 해결하기 어렵다. 그러나 마침 두 아이의 어려움에 귀 기울이는 자들이 있다. 바로 힘없고 평소에 눈에 띄지 않는 약자들이다. 작은 새, 고양이 그리고 개다. 그들이 아이들의 상황을 듣는다. 그리곤 이어 삼백 명의 아이들과 함께 돌아온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게 뭘까? 바로 ‘연대’이다. 광장엔 구매자들과 판매자들만 있는 반면엔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사람이 있고, 연대가 있다. 

한편, '연대'는 어떤가? 아이들의 구호처럼, 우리는 일상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 한다. 그래서 도움을 줄 곳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정작 도움이 필요할 때 섣불리 도와달라고 이야기하기 어렵다. 왤까? 도움을 줄 때의 마음을 생각하면 어렵지 않다. 그곳엔 우월감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광장엔 판매와 구매만 가득하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을까. 도움을 청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 비해 뭔가 부족해 보이고 약해 보이는 느낌이다. 우월감과 상대적인 것이다. 도와 주는 방법도 많지만 그 방법에 대해서는 그다지 고민을 하지 않는다. 돈으로 할 수 있는 도움에 익숙해져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대'는 우월감도 자괴감도 만들지 않는 사람 사이의 평등한 관계에서 비롯하고 평등함을 낳는 행위이다. 당장 내게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도움을 필요로 할 수 있는 것은 곧 내게도 도움이 필요할 수 있다. 우리는 늘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야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람이 살아있을 때 독재자와 권력을 몰아낼 수 있다.     

  

여성노동자가 일하다가 죽었다. 그 노동자가 일하는 기업은 그동안 노동자들의 인권 유린과 노동의 악조건으로 유명했다. 사람이 일하다 다치는 것은 다반사고 결국 사람이 죽었다. 프랑스에 그 기업이 운영하는 빵집이 있다. 한국 빵집 상표 가맹점이라는 것을 전혀 알 수 없을 정도로 한국의 특색을 전혀 드러내지 않으면서 장사를 하고 있다. 그래서 사실상 그 빵집이 한국 대기업 빵집 가맹점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 프랑스 노동 총동맹이 그 빵집 앞에서 집회를 했다. 앞서 밝힌 집회 이유에 ‘프랑스의 파리바게뜨 매장은 한국 상표의 가맹점이다. 이런 이유로 한국에서 노동자들에 대한 인권 침해로 인해 이익을 얻고 있는 매장들이 그 기업에 동조해서는 안되며, 매장의 영업주들은 노동자들의 인권침해를 멈출 수 있도록 기업의 경영진들에게 이의를 제기하고 요구해야 한다’고 했다. 프랑스 노동총동맹이 놓치지 않은 지점에 주목했다. 이번 노동자의 죽음은 단지 그 기업의 일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기업이 노동자의 인권을 유린해서 만든 빵으로 배 불리는 가맹점들과 그 빵을 여태 사 먹은 시민들에게도 책임이 골고루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불매운동이 번지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니 다행이지 싶지만, 아직 갈 길은 멀다. 기업의 독점력과 독재자의 권력욕은 우리들의 일상을 갉아먹고 있기 때문이다. ‘브런디바’처럼 말이다. 판매와 구매만 있는 곳엔 ‘브런디바’가 되살아나며 '사람'이 설 자리를 빼앗는다. 사람이 없는 곳엔 연대는 점점 자리를 잃고 만다. 일하다 죽고, 걷다가 죽고, 놀다가 죽을 수 있는 일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끔찍하고 잔혹한 현실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사람'을 보는 일이다. 그것을 그림책 ‘브런디바’에서 찾는다.               


그림책 “브런디바”는 어린이 오페라 브런디바를 모리스 샌닥의 다이내믹한 그림과 토니 큐슈네의 각색으로 그림책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마치 극장에서 오페라를 보는 듯 현장감이 있어 곧 빠져든다. 그림책 첫 장을 넘기면, 두 아이, 아닝카와 페피첵이 스스로를 소개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엄마가 아파 아이들에게 의사를 불러달라 외치는 모습 역시 무척 다급해 엉덩이가 들썩여진다. 게다가 각각의 등장인물들은 만화에서 볼 수 있는 말풍선을 통해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는데, 다만 두 아이들은 말풍선에서 각자의 이야기를 하는 것과 동시에 화자가 되어 한 목소리로 말풍선 밖에서 전체적인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다. 더욱이 일러스트레이션은 각각의 페이지를 꽉 채우고 있다. 두 아이들을 짓 누르는 듯한 압박감마저 드는데, 아이들이 느끼고 감당해야 하는 어려움을 대변하는 듯하다. 그러나 모리스 샌닥이 선택한 색감은 나치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그 시대를 연상했을 때의 암울함 혹은 늘 권력의 억압에 신음해야 하는 상황에서 느낄 수 있는 어둠과는 반대로 무척 밝고 다체롭다. 그림책을 따라가면서 찾을 수 있는 한 줌 희망을 그리고 있는 듯하다. 

    

특히 모리스 샌닥의 그림책에서 인물 ‘브런디바’의 묘사가 두드러진다. 카키색 군복과 군화용 장화 그리고 특유의 콧수염의 브런디바는 아돌프 히틀러를 연상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반면 그의 독단적인 행동에 반해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것은 아마도 모리스 샌닥의 관점이 반영이 된 것이라 보인다. 그밖에 전체적으로 무척 상징적이다. 우선, 엄마를 진찰하는 의사의 옷에서 그리고 아닝카와 페피첵을 돕고자 함께 온 아이들의 옷에서 유대인의 노란 별을 연상시키는 별이 눈에 띈다. 또한 그림책 내내 등장하는 까마귀들이 있다. 때론 아닝카와 페피첵 옆에서 아이들을 지키기라도 하는 것처럼, 브런디바의 손풍금 상자에서 마치 브런디바를 대변하는 양, 아닝카와 페피첵이 광장에서 노래를 할 수 있도록 돕는 여러 아이들을 부모에게서 떼어 등에 태우고 가는 까마귀들에게서 묘한 이질감마저 느끼는데, 그러나 결국 브런디바가 쫓겨 달아날 땐 그 등 뒤에서 쫓는 것을 부추기기도 한다. 상황마다의 까마귀들에게서 각기 다른 우리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브런디바의 마지막 메시지는 두고두고 되새길 일이다. 엄마를 회복할 수 있게 한 의사의 처방이 결국 브런디바를 내쫓게 한 단초가 된 것처럼 일상에서 권력에 대한 저항의 동기는 끊임없다. ‘연대’를 잃지 않는다면 '브런디바'가 곧 다시 찾아올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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