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추첨으로 서울대 들어가는 것이 정말 공정한 사회일까?

by 신진상
공정 이후의 세게.jpg

외고생들의 독서 목록을 보면 그들이 참으로 마이클 샌델을 좋아하고 특히 ‘공정하다는 착각’을 정말 많이 읽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죠. 그런데 샌델은 비판은 잘 하지만 대안은 잘 못 내놓는 전형적인 사회과학자입니다. 그가 하는 비판은 구구절절 옳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내놓는 대안 능력주의가 최선은 아니고 차악이니 능력주의 대신 추첨을 도입하자는 주장은 정말 공정한 걸까요? 예를 들어 수능을 절대 평가로 전환해 일정 등급을 받으면 대학 학업 능력이 있다고 인정한 뒤 그 안에 드는 학생들끼리는 추첨으로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성균관대 등 대학을 추첨으로 결정하는 제도를 도입한다면 우리는 입시지옥도 사라지고 모두가 행복하는 사회가 올까요?

애리조나주립대 커뮤니케이션학과 김정희원 교수의 ‘공정 이후의 세계’는 공정하다는 착각을 읽고 공감은 가지만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분들이 읽으면 딱 좋은 책입니다. 그는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공정 담론이 폐쇄 담론으로서 시험을 통한 차별화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툴로 폄하합니다. 정시가 수시보다 공정하고 사시가 로스쿨보다 공정하다는 주장은 진정한 공정과는 거리가 먼 한쪽 입장(시험에 강할 수밖에 없는 세력)을 마치 전 국민의 생각인 것처럼 오도하는 허위 이데올로기라는 주장이죠. 한국에서 입시를 거쳤고 미국에서도 미국의 입시를 해마다 겪고 있는 그는 이렇게 묻습니다. 단 하루 시험 결과로 평생이 결정되는 지금의 한국 시험 만능주의가 과연 입으로 공정을 외칠 자격이 있을까? 정말 수능은 1시간 동안 독학해서 올린 점수와 1시간 동안 과외를 받아 올린 점수가 같을까?

저는 두 질문에 대해서 정확한 답을 알고 있습니다. 전자는 자격이 없다가 답이고 후자는 두 점수는 다를 수밖에 없다입니다. 적어도 시험의 공정성이란 관점에서는 김 교수와 제가 입장이 같죠. 시험이 가장 공정하다는 주장이 시험에 관한 여러 담론 중 가장 공정하지 않다는 사실이죠. 물론 마이클 샌델로 이 주장에 적극 공감합니다. 시험 성적으로 모든 차별이 허용되는 사회는 시험을 위해 모두를 무한 경쟁에 몰아넣게 되고 소수의 승리자를 제외한 절대다수를 불행하게 만드는 불합리한 제도입니다. 모든 사회구조가 인간의 행복을 위해 존재할 필요는 없지만 그 사회 구성원 절대다수가 불행할 수밖에 없다면 그 재도의 존재 의의는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시험의 공정성은 허구와 기만에 불과하고 실은 자유주의가 자유를 공정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팔아먹는 사회라는 비판은 정말 맞습니다. 자유는 정말 좋은 것이지만 공정과 자유가 같이 쓰이면 그 무엇보다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어둠의 가치입니다. 다면 대안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이 궁금해질 수밖에 없죠. 이건 정말 어려운 문제입니다. 일단 김 교수가 생각하는 대안을 볼까요? 김 교수는 관계와 돌봄을 공정 이상의 가치로 대한민국이 받아들이는 세상을 꿈꿉니다. 성적을 집어넣으면 직업과 결혼 인간 대접 등의 대가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기게 같은 사회가 아니라 돌봄의 가치가 사회적 모든 관계에 깔려 있는 그런 유기적인 사회로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어떻게 보면 차별이 없으면서 풍요도 있는 그런 사회를 지향하고 있는 거죠. 그런데 저는 또 묻고 싶습니다. 그런 사회가 어떻게 가능할까요? 중앙대 독문과 김누리 교수처럼 자본주의적 풍요를 누리면서 대입의 경쟁이 존재하지 않는 독일 같은 사회가 우리가 지향할 사회 같아 보입니다. 독일은 사회 자체가 돌봄 그 자체인 나라 맞습니다. 그런데 돌봄의 문제는 돌봄은 오직 한시적으로만 경쟁력과 공존할 수 았다는 점입니다. 한때 세계 자동차 산업을 호령했던 독일이 전기차 시장에서 미국은 물론 중국 심지어 한국에도 밀리게 된 데에는 의사결정 시스템에 노동자가 참여하는 특유의 의사결정구조 때문은 아닐까요? 돌봄과 사회적 책임을 기업에까지 강요하면 전지국적 자본주의 체제에서 분명 경쟁력을 언젠가는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공정 이후의 세계’는 공정과 상식을 외치는 지금의 세상이 전혀 공정하지도 않고 상식적이지도 않다는 주장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공정 이후의 세상이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가에 대한 설득력 있는 대안 제시에는 실패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읽을 가치가 충분합니다. 그 이유는 여전히 시힘이 가장 공정하다는 생각들을 특히 젊은 남성들이 많이 갖고 있기 때문이죠. 페니미즘에 대한 거친 야유와 시험을 통해 정규직화 하는 사회적 메커니즘에 대한 일방적인 칭송은 우리 사회 젊음이 지닌 가장 쿤 문제입니다. 그의 책은 매트릭스 바깥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열어 줍니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실제 세상이 아니라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매트릭스 같은 세상이라는 것만 깨달아도 큰 의미가 있기 때문이죠. 이 사실을 깨달으면 어느 누군가는 네오가 되려고 노력할 것이고 그 노력에 수많은 사람들이 동참하면서 매트릭스 시스템에 균열이 올 수 있음을 우리는 영화를 통해서 보았습니다. 김 교수는 공정에 대한 비판은 대단히 냉철했지만 공정 이후의 세게에 대해서는 매트릭스를 만든 와쇼스키 자매처럼 대단히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접근을 취했습니다. 의의와 한계가 동시에 느껴지는 책입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피터 잭슨이 밝혀 낸 비틀스의 창의력의 뿌리