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강릉과 선정릉의 숲길 속에서
언젠가 나는 동구릉과 홍유릉으로 왕릉과 관련된 단상을 올렸다. 그리고 난 다음에도 최근 서울에 소재한 왕릉을 몇 군데 더 다녀왔는데, 이를 통해 국내의 많은 왕릉들이 공통적으로 경제발전의 논리 앞에서 맥없이 무너져 내렸음을 조금 더 진지하게 느낄 수 있었다.
사실 노원구에 있는 태강릉과 강남구의 선정릉을 합치면 일가족이 나오게 된다. 먼저 강남구의 선릉은 9대 임금인 성종과 그의 계비인 정현왕후의 자리고, 정릉은 둘의 아들이자 11대 임금인 중종이 잠들어 있다. 한편 노원구의 태릉에는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가 있고, 낙엽으로 수북하게 수놓인 숲길을 따라가면 명종과 인순왕후가 잠든 강릉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넷을 합하였을 때 가족사가 완성이 되는데 아래와 같다.
원래 선릉은 조선의 9대 임금인 성종과 계비인 정현왕후 윤씨가 묻힌 곳이었다. 그리고 11대 임금인 중종은 첫 계비이자 인종의 생모이기도 한 장경왕후 윤씨와 함께 잠들어 있었다. 그렇지만 중종의 두 번째 계비이자 명종의 생모였던 문정왕후 윤씨는 자신이 중종의 곁에 묻히고 싶었다. 그래서 문정왕후는 침수를 명분으로 중종의 자리를 선릉 쪽으로 옮겼다. 그렇지만 사실 문정왕후가 강제로 옮긴 능역인 지금의 강남은 지대가 낮은 곳이었고, 비가 오면 잘 침수되는 곳이었다. 이 문제로 인하여 문정왕후는 결국 중종의 곁에 묻히지 못한 채 노원구의 태릉에 자리를 잡았다. 그 근처로 명종과 인순왕후가 묻히면서 명종은 죽어서까지 생모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한 아이러니를 감수해야 하였다.(실제로 숲길이 개방되었을 때 숲길을 따라 걸으면 서로 통한다.) 그리고 중종은 그 어떤 왕비를 곁에 두지 못한 채 선왕 부부의 곁에 자리를 잡았다. 나의 시선에는 한 시대를 살았던 계비의 집착이 불러온 하나의 코미디라는 생각이 강하게 맴돈다.
여담으로 선릉과 정릉은 그 이후에도 수난을 한 차례 더 맞는다. 바로 임진왜란 중에 일본군에 의해 능이 도굴당한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선릉과 정릉은 주인이 없는 빈 집으로 남아 있다. 선릉과 정릉이 도굴당하였다는 사실은 전쟁이 끝난 후 조선 조정이 일본과의 국교를 재개하는 문제에서도 논란이 된 진원이었다. 조선 조정은 일본의 에도 막부가 국교 재개를 요청하자, 왕릉을 도굴한 범인을 보내는 것을 조건으로 걸었다. 이에 에도 막부에서 두 사람을 보냈는데, 사실 이들은 진범이 아닌 막부가 돈을 주고 산 대리인들이었다. 그럼에도 조선 조정은 이 부분을 크게 문제를 삼지 않았고, 그렇게 기묘한 흐름 속에서 조선과 일본의 국교는 재개되었다.
동구릉과 홍유릉 편에서 언급하였듯, 능역을 기준으로 최소 100보~최대 200보 내로 출입하는 문제뿐 아니라 농경지 개간과 집을 짓는 일 등은 금기였다. 그렇지만 정작 왕릉 주변을 볼 때면 공통적으로 크고작은 농경지 혹은 상업시설이 있다. 설령 그보다는 조금 낮을지라도 관공서를 비롯한 콘크리트 건물들도 어렵지 않게 눈에 띄고 있다. 이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의 급속한 경제발전을 거치면서 드러난 수난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식민지 권력기구가 헐값에 왕릉 주변의 토지를 사람들에게 불하하였고, 문화유산을 경시하는 돈의 논리는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태릉과 강릉도 이와 같은 개발의 논리를 피해갈 수 없었다. 주변의 넓은 부지에는 대학이 셋이나 들어왔는데, 바로 육군사관학교와 서울여자대학교, 그리고 삼육대학교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화랑대 선수촌 건물들이 들어섰고 조금 거리가 떨어진 곳에는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다.(숲길을 통해 강릉과 태릉을 오갈 때 나무들의 틈 사이로 아파트가 보인다.) 그나마 이 정도는 나은 편에 속하였다. 적어도 최소한의 경관은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즉 관람객이 왕릉 내에 있는 동안은 솔숲이 칙칙한 도시의 단면을 가려주는 역할을 하였기에 온전히 내부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이다. 2009년 조선왕릉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을 뿐만 아니라, 화랑대 선수촌도 철거가 결정된 상황이니 이 정도라면 지금 시점에서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그와 반대로 원래 지대가 비교적 낮았던 선정릉 주변은 태강릉이 맞은 수난보다 더 심하였다. 고층 건물 및 온갖 상업 시설들이 들어섰던 것이다. 콘크리트 재질의 칙칙한 마천루의 숲 가운데에 섬처럼 남겨진 것이었다. 그나마 왕릉을 둘러싼 코앞의 건물들이 낮은 편이지만, 하나같이 왕릉을 내려다보는 구조임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관람객들이 왕릉 내부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다. 심지어 정릉을 볼 때는 능으로 이어지는 홍살문이 초라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거대한 마천루들이 우뚝 서 있기까지 하다. 그래서 내가 선정릉을 한 바퀴 돌 때는 답답하면서도 문화유산에 대한 저열한 인식이 느껴져서 부끄럽고 한심하다는 생각이 맴돌았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은 도심에 이만한 녹지가 어디냐고 할 것이고, 전통과 현대의 조화 아니냐는 다소 억지스러울 수 있는 논리를 펼 것이다. 심한 경우에는 지금이 왕조시대도 아닌데 시곗바늘을 과거로 돌릴 생각이냐고 불만을 토로할 것이고, 실제로 온라인상으로 경험하였다. 이와 같은 주장의 이면에는 문화유산을 두고 일렁이는 무수한 욕망들이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현실적으로 능역을 과거의 모습으로 돌린다는 자체는 그래픽을 통한 모형 혹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당면한 현실이 그렇다고 해서 나는 문화유산의 의미가 퇴색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이는 단지 유네스코에 등재된 왕릉 중 하나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발상의 전환을 하였을 때 이를 다르게 활용할 여지가 충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눈앞의 금전적인 이익에 눈이 먼 나머지 옛 것을 가볍게 여기고 함부로 대하였을 때 문화유산이 맞게 될 상황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문화유산 및 주변 토지를 두고 벌어질 갈등 상황을 어떤 식으로 조정할 수 있을지의 영역도 결코 간과될 수 없다. 그렇다면 오늘을 살아갈 때 무엇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문화유산을 어떻게 활용해야 적절할까? 쉽지 않지만 반드시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영역임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